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5화
“그리 말씀해 주시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이렇게 보니 확실히 상서령을 닮았어.”
“어떤 점이 말입니까.”
“혀가 아주 잘 미끄러지는 점과 못 하는 소리가 없는 점.”
“그건 당신을 닮아 그렇습니다.”
절 닮아 그렇다는 말에 무륜이 움칠했다.
“하긴. 네 열다섯일 때 내가 널 잠깐 키우긴 했지. 그때 다 키워서 여율령에게 잠깐 맡겨놨을 뿐이니 너는 내가 키운 것이다. 그렇지?”
“예. 폐하의 말이 모다 옳습니다.”
여율령이 들었으면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 통탄했을 소리였지만 잠든 사람이 듣긴 뭘 듣겠나. 이 난장판에 한 손 거들어주지 않아 심통이 난 건 아니다. 진짜 아니다.
“잠깐 맡겼을 뿐, 저는 처음부터 당신의 것이었죠.”
농담처럼 말했는데 무륜의 낯이 불현듯 심각해졌다. 몸 여기저기를 지분거리던 손이 뚝 멎었다. 나는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싶어 어리둥절했다. 멀뚱히 눈만 깜박이는데, 내 양어깨를 쥔 무륜이 진지하게 말했다.
“다시.”
“예?”
“다시 말해봐.”
“……폐하의 말이 모다 옳습니다?”
“그다음에.”
깊은 검은 눈이 욕망으로 반짝였다. 그다음에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머릿속으로 되짚어보고 그의 욕망이 어떤 욕망인지 알게 됐다.
“저는 처음부터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스물넷을 지나 그 어디쯤. 갈 곳 없는 마음이 흘러넘쳐 갈피를 잡지 못하던 무렵의 무륜이 나를 덮쳐왔다. 강한 악력에도 아프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무륜. 당신이 좋습니다.”
그 외의 다른 말은 필요치 않았다.
“널 볼 때마다 한입에 삼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지.”
옷 안쪽을 쑥 파고들어 온 손이 맨살을 더듬었다. 근육의 생김을 하나하나 더듬는 손길에서 진득한 욕망이 느껴졌다.
“배 속에 넣어두고 다니다 필요할 때만 꺼내서 품에 안고 어르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별생각을 다 하셨군요.”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으냐.”
“…….”
“반대로 네 안에 내가 들어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
“물론, 일부만 들어갈 테지만 아주 장대한 일부겠지.”
“윽.”
무륜의 손길은 거친 듯 다정했다. 정확히는 거친 척을 할 뿐, 귀한 도자기라도 다루듯 상냥하고 조심스러웠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혀가 아주 잘 미끄러지고 못 하는 소리가 없는 게 날 닮아 그렇다 했던가.”
아니, 그 이야기를 왜 지금 꺼내시나. 등줄기가 서늘한 것이 불길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 잘못했으니 그만두라는 뜻이었다.
무륜은 천하에 다시 없을 악당처럼 웃었다.
“진짜 잘 미끄러지는 혀가 어떤 건지 보여주마.”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은데요.
“못 하는 소리가 없는 입도 보여주지.”
그것도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자, 잠-!”
“됐어. 말할 필요 없어. 다 알아.”
알긴 뭘 알아!
“흐윽!”
* * *
해 질 무렵이 되어 무륜은 드디어 본래의 나이로 돌아왔다. 기억을 온전히 되찾은 그가 주먹으로 모포를 내려쳤다.
“단둘이면 뭐 하나. 이제 곧 반나절이 끝나가는데!”
이대로 도망칠까? 그럼 몽휼 그놈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올 것이다. 빌어먹을 놈. 어찌 단둘이 있게 해주질 않는단 말이냐.
중얼거리는 무륜이 어이가 없어 눈을 흘겼다.
“방금까지 단둘이서 나누었던 운우지정은 뭡니까. 제 꿈이었습니까?”
“아. 깼느냐.”
무륜이 분한 얼굴을 싹 지우고 뻔뻔하게 몸을 맞댔다.
“미안하다. 네가 나보다 연상이라고 생각하자 좀처럼 자제가 되지 않더구나.”
“평소에는 뭐 자제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음? 당연히 자제했다만.”
“…….”
어이가 없어 턱이 툭 떨어졌다. 그게 자제한 거라고? 백호의 몸으로도 다음 날 운신이 힘들 지경이었는데? 어느 날은 너무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진해를 찾아갔다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어물거리며 돌아 나온 적도 있는데?
“양심과 정력을 등가교환 하셨습니까?”
내가 흰 눈으로 보자 그가 말을 돌렸다. 어디 결리는 곳은 없는지 물으며 슬금슬금 허리께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또 어찌나 다정하던지, 하마터면 또 어물어물 넘어갈 뻔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이왕 말 나온 김에 확실히 해야겠다.
매번 허리가 남아나질 않으니 운신이 힘들다. 거슬릴 만큼 아픈 건 아니지만 불편함은 문제가 된다.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혹 무륜에게 뭔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쩐단 말인가.
무릇 좋지 못한 버릇은 고쳐야 마땅한 법. 나는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넘어가면 내가 백호가 아니라 기린이다.
