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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6화 (116/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6화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탓일까. 내도록 잊고 있던 동생에게 생각이 미쳤다. 기실 그럴 만했다. 기억이 없는 와중에도 옥동에게서 흔적을 보았던 막냇동생. 그 막냇동생을 겨우 찾았는데, 어영부영하는 사이 제대로 말도 못 나누고 헤어져 버렸으니.

‘당신은 내 형이 아니야.’

“……”

아니, 말을 나누긴 했다. 상처투성이의 말이었을 뿐.

이화는 열린 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하얗게 얼어붙은 눈이 환한 햇살을 튕겨냈다. 사방으로 비산한 빛은 백호의 눈마저 찌르고 들어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바로 하곤 종종거리며 앞서가는 옥동을 따라붙었다. 그 등에서 계속 어린 태화가 아른거렸다. 그땐 몰랐던 것이 지나고 보니 훤히 보였다. 태화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혈육 운운하며 저를 밀어낸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리 겁이 났을까.’

……설마 태백 형님 때문인가? 형님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 질투?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사저의 대문 앞이었다. 제 손을 꽉 쥔 무륜이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널 볼 때마다 항상 같은 생각을 했지. 세상에 어찌 이런 것이 있을까. 한입에 삼키면 딱 좋겠다.”

이화는 그가 종종 하던 저 말이 농이라고 생각했다. 농이어야만 하는 말이다. 하지만 무륜은 한 번도 농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가 항상 진심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돌아가면 열흘 밤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화는 대답도 못 하고 얼굴만 붉혔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옥동이 제 호위무사에게 손을 까닥였다. 무사가 허리를 숙였다. 옥동이 그의 귓가에 손을 모아 대고 속삭였다.

“백호님이 폐하께 뭘 잘못하였나?”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좋아서 놓아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하, 알겠다. 밤에 꼭 안고 주무시려고 그러시는구나.”

범인이라면 못 들을 소리였지만 이 자리에 범인은 없었다.

몽휼이 거하게 사레가 들려 쿨럭쿨럭 기침을 해댔다. 위중혁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그림자가 들썩였다. 코빼기도 안 보이던 흑월이었다. 겨우 찾았다고 기뻐하기에 이화의 낯은 그리 두껍지 못했다.

무륜이 께느른히 웃었다.

“그걸 어찌 알았나, 위금성주.”

옥동이 배를 똥 내밀며 말했다. 가슴을 편다는 게 배를 내미는 모양새가 된 것 같았다.

“저도 안고 자는 인형이 있어 알았습니다.”

“호오. 그것 참 귀한 인형이겠구나.”

“물론입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건데 매일매일 안고 자도 질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안고 잘 겁니다.”

“나도 그렇다.”

그렇게 말하는 무륜의 시선이 이화에게 꽂혔다.

“매일매일 안고 자도 질리지 않더구나. 물론, 오늘도 안고 잘 것이다.”

“…….”

아이고, 옥동아.

가라앉으려던 이화의 얼굴이 다시금 확 붉어졌다. 옥동발 대참사에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태연한 건 여율령만큼이나 능글맞아진 무륜과 아무것도 모르는 옥동뿐이었다.

무륜이 이번엔 그런 옥동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짧은 시간 무언가 깊이 생각한 그가 허리를 숙였다. 옥동의 어깨에 한쪽 손을 턱 얹은 그가 말했다.

“위금성주.”

“예, 폐하.”

“내 양자가 될 생각 없나.”

방금 전 옥동의 입에서 나온 건 참사도 아니었다.

“폐하아아아?!”

무륜을 따라 먼 길을 피난 왔던 신료가 기함했다. 본래 붓보다 무거운 걸 잡아보지 않은 허약한 문관들이다. 안 그래도 비쩍 곯아 있던 그들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목내이가 보면 동기간인 줄 알 것이다.

옥동은 보옥 같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해맑게 웃었다.

“없습니다. 저는 위금성에서 났고, 위금성에서 죽을 겁니다.”

“그렇군.”

무륜은 두 번 묻지 않았다. 위금성주의 작은 어깨를 툭툭 두드린 그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옥동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방금은 혹 시험이었습니까?”

“그래.”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훌륭하게 통과했다. 선대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옥동은 기뻐서 손뼉을 짝 쳤지만 그를 제외한 이들은 속지 않았다. 시험 같은 소리 하시네. 방금 그건 청경보다 선명한 진심이었다. 몽휼이 무륜을 흘기며 작게 말했다.

“필시 얼른 자리 물려주고 이화 님과 신선놀음하려 하시는 게지.”

위중혁이 눈치 없이 말을 받았다.

“그러면 안 되나?”

진해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안 되지 않나? 천태백호님이 말씀하시길, 인세는 복잡하고 혼란하다 했다. 황제쯤 되면 그 복잡함과 혼란의 중심에 있을 것인데……. 안 된다기보다 어렵겠군.”

흑룡은 황궁 물 거하게 먹은 위중혁보다 훨씬 황궁 사람 같은 말을 했다. 그를 깨달은 위중혁의 낯이 붉어졌다. 은근히 주변을 보지 않는 흑룡은 그러거나 말거나 머릿속으로 무슨 계산을 해봤는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확실히 어렵다. 무엇보다 후계가 없지 않나. 그렇게 물러나면 황제에게도 백호에게도 질척거리는 방해꾼들이 들러붙을 것이다.”

