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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4화 (114/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4화

“몽휼은 어딜 간 거지?”

대략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무륜은 몽휼이 사라지자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확실히 아직 어리고 미숙했다.

나는 그의 앞에 섰다. 나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았다. 미친. 이게 뭐라고 설레나. 염치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공손히 읍했다.

“전후 처리를 하러 갔습니다. 일이 몰아치고 있거든요. 대충 들으셨지만, 폐하께서 폐하가 되신 후에 아주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 아직도 믿어지진 않지만 믿어야겠지. 몽휼만이 아니라 금군대장인 위중혁도 곁에 있었으니.”

나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무륜이 움찔하며 낯을 붉혔다.

“그것 좀 안 하면 안 되나?”

“무엇을요?”

“그렇게 웃는 것 말이다.”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자 무륜이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니……. 됐다.”

“흠. 일단은 저와 함께 가시죠.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거든요.”

어려도 무륜은 무륜. 그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로 갈 것이냐.”

“설원으로 갈까 합니다.”

“설원?”

“예. 하얗게 펼쳐진 눈과 하늘을 높이 나는 새와 저희 둘뿐인 곳으로 갈 겁니다.”

“…….”

열다섯. 황궁의 핏줄이라 이때 이미 닳고 닳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무륜은 표정 관리가 도무지 되지 않았다.

* * *

무륜을 등에 태우고 온통 하얀색 일색인 땅을 내달렸다. 그는 이미 설원인데 어디까지 가느냐 묻지 않았다. 그저 묘한 눈으로 하얀 세상을 응시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나 또한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작은 눈송이가 그저 많이 모였을 뿐인데 광활한 대자연은 그 작은 것으로 우릴 압도했다.

등을 쥐는 그의 손에 악력이 더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풍경은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니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직도 낯을 가리는지 대답은 없었다.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빨리 스물넷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하필 스물넷이지?”

“당신이 절 만났던 나이거든요.”

무륜은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너는…….”

그가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 미처 완성치 못하고 닫더니 망설임 끝에서야 다시 말을 꺼냈다.

“너는 정말……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구나.”

“사람을 홀리는 줄은 모르겠고, 당신께 홀려 있긴 합니다.”

“미친 진짜.”

신음하는 그의 반응에 큰 소리로 웃었다. 때까치 영물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으나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고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수명을 늘릴 기연이었음을 알고 있음에 더더욱 그렇다.

내 발이 멈춘 것은 설원의 한복판이었다. 땅을 두들겨 지반을 세우고 두꺼운 천막을 세우자 그럴듯한 임시 거처가 생겼다.

안으로 들어서 바리바리 싸 온 걸 정리했다. 두꺼운 모포를 바닥에 깔고 그보다 더 두툼한 이불까지 넣었다. 작은 반상을 구석에 두고 보자기로 싼 함과 호리병을 올렸다.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을 때, 두리번거리며 무륜이 들어왔다.

“그건 뭐냐.”

“음식이요.”

정확히는 음식과 군것질거리였다. 여덟으로 나뉜 판에는 당과와 약과, 떡 같은 단것이 가득했다.

판을 한 손에 챙겨 들고 냉큼 무륜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가 헉하며 바둥거렸지만 완력으로 백호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소용없음을 깨달은 무륜이 얌전해졌다. 모든 것이 낯설 텐데도 긴장은 하지 않는다. 무의식에서 나를 믿고 있음이 느껴져 새삼 가슴이 벅찼다.

나보다 선이 어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몸이 다른 의미의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다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 물었다.

“당과를 드리리까. 약과를 드리리까.”

“…….”

“둘 다 싫으시면 식혜를 드리리까.”

“뭐 하자는 거지, 이게.”

낮게 웃자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무륜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언제고 무륜이 말했다. 나는 좀 더 당당해도 되노라고. 그 뜻을 받들어 당당하게 말했다.

“제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다.”

* * *

한 번쯤 해봤던 상상이다. 아니, 사실 여러 번 했다. 나와 무륜의 입장이 반대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무륜이 비루먹어 팔려 가는 민가의 어린애라는 건 말도 되지 않으니 약간만 바꾸어서. 음. 그러니까, 나는 여씨 가문의 정통한 장자로 앞날이 창창한 차기 권력자이고 그는 연도 끈도 없이 유폐된 어린 5황자라면?

한 번 시작된 상상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말석의 황자에서 황제가 되는 험준한 여정. 궂은일과 험한 일은 모두 내가 했을 것이다. 생채기 하나 입지 않게 애지중지하고, 그가 갈 길은 떨어진 사기 조각 하나 없도록 아주 깨끗하게 닦았을 것이다.

나보다 어린 그가 장성하여 나보다 더 크고 위대해지는 걸 곁에서 지켜보며 마침내 면류관을 쓴 순간. 그 찬란함을 한 점 놓침 없이 기억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그래. 내가 가장 아쉬웠던 건 그것이었다. 그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다는 것.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내 품에서 약과를 먹던 무륜의 손마디가 살짝 굵어졌다.

