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3화
대강의 사정을 들은 진해는 무륜을 살피더니 옥패 조각을 하나 챙기며 말했다. 일단 위금성주의 사저로 돌아가자고. 뭔가 큰일이 난 반응은 아니라 일단 안심했다.
무륜을 안아 들고 돌아와 침상에 눕히자 진해가 본격적으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진해는 신기함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에 겨우 진정한 심장이 널을 뛰었다. 반만년을 넘게 산 흑룡이 신기해할 만큼 드문 일이라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희소식이었다.
“딱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반나절이면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여기서부턴 추측입니다만, 옥패의 수명을 그에게 주고 싶다는 당신의 생각이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모든 영물은 당신의 권속 아닙니까.”
“아…….”
“당신의 바람으로 인해 옥패의 수명이 그에게 전해졌지만 아마 완벽하게 안착하진 못할 겁니다.”
“어째서요?”
“수명의 주인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스윽. 그가 소맷자락에서 옥패 조각을 꺼냈다. 신비롭고 은은한 빛을 발하던 것이 이젠 깨지고 탁해져 길거리의 돌멩이만도 못한 모습이었다.
“이 ‘수명의 옥패’를 만든 때까치 영물도 아니고, 그 영물이 수명을 주려 한 정인도 아니니, 온전히 스며들 수 없는 거지요. 그 정도 제약이 아니면 쓸 수 없을 정도의 금기입니다, 이건.”
“…….”
결국 안 되는 거였구나. 괜찮다니 다행이지만 나 때문에 괜히 무륜만 고생하게 되었다. 시무룩해지자 진해가 덧붙여 말했다.
“뭐, 완벽하게 안 된다는 뜻이지 아주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 그 말씀은?!”
“수명이 늘긴 늘 겁니다. 얼마나 늘어나게 될지는 살아봐야 알겠지만요. 신수 기준으로는 역시 별 차이 없겠지만, 인간 기준이라면 적어도 몇 세대는 더 살지 않을까요?”
자리에 있던 모두의 턱이 떨어져 내렸다. 본래 인간이었던지라 나도 신수 기준보단 인간 기준이 더 와 닿았다.
몇 세대라니! 상기된 낯으로 기뻐하다 멈칫했다. 나야 무륜이 오래 살면 마냥 좋지만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른다. 순리가 아니라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슬쩍 면면을 돌아봤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 심경은 복잡해 보였지만 다들 기연이라 생각하고 좋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긴 모시는 주군이 장수한다는데 충신이라면 싫어할 리 없겠지.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지금 보고 겪은 것은 결코 발설하지 않도록 하고 나중에 무륜에게만 따로 보고하는 것까지. 순식간에 정리가 끝났다.
몽휼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폐하께서 엄청나게 기뻐하시겠군요. 일이 좀 한가해진 후라면 한 며칠 광실에서 두문불출하셔도 그런가 보다 해드릴-”
“그만.”
이 새끼는 점점 못 하는 소리가 없다. 눈을 흘기는데 위중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보다 문제는 당장이다. 고작 반나절이긴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일단 어떻게 해서든 폐하를 숨겨야 한다.”
몽휼이 동조했다.
“말은 어디서 새어 나갈지 모르니 말이지.”
겨우 끝난 전쟁이다. 고작 반나절이고 무륜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해결될 일이긴 하나, 문제는 적을수록 좋았다. 몽휼이 한숨처럼 이어 말했다.
“그럼, 호위와 함께 몸을 피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적격자는…… 역시 백호님이겠군요.”
이윽고 그의 눈에 설마 일부러는 아니었겠지? 하는 의심이 가득했다. 나는 사고였다고 당당히 말했다. 진실이라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증언하자 몽휼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 *
“으…….”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무륜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눈을 몇 번 깜박인 그가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곤 기겁을 하여 몸을 벌떡 일으켰다.
구르듯 침상을 벗어난 그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누가 봐도 검을 뽑으려는 모양새였다. 그의 낯은 창백한 긴장으로 얼룩져 있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무륜의 반응에 당황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황망한 몽휼의 부름에 그제야 무륜이 멈칫했다.
“……몽휼?”
“예. 접니다.”
“왜 갑자기 늙었지?”
“……예?”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짧은 대화를 복기한 후 하얗게 질렸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한 듯 비슷한 표정으로 눈짓을 교환했다. 가장 먼저 위중혁이 나섰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금군대장 위중혁.”
무륜이 즉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금군대장을 지칭한 게 아닌, 선황의 금군대장을 부른 것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저와 여기 혁중…… 위중혁 외에 달리 아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없군.”
“그럼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는 기억나십니까.”
“폐하의 명을 받고 병부에 들어 국경지로 발령이 난 것까진 기억난다.”
몽휼의 낯이 처음으로 굳었다. 딱딱한 표정이 꽤 심각했다.
“열다섯 살 무렵의 일이군요.”
열다섯. 여율령이 주는 과제를 하나씩 해나가며 무륜에 대한 것을 얻어 들었을 때, 가장 귀에 박혔던 그의 나이였다. 여동생을 잃고 황상에게 반항하다 병부의 개로 전락한 나이.
“말이 이상하군.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라, 몽휼.”