“살살 한다고 하셔놓고 다음 날 운신이 불편했던 적이 몇 번이며, 적당히 한다고 하셔놓고 새벽닭이 운 게 또 몇 번입니까.”
“네가 너무 좋은 것을 어찌하겠느냐. 너무 좋아서 일단 네게 몰두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가 않아.”
무륜이 애원하듯 내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이, 이런다고 그냥 넘어가진-”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러마. 그러니 기분 풀어라. 응?”
……나는 그냥 기린 하기로 했다.
무륜은 저 때문에 내가 팔자에도 없는 기린이 된 줄도 모르고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한숨처럼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달갑지 않은 사색이 찰나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자라는 무륜을 보니 어쩔 수 없이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한순간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나보다 작았던 열다섯의 그는 서른을 목전에 둔 어른이 됐다.
때까치 영물의 옥패가 만들어낸 환상에 의한 반나절이었지만 그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몇 세대가 늘어났어도 그렇다. 신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또한 찰나와 같으니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아직 아무것도 모를 무륜이 나를 불렀다.
“이화야. 날 봐라.”
어느새 눈을 뜬 그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날 보면 된다.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만 보면 돼.”
나에 대한 거라면 신수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무륜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려 했지만 울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중에 잠깐 어딜 가게 되겠지만 금방 오겠다.”
“……기다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 바람처럼 다녀오마. 네 기다린 줄도 모르게 금방 올 것이다.”
고작 그 한마디로 먼 훗날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봄볕에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순순히 입맞춤을 받자 무륜이 몸을 일으켜 내 품을 파고들어 왔다.
“이미 클 만큼 크신 것 같은데 아직도 옥패의 영향이 남은 겁니까.”
놀리듯 묻자 그가 볼멘소리를 했다.
“단둘이 있는 시간이 적으니 아쉬워서 그런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해 지고 밤 되면 득달같이 제 처소로 오셨잖습니까? 그러곤 밤새 저를 빈대떡처럼 이리 휘떡, 저리 휘떡 뒤집으셨죠.”
“밤은 밤이고 낮은 낮이지. 나는 낮에도 둘만 있고 싶다.”
양심까지 만인지상일 필요는 없을 텐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쨌든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돌아가지 않으면 몽휼은 진짜 밀영군 절반을 떼어내 추격대를 보낼 겁니다.”
“보내라지. 여기 위대한 백호가 있는데 밀영군 녀석들이라고 별수 있겠느냐.”
“그렇게 실패하면 두 번째 추격대에는 진해 님도 그 안에 포함시킬 겁니다.”
몽휼이라면 무슨 수를 쓰든 넣을 것이라 담담히 말하자 무륜은 부정하지 못했다. 나는 슬쩍 당근을 내밀었다.
“옥석제는 밤이 더 떠들썩하다고 하는데, 돌아가서 마저 즐겨야지 않겠습니까.”
무륜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해가 정수리에 떴을 때 가로지른 설원은 밤이 되자 또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다. 휘영청 높이 뜬 달과 화려한 은하수가 눈 덮인 산과 들을 굽어봤다. 같은 계절이라 그런가. 천태백산 꼭대기의 사당에서 본 것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 밑엔 은하수를 등진 채 설원을 내달리는 백호와 백호의 등에 탄 사내가 있다.
“세상에 너와 나 둘뿐인 것 같구나.”
* * *
무륜은 뒤늦게 설명을 들었다.
“오.”
반응은 그게 끝이었다. 몽휼이 이마를 짚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분명치 않음에도 수명이 늘었다는 사실이 그저 기꺼운 것 같았다.
‘장수보단 이화 님과 같이할 날이 늘어서 좋으신 거겠지.’
무륜의 감탄사와 함께 일련의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위금성은 밤새 떠들썩했다. 곳곳에 화톳불을 지펴 어두운 곳이 없게 했고, 사람들은 불가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마지막엔 사람들의 소원을 모은 대나무를 조심스럽게 거둬 짚으로 꽁꽁 싸맸다.
지금은 위금강이 얼어붙어 바로 흘려보낼 수 없다. 그래서 물이 녹아 흐르기 시작하는 첫날, 도시를 대표하는 자들이 강으로 가서 대나무를 물에 흘려 보낸다. 위금 사람들은 그날을 ‘위금의 봄’이라고 불렀다.
“그리 멀지 않았군요.”
“그래. 그러니 우리도 슬슬 서둘러야지.”
옥석제가 끝나고 사흘. 금군을 비롯한 무륜의 사람들이 귀환 준비를 시작했다. 위금의 사람들은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다. 짐을 실은 수레와 그 수레를 끌 말들이 열을 맞춰 서고, 병사들도 여정을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
드르륵.
“안에 계셨군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위금성주 옥동이 활짝 웃었다. 금 자수가 들어간 3겹 비단옷. 꽤 격식을 갖춘 옷이었다.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으셔서 열었습니다.”
“잘했다.”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자 옥동이 재차 웃었다.
“귀행(歸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가자.”
앞서는 옥동을 뒤따르며 이화는 눈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