“……그렇군. 내 어머니와 가신들은 정말로 죽은 거군.”

위로하듯 그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자 ‘너는’ 하고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무륜이 입을 다물었다. 그 후 침묵 속에 약간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나는 북궁에 유폐됐나. 다 지난 일이라고 들어도 실감이 안 나. 아주 속이 뒤집히는군. 내가 북궁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물어도 되나?”

나는 그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했고, 그가 가장 외로울 때 옆에 있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무릎께를 움켜쥐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륜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뭐, 한 십 년은 처박혔던 건가? 얼마나 머물렀냐니까 대뜸 죄송하다니. 내가 그렇게 오래 허송세월하나?”

“아닙니다. 폐하께선 조금도 허송세월하지 않으셨습니다. 북궁에서도 앞날을 준비하셨고, 단 한 번도 마음이 꺾인 적은 없으십니다.”

“그럼 왜.”

“제가 죄송한 것은 당신이 진정 필요로 했을 때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어리고 힘없는 정인이라 당신이 아플 때 함께 아파하지 못하였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 정수리로 무륜의 지긋한 시선이 와 닿았다.

“그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약한 어린애라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무지하기도 했지만, 당신에 대해 알았어도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알았다고 한들 네가 뭘 할 수 있었겠냐는 여율령의 오랜 물음과 마음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았겠냐는 치기 어린 오랜 대답이 뇌리에 떠올랐다.

뺨이 홧홧할 만큼 부끄러웠다. 세상엔 물리적인 것이 없고서야 마음도 구할 수 없음을, 험준한 황궁 생활을 겪고서야 알게 됐다. 그래서 결국 어찌 되었던가. 외톨이라 아팠던 당신을 또 외톨이로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이다.

울적해진 내 뺨에 그가 손을 얹었다.

“신기하지.”

“……네?”

“내가 누굴 이렇게 위로할 성격은 아닌데. 얼른 달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야.”

“폐하.”

“이것도 그래. 몽휼의 말도 그렇고, 보이는 상황도 그렇고. 내가 정말 황제가 되긴 된 것 같은데 네가 나를 그리 부르면 어찌 심통이 날까.”

황제더러 폐하라고 부르는데 심통이 날 일이 뭐…… 잠깐. 설마.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한 확신을 품고 그를 다시 불렀다.

“무륜?”

그가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훨씬 낫구나.”

* * *

설원에 도착하고 난 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무륜은 쑥쑥 성장해 벌써 내 키를 넘겼다. 옷이며 담요며 이것저것 챙겨 와 다행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를 힐긋 보았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대충 스물 몇쯤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보다 커진 그가 아쉽다면 너무 파렴치한 것일까.

울적해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웠다. 나는 매번 후회만 하는구나. 백호가 되어서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아 스스로가 한심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생각 당장 그만두어라.”

이런 건 또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내 정인 덕에 자책도 할 수 없었다.

“그보다 아까 하다 만 이야기나 해보아. 여율령의 저택에서 어찌 지냈다고?”

“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이것 하나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심장께가 간질간질해 결국 나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아주 잘 지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무륜의 나이가 스물넷을 지났다. 나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엔 담담했다. 그러곤 오래지 않아 몸이 한차례 덜걱 하며 눈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몰염치한 손이 내 가슴팍으로 쑥 들어왔다.

“폐하!”

“어허. 가만히. 네 나이가 지금 스물다섯? 여섯이던가? 아무튼 네가 나보다 연상인데 어찌 이 기회를 놓칠쏘냐.”

“…….”

“형님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어린 무륜을 보고 설렜던 과거의 나를 매우 치고 싶었다.

“안 됩니다.”

“왜요?”

내 어깨 위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데, 하마터면 이상한 소리를 낼 뻔했다.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요.”

무륜이 큰 소리로 웃었다.

“세월이 지나긴 지났구나. 네가 그런 농을 다 하고.”

뻣뻣하게 굳은 내게서 손을 거둔 그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등 배길까 넉넉하게 챙겨 온 모포가 풀썩였다. 배부른 짐승처럼 엎드린 무륜이 제 옆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버텨봤자 의미 없음을 경험으로 알았다. 순순히 그 옆에 눕자 무륜이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듣자니 분명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듯한데 너는 어째 변한 게 없구나.”

“…….”

그것에 깊고도 복잡한 사정이 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그의 웃음이 짙어졌다.

지금의 무륜은 딱 스물넷이었다. 북궁에서 나를 만나고 좀 더 지나서…… 아마 수련제를 함께 보낸 후겠지. 내내 가시처럼 남아 있던 음울함이 씻은 듯 사라지고, 청명한 눈에 신기함과 기꺼움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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