아주 긴 설명이 이어졌다. 흑룡과 백호의 존재에 놀란 것도 잠시뿐. 무륜은 처음엔 믿지 못하고 날뛰며 화를 내었다. 미숙하고 감정적인 모습이었다. 그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찌 끼어들 수가 없어 가만히 있는데 씩씩거리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무륜이 처음으로 당황을 내비쳤다. 지긋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믿을 수밖에 없군. 아니면 이렇게 다 늙어버린 너나 금군대장을 무어라 설명할까.”
“……아직 창창한 30대입니다만.”
표정에 금이 간 몽휼을 무시한 채 무륜이 제 할 말만 했다.
“무엇보다 저자. 아, 아니, 저분.”
머뭇거린 손끝이 나를 향했다.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내가 생긋 웃자 무륜이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분명 처음 보는 낯인데 묘하게 익숙하다.”
“익숙하다니. 어떻게 익숙하십니까.”
몽휼이 물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하는 말이라는 걸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무륜만 빼고.
“그게, 사실은 그냥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이상하게 심이 조여드는 것 같…….”
말끝을 늘인 무륜의 귓불과 뺨이 아주 새빨갰다. 생략된 뜻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허둥거리는 그가 미치게 사랑스러웠다. 내 임은 이런 상황에서까지 내 심장을 흔드시는구나. 가슴께가 아릿하면서도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활짝 웃었다.
무륜의 턱이 툭 떨어졌다. 그가 어물어물하더니 슬그머니 몽휼의 옆에 붙어 섰다.
낯가린다. 낯가려! 나름 심각한 상황인데 도저히 심각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헤실헤실하며 웃자 무륜이 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 기억이 났다. 병부에서 한참 구르다가 검문소에 한동안 머물렀지. 거기서, 그래. 자개함에서…….”
그 순간, 무륜의 몸이 아주 조금 자라났다. 집중해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미세한 변화였다. 하지만 모두 보통을 벗어난 눈들을 가진지라 알아차리지 못한 이가 없었다.
“호오. 한 번에 돌아오는 게 아니라 반나절 동안 이렇게 서서히 성장하며 기억도 함께 돌아오는 것 같군.”
진해가 재차 신기한 걸 보듯 흠, 흠, 무륜을 관찰했다. 위중혁이 그런 진해를 흘겼다. 위대한 흑룡이시라 차마 몽휼에게 하듯 뭐라 하지 못하는 게 통탄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몽휼은 사뭇 간절하게 위중혁을 봤다. 제발 좀 그냥 넘어가자.
무륜은 주변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는 듯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그 순간, 무륜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하얀 먹이 번진 듯 문드러졌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이내 북궁으로 변했다. 봄에도 찬 기운만이 가득했던, 오직 유폐를 위한 냉궁. 술 냄새와 함께 머리를 풀어 헤친 무륜이 문가에 서 있었다.
어린 시절, 헤어지고 나서 5년 만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지. 그 순간이 눈에 선해 말을 꺼낼라치면 무륜은 질색하고 싫어했다. 이유를 묻자 나를 밀어내는 저 자신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혹 내가 그때 물러났다면 그 뒤는 어떠했을까 생각도 하기 싫다고.
‘너는 내가 아닌 다른 황제를 섬기는 여씨 가문 출신 위사장이 되었겠고, 나는 지한국에 망명하여 후회만 가득한 여생을 보냈겠지.’
무엇보다 나와 연이 끊겼을 것이라는 게 가장 끔찍하다, 진저리를 쳤다. 나는 절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라 단언했다. 당신이 나를 받아줄 때까지 백년이고 천년이고 들이댔을 것이라고.
‘애초에 폐하가 아니었으면 제가 위사장이 되었겠습니까?’
눈을 크게 뜬 무륜을 향해 나는 확언했다.
‘당신이 이름 높은 무인이었다면 저는 명도(名刀)를 만드는 대장장이가 되었을 것이고, 당신이 문에 뜻이 있는 서생이었다면 붓과 화선지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겠지요.’
‘…….’
‘무륜. 당신이 황제였기에 저는 위사장이 된 것입니다.’
“예. 이렇게 컸습니다!”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려 보이자 어린 무륜은 넋이 나갔다. 홀린 것처럼 몽휼에게서 떨어져 내게 다가오다 다시 핫,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몽휼은 그런 무륜을 짜게 식은 눈으로 보다 한숨지었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 하고픈 잔소리는 산더미 같지만 일단 삼가겠습니다. 이화 님, 반나절 동안 폐하를 부탁드립니다.”
종전 직후, 한창 혼란한 시기. 간자는 어디에라도 있는 법.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은 하나라도 줄이는 편이 좋았다.
“최선을 다하지.”
확답을 들은 몽휼이 퀭한 눈으로 자리를 떴다. 쌓인 일거리가 너무 많다고. 괜찮으신 걸 알았으니 뒤는 부탁한다고. 그리고 옆에 있던 진해와 위중혁을 데려갔다. 지금은 용과 투구벌레의 손까지 빌려야 할 정도라고 중얼거리면서.
……옥석제로 인해 늘어난 문부 때문인 것 같았다. 속으로만 응원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