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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1화 (111/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1화

“늦게 온 놈은 따로 앉지? 민폐다.”

무륜이 눈치를 줬다.

“사람이 이렇게 넘쳐나는데 혼자 와서 따로 자리를 잡으면 그거야말로 민폐 아닙니까.”

위중혁이 무륜의 꼽을 튕겨냈다. 몽휼이 곧바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화 님은 역시 다 같이 앉는 편이 좋지요?”

“그야…… 그렇지?”

무륜의 눈치를 보며 긍정했다. 사실 위중혁에겐 물어볼 게 있었다. 멀리 떨어져 앉으면 곤란하다. 그간 무륜의 방해로 만나지 못했던 위중혁이다. 정히 만나지 말라면 납득할 때까지 안 봐도 괜찮으나 지금의 내겐 위중혁을 꼭 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내 말에 위중혁이 엉덩이를 꿈질거리며 꽉 찬 평상을 비집고 앉았고, 무륜은 불만스레 내 손을 조물락거렸다.

“당하. 혹시 흑월 보셨습니까.”

무륜과 몽휼에게 물었을 땐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금군과 밀영군들의 대답도 같았다. 그래, 다들 모르는구나 할 수도 있지만 영 찜찜했다. 그래서 위중혁에게 물었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하든, 답이 나올 것이다.

“못, 보았습, 니다.”

“…….”

덤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위중혁은 거짓말을 못했다.

‘아는구나.’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며 흑월의 거취를 물으려던 찰나, 무륜과 몽휼이 동시에 끼어들었다.

“이화야, 일단 먹고 말하렴. 수육 식는다.”

“혁중아, 수육 처먹어라.”

“말 안 해도 먹을 거다. 왜 또 시비냐.”

“시비 건다는 건 알면서 왜 시비 걸리는지 모르니 네 눈치 없단 말을 듣는 것이다.”

눈썹을 꿈틀한 위중혁의 손이 검 손잡이에 얹어졌다. 몽휼은 코웃음을 치며 위중혁의 입에 수육을 쑤셔 넣었다. 나는 그대로 수육을 퉤 뱉고 검을 뽑아 들 위중혁을 예상하며 바로 말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위중혁은 불만스러운 낯으로도 수육을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이것도 먹어라.”

위중혁은 몽휼이 주는 대로 잘 챙겨 먹었다. 뒤늦게 위중혁을 저리 챙겨 주는 몽휼도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정확히 뭐가 어떻게 이상한지 꼭 집어 말하긴 어려웠다.

‘어쨌든 말해줄 낌새는 아니구나.’

속으로만 한숨을 쉬며 흑월에 대한 건 일단 미뤄뒀다. 흑월부터가 제 모습을 감추려 하는데 부득불 캐는 것도 도리가 아니긴 했다. 왜 나를 멀리하는지 짐작이 가는 바라 더욱 그랬다. 그에게 꿰뚫린 자리는 멀끔히 나았지만 흑월은 내 상처를 그리 깨끗하게 잊지 못할 것이다.

옥동은 호위가 찢어 준 수육을 욤욤 받아먹으며 뒷이야기를 마저 했다.

“때까치는 그렇게 제 수명을 정인에게 주려 했지만, 정인은 그를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백 년이 못 되는 짧은 생을 살다 죽었지요.”

옥동과 호위를 제외한 모든 이의 수저가 멈칫했다. 반사적으로 무륜을 봤다. 몽휼과 위중혁의 시선도 그를 향했다.

“그렇구나.”

흐릿하게 웃은 무륜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나는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침묵했다. 위중혁이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물었다.

“남겨진 때까치는 어찌 되었습니까.”

기겁한 몽휼이 옥동을 향해 필사의 염화미소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번에도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때까치는 그 인간의 모습으로 분했습니다.”

몽휼의 입이 벌어졌다. 놀랍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놀람도 금세 잊고 귀를 기울였다.

“빈민을 구제하고 병자를 치료하며 평생 선인과 같은 삶을 살다 죽었죠. 그리고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 당부했습니다.”

“…….”

“그 선인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것을 기리며, 풍요로운 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가 죽은 날에 크게 베풀기 시작한 것이 옥석제의 정확한 기원입니다.”

* * *

나는 한 번 죽어 신수가 됐다. 그에 비해 무륜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다.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독히도 길었던 겨울날에 비해 다시 만난 날이 심히 짧아, 그저 하루하루가 애틋하고 아까웠으니까.

옆에 있는 서로에게만 집중해도 부족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앞서 슬퍼할 필요 없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래서 때까치 영물에 대한 건 그저 그랬구나, 싶은 이야기로 남겨 뒀다.

무륜의 품에 폭삭 안겼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익숙한 내음이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너른 공터에는 이야기꾼이 자리를 잡았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위중혁은 순찰 돌던 금군에게 발견돼 우릴 두고 어디 농땡이시냐, 대장님이 모범이 되셔야지 뭐 하시냐, 잡혀 갔다. 그 후 문관들이 사람을 보내 몽휼을 찾았다. 급한 일인지 이야기를 들은 몽휼은 고민하다 옥동에게 우리 폐하 좀 잘 감시…… 아니, 잘 부탁한다며 사저로 돌아갔다.

사람이 많아지자 옥동의 호위무사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결과적으로 남은 건 무륜과 나, 옥동. 이렇게 셋이었다. 무륜은 신색이 폈다. 잠깐 사그라들었던 ‘단둘의 야망’이 다시 피어오름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야 때까치는 동굴에 제 수명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는데-!”

