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2화
“옥석제의 밤에는 성도 중앙에 대나무를 세워 사람들이 소원을 적은 옥패를 매달 수 있게 하고, 봄에 위금강이 녹으면 그 대나무를 통째로 띄워 보냅니다.”
“강에? 가라앉지 않나?”
“보통은 가라앉아야 하지만 대나무는 그대로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가죠. 위금에서 신비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옥동이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은 처음 봤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반짝이는 애정 어린 시선. 낯설고 무서운 경외의 존재가 아닌, 친근하고 든든한 아군을 보는 눈이었다.
“실은 이를 꼭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위금의 수호신은 때까치 영물이고, 모든 영물은 백호님의 권속이니까요.”
옥동이 활짝 웃었다.
‘신성지에 쉬이 발 들이게 해준다 했더니 저런 뜻이 있었구나.’
문득 옥석제를 준비하던 위금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면면에 웃음이 가득했고, 옥의 풍요에 감사했으며, 빈민과 아픈 자를 구휼한 때까치의 뜻을 숭고하다 여겼다. 옥동 또한 그랬다. 그는 자식 자랑을 하는 부모처럼 내게 때까치의 흔적을 보이고 있었다.
“멋지구나.”
“그렇지요?”
어깨를 펴는 옥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륜은 그런 내 뒤편에서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몇 번을 안겨도 안락한 품이다. 온갖 꽃이 만발한 5월의 너른 초원에 누워도 이보다 따뜻하고 향기롭진 않을 것이다.
민망하다면 민망한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속으로만 하니 상관없지 않나. 그러면서도 뺨이 조금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른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지금 무슨 생각을 했느냐.”
“아무 생각도 아니 하-”
헉, 하고 입을 다물었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거짓을 입에 담고 말았다.
그리 큰 것이 아니었음에도, 중간에 그만두었음에도 심장이 쥐어뜯기 듯 엄청난 통증이 닥쳤다. 휘청. 무릎이 꺾이며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화야!”
겪은 것이 많은 무륜이 기함하여 나를 보듬어 안았다.
“이화야. 괜찮으냐. 이화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다고 하려 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끝이 하얗게 변하도록 그의 옷자락을 쥘 뿐이었다. 찌직. 힘을 못 이긴 천이 찢어지고, 무륜이 옥동을 향해 소리쳤다.
“옥동아, 가서 진해 님 좀 모셔와라!”
나이가 어려도 성주는 성주. 해서 꼬박꼬박 ‘위금성주’라 불렀던 무륜이었거늘. 급박한 그의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져 안타깝고 미안했다.
“예…… 예!”
옥동이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 나간 후에야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전신을 바늘로 찌르는 격통이 잦아들고, 섬돌 밑에 짓눌리던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길게 숨을 한 번 내쉬고 무륜을 올려다봤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내가 괜찮다는 사실일 테니까.
그가 앓는 소리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민망하고 미안해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외려 꽉 끌어안으며 그대로 있게 했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진해 님 오실 때까지 이렇게 있어. 그분 입으로 괜찮다는 말 듣기 전까진 절대 못 움직인다.”
무륜은 내가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도 괜찮다 말했던 걸 기억했다. 내가 인간에 가까워져 ‘교묘한 말’ 정도는 쓸 수 있다는 것도. 지은 죄가 많은지라 결국 얌전히 안겼다. 무륜이 그런 내 어깻죽지에 얼굴을 묻었다.
“너 때문에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내가 죽으면 사인은 심장 때문일 것이야.”
“죄송합니다.”
미안함에 웃자, 웃지 말라 타박하면서도 끌어안은 내 몸은 놓지 않았다. 아직 절박함이 남은 그의 손등에 내 손을 얹었다.
“당신 품이 5월 꽃밭보다 포근하고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연한 생각을 했으면서 그걸 못 말해가지고.”
입이 삐쭉 나온 무륜이 재차 타박했다. 이번엔 크게 웃었다. 담담한 어조에 진심이 가득했다.
“예. 그렇네요. 당연한 생각이었죠.”
“다음부턴 그냥 솔직하게 말해라.”
“그리하겠습니다.”
순순히 대답했음에도 무륜은 혀를 찼다. 고작 그런 것을 감추다 내가 아팠던 것이 못내 속이 상한다는 기색이었다.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진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잘생긴 얼굴로 주름이라니요. 좋지 않습니다.”
“잘난 얼굴은 뭘 해도 잘났다.”
그건 그렇다. 나는 무륜의 잘난 얼굴을 새삼스레 들여다봤다.
처음 만났을 땐 거대한 태산 같고 완전한 어른 같았는데, 지금 와 돌이켜 보니 확실히 앳된 티가 났다.
그다음 북궁에서 다시 만났을 땐 덩치도 커지고 성숙미가 있어 ‘아, 저번엔 정말 나와 같이 어리셨구나. 하지만 이젠 진짜 어른이구나’ 했다. 그리고 잠깐 넋을 잃었다. 여전히도 잘난 얼굴이었고, 풀어 헤친 긴 머리가 융단 같았으며, 초췌하고 나른하여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켜서.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그 무렵의 그는 처연해서 더욱 아름다웠다.