진해가 말한 방해꾼은 머리 싸매고 드러누울 대소신료를 말함이었지만 질척은 모르겠고, 다른 의미로 방해꾼이 될 생각이었던 위중혁이 흠칫했다. 위중혁의 그림자도 같이 흠칫했다.

“폐하.”

옥동이 돌연 웃음기를 지웠다. 진지한 얼굴의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황제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헤쳐낸 한 성의 성주가 고아한 자태로 읍했다.

“무사 귀환을 빕니다.”

“그래. 나 역시 위금성의 번영을 염원하지.”

말은 염원이라 했으나, 그것이 마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모두가 알았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땅. 황제가 대대로 남방 5국에서 후와 비를 맞이하게 된 이후, 용의 외척이라는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그때 누린 영광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쪽에 붕새가 나는가.’

문관들의 눈빛이 변했다.

전쟁 직후 귀족들과 신료는 두 파벌로 나뉘었다. 수도에 남아 지한국에 손 비비며 어떻게든 일신의 안녕을 도모한 이들. 전시라 큰 도움은 되지 못할지언정 무륜을 따라 패퇴한 자들.

전자는 이제부터 피비린내 나는 대가를 치르거나, 도망자의 삶의 살게 될 것이다. 후자의 문관들은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무륜을 따른 것이 과연 옳았을까. 그냥 식솔과 함께 수도에 남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루에도 열두 번 가슴앓이했다.

하나 말이 휴전이지, 승전에 가까운 결과로 전쟁이 끝났을 땐 과거 서로 파벌이 달라 으르렁거렸던 이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댔다.

이제 됐다. 돌아가면 자신들의 세상이다. 이제 높은 자리 하나씩 꿰차고 천년만년 권력을 누려보리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돌연 위금성주가 튀어나왔다. 해가 지나 이제 열한 살이 된 소년은 낭중지추였다.

지한국군에 밀려 내려올 때마다 무리의 구석에서 따라온 것이 전부인 신료와 달리 그는 무륜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쐐기 같은 시선이 옥동을 향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무륜은 그 또한 귀족임을 잊지 않았다. 일견 무구한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철갑을 두른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무륜은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국가 간의 분쟁은 일단 결착이 났다. 짧으면 삼 년. 길면 십 년. 지한국은 후계 문제와 타국에 대한 견제로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하지만 무륜 자신의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돌아가면 지긋지긋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전장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폐하.”

이화가 슬쩍 손가락을 얽어왔다. 그가 옆에 있음을 되새긴 무륜은 아무래도 좋아졌다. 그의 낯이 봄볕 아래 서리처럼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그래.”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왜. 설레느냐?”

“예. 너무 들떠서 좀처럼 진정이 안 됩니다.”

솔직한 대답이 사랑스럽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 흘러넘쳤다. 무륜은 얽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깊은 시선이 이화를 향했다.

“크흠.”

몽휼이 헛기침을 했다. 무륜은 제 가장 가까운 수족을 흰 눈으로 흘겼으나 몽휼은 딴청을 피웠다. 그 뒤편으로 눈만 말똥말똥 뜬 군세가 무륜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무륜은 지엄한 황상으로 돌아와 대군 앞에 섰다.

“금성으로 귀환한다. 전군 출(出).”

“출!”

창을 내리찍은 무수한 군세가 무륜의 말을 복명복창했다. 환호성이 위금의 하늘을 갈랐다.

“와아아!”

“돌아간다!”

무륜은 고루한 출정식 따위 하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이 가장 기다린 말을 했다.

귀환.

패배하고 짓밟힌 나날들을 잊은 건 아니었으나, 비탄과 슬픔은 저 말 앞에 흐려졌다. 우린 이겼다. 이겨서 집으로 간다. 그 사실만이 병사들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럼 보중하시게, 위금성주.”

“예. 폐하께서도 옥체 강녕하소서.”

위금성주는 떠나는 이들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배웅했다. 호위무사가 날이 춥다며 몇 번 재촉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 무륜을 비롯한 선두의 무리가 점처럼 작아졌을 때, 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위금성이 다시 적막해지겠구나. 시원섭섭하다’ 했다.

시원은 무슨. 그저 섭섭하시구먼. 호위무사는 내심 혀를 찼다. 그는 옥동을 어르고 달래 겨우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떠난 자는 떠났고 남은 자는 남았으니, 이제부턴 각자의 앞날을 그려야 할 때였다.

무륜은 맨 앞에서 말을 몰았다. 이화는 백호로 분해 그의 옆을 걸었다. 노란 눈동자가 무륜의 등을 힐금거렸다. 굳은 등에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지한국의 일도 당장은 정리가 되었으니 조금 천천히 가도 되건만. 이리 급하게 길을 나선 것은 다 연유가 있었다.

아직 2월이지만 이곳은 남쪽이었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위금강이 슬슬 녹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얼음이 완전히 녹기까지 기다렸다 배를 수배해야 할 터였다. 심지어 수만 군세가 타야 할 배다. 그렇게 되면 금성에는 여름에나 당도할 터.

“조금만 더 행군 속도를 높이지.”

“예, 폐하.”

그로부터 이틀 후. 무륜이 이끄는 군세가 위금강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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