이야기꾼의 목소리에 맞춰 앉은 사람이 북을 두드렸다.

‘수명을 저장하는 능력이라.’

솔직히 부러웠다. 내게 같은 능력이 있고, 무륜에게 수명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할까.

‘음…….’

고민은 할 것이나, 아마 결국 받아들이리라.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때까치의 정인이 수명을 거부했다면, 때까치가 옥석에 담아 저장해 둔 수명은 어떻게 되었지?’

“저 동굴은 진짜 있는 동굴일까요.”

무륜에게 속삭였다. 그가 왜, 하고 되물었다. 그에 답하려는데 옥동이 치고 들어왔다.

“당연히 진짜 있는 동굴이죠. 장소는 위금성주의 직계밖에 알지 못하지만요.”

……응?

“궁금하시면 가보실래요? 마침 근처인데.”

으응?

동굴은 성내의 후미진 곳에 있었다.

‘이런 곳에 정말 동굴이 있다고?’

의아할 정도로 외진 골목. 입구는 판자로 가려져 있었고 위엔 금줄이 쳐졌다.

“사람이 여럿 죽었다, 악귀를 봉해 놨다. 불길한 소문 몇 점이면 사람들은 얼씬도 않습니다.”

“가끔 치기 어린 놈들도 있었을 텐데.”

“그분들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죠.”

주변을 둘러봤다. 몸을 감춘 무사의 인기척이 여럿 느껴졌다. 나는 옥동의 해결이 물리적인 해결임을 알아차렸다.

“이쪽으로.”

판자를 치우자 의외로 넓은 입구가 드러났다. 사다리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형식이었다.

“안은 어두울 텐데. 횃불은 없어도 되나?”

“네. 들어와 보시면 아십니다.”

옥동은 신이 난 기색이었다. 앉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엉덩이가 들썩거렸으리라. 호위무사는 이곳은 신성지라 저는 발 들일 수 없으니, 도련님을 잘 부탁한다 고개를 숙였다. 나는 염려 말라 고개를 끄덕였다.

안은 생각보다 더 넓었다. 벽면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돌 같은 게 박혀 안을 밝혔는데, 가까이서 보자 전부 옥석이었다. 손을 들어 표면을 만져봤다. 희미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놀랍군. 내력이 느껴지긴 하지만 내력으로 만든 빛은 아닌 듯한데.”

“그 또한 때까치 영물이 만든 것이니, 아마 빛을 거두어다 옥석에 저장하지 않았을까요?”

추측이지만 그럴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옥동의 뒤를 가벼운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무륜이 내 손을 휘감듯 잡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네. 꽤 흥미롭습니다.”

“그건 네가 백호라서 그런 건가?”

남이 물었으면 무슨 의도로 저런 질문을 하나 했을 테지만 상대는 무륜이다. 물음에는 어떠한 의도도 담기지 않았다.

물론 무륜은 말에 의도를 심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내 앞에선 복잡한 생각이나 계산 따위 조금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부딪혀온다. 그것이 어찌 그리 기껍던지.

무륜이 별생각 없이 하는 말과 행동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나면, 내가 별생각 없이 한 말과 행동에 그 또한 흔들린다는 걸 떠올린다.

슬쩍 맞잡아온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아니요. 아마 백호가 아니었어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건 제법 좋아합니다.”

“하긴. 넌 민답집을 즐겨 읽었지.”

“예. 처음엔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빠져들었죠. 나중에 자련궁의 정자에 누워 나른하게 뒹굴며 민답집을 같이 읽는 날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는 ‘돌아가면 할 일 목록’에 들어가는 것이냐?”

돌아가면 할 일 목록. 그는 무륜과 잡담하다 우연히 나온 화제였다. 진해의 보살핌을 받으며 한창 드러누워 있을 때, 가슴팍의 상처를 보는 낌새가 이상하던 흑월이 모습을 감춘 직후였다.

‘우리, 만난 날이 짧았으나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그래. 하지만 고난과 역경과 방해가 어찌 그리 많던지. 정작 하고픈 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셨습니까? 하면, 이제 봄날이 왔으니 그때 못한 건 다 해봅시다.’

‘……정말 다해도 되느냐?’

‘……대체 뭘 하시려고요.’

아무튼 그런 대화의 끝에 서책이 하나 생겼다. 가지고 다녀야 하니 붓과 먹이 아닌 목탄으로 내용을 적은 작은 서책.

무륜이 하고 싶은 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음에도 서책의 뒷장을 찾게 되는 것이 많았다.

그에 비해 내가 적은 것들은 꽤 소소하면서도 정말 소소한가 싶은 게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무륜과 처음 만나 지냈던 국경 검문소의 그 방에서 다시 열흘을 함께 보내는 것이 있었다. 그를 읽은 무륜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예. 돌아가면 할 일 목록에 적을 겁니다.”

“하면 다음 건 내 차례구나.”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적기로 하여 이번이 내 차례였으니 다음은 무륜이다. 머릿속으로 그가 적은 온갖 장소와 난잡한 행위가 스쳐 지나갔다. 거기서 더 할 게 남아 있었다니. 초조함에 마른침을 삼켰을 때, 훌쩍 앞서가던 옥동이 걸음을 멈췄다.

“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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