그리고 지금은 농익은 성숙미가 보였다. 세월의 묵직함에 진중함과 여유가 더해져 그야말로 진짜 어른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로 밤에 몽둥이를 휘둘러 대시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도…… 흠! 억지로 생각을 끊는데, 무륜은 그마저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지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엄청나게 묻고 싶은데.”
“대답 못 하니 묻지 마십시오.”
애써 외면했다. 아마 뺨이 붉을 것이다. 그가 끈질긴 시선을 던졌다. 하나 가슴 움켜쥐고 쓰러졌던 직후라 그런지 정말로 묻진 못했다.
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에 정말로 무륜이 옛날과 다른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성숙했다. 예전이었으면 나를 품에 안아 어르고 달래어 기어이 원하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아니, 밤에 하는 짓을 보면 그렇게까지 성장하진 못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쓸데없는 생각.’
아무튼, 주목할 건 그에게서 시간이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또한 그의 시간과 내 시간이 다르다는 걸 은연중에 신경 쓰고 있는 탓이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완전히 지울 수 있다면 그는 선계가 아니라 신계에는 올라야 가능한 일이다.
“이화? 왜 그러지. 속이 아직도 좋지 않나?”
“…….”
욕망은 아차 하는 사이 열망이 됐다.
‘무륜과 더 오래, 함께 살고 싶다.’
‘할 수 있다면 내 수명을 주고 싶다.’
나는 사월린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정인에게 제 수명을 나눠 주고자 한 때까치의 심정 또한 완벽하게 이해했다.
“속은, 괜찮습니다.”
“하면.”
“……당신이 없을 날이 두려워 그럽니다.”
멈칫한 무륜이 달래듯 내 몸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런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어 살짝 밀어냈다. 무륜은 차마 강제하지 못했다.
“이화야.”
“압니다. 그냥 지금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걸요. 당신과 함께 있는 모든 순간순간이 얼마나 굉장한 순간인지 잘 압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울 수 없다. 당신이 곁에 없는 날. 언제라고 할 수 없어도 반드시 올 어느 날을 아니까.
손을 위로 올려 무륜의 어깨를 짚었다. 서서히 상체를 움직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격정을 품었다. 서로의 입김이 섞이고, 무륜의 손이 옷 속을 파고들어 왔다.
“윽.”
찬 손이 맨살에 닿아 어깨를 움츠리자 무륜은 손을 빼는 대신 내 겨드랑이께로 더 바짝 밀어 넣었다.
“곧 따뜻해진다.”
“……보통은 미안하다고 빼지 않습니까.”
“오냐. 이제 슬슬 체온이 비슷해지는구나.”
“아니. 저는 빼시라- 읍.”
무륜은 내 말을 흘려들으며 입맞춤을 이어갔다. 그 안에서 미처 다 흘려내지 못한 불안이 엿보임에 다시 밀어낼 수도 없었다.
흐릿한 시야 한구석으로 대나무가 들어왔다. 범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지는 푸른 대엔 생의 조각이 무수히 달려 있었다. 그 하나하나에서 맑고 강한 기운이 일렁이며, 바람 한 점 없는 동굴 안인데도 옥패가 풍경처럼 흔들렸다.
수명이란 써야 줄어드는 것. 봉인된 수명은 조금도 빛바래지 않고 마모되지도 않았다. 그걸 보자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 옥패의 수명. 무륜에게 줄 순 없을까.’
바로 그 직후였다.
차자자작. 짤랑짤랑짤랑.
대나무 잎사귀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거기 걸린 옥패들도 덩달아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우린 동시에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무륜이 전투태세에 들어가고, 나는 본능에 따라 호랑이로 분해 무륜의 앞에 섰다. 적의는 없으나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폐하, 조금 더 뒤로 물러 나십-”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흔들림이 뚝 멎으며 위로 솟구친 수십 개의 옥패가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적의는 없다. 살의도 없다. 하지만 겉보기엔 단순한 기물인 저것들이 적의와 살의 없이 움직이는 것들이라면?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두고 이번에도 본능에 따랐다. 발로 바닥을 내리찍자 동굴 바닥이 솟구치며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옥패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새 떼처럼 양옆으로 휘었다.
“무륜!”
뒤돌아 앞발을 휘둘렀다. 무륜 또한 검을 뽑아 횡으로 그었다. 대부분의 옥패가 부서지며 하얀빛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눈을 찌푸렸다. 어두운 편이던 동굴 안에 강한 빛이 퍼지자 순간적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으윽.”
멀쩡한 귀로 무륜의 신음이 들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입니까. 설마 어디 다쳤습니까!”
허둥거리며 거대한 몸을 움직여 웅크린 무륜을 감쌌다. 틈 하나 없이 품에 안아도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무륜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폐하! 무륜!”
옥패는 다 부서졌는지 더 날아오는 게 없었다. 허둥지둥 끌어안은 무륜을 살폈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했다.
“…….”
그는 정신을 잃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옷은 분명 무륜이었으나 무륜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무륜이 맞긴 했다. 다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은 몸. 짧은 팔다리. 앳된 얼굴. 품 안에 있는 건 어린아이가 된 무륜이었다.
“폐하! 이화 님! 진해 님을 모셔왔습-”
때마침 도착한 옥동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공동으로 들어선 그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릅떴다. 장승이 되어버린 옥동의 뒤편에서 진해가 걸어 나왔다.
“어찌 된 것이 바람 잘 날이 없습니까, 당신은.”
그가 무륜과 나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