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0화
“옥석제?”
“예. 이 근방 사람들은 다 아는 오래된 전통 행사라고 합니다.”
“내용을 들어보니 축제보단 잔치에 가깝던데, 참으로 좋은 기회이지 않습니까.”
“가축을 잡고 식량을 풀어 우리 사람들은 다독이고 패배한 적들과 남방의 방관자들에겐 이쪽의 여유를 보여줄 수 있겠군요. 확실히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나는 보았다. 무륜의 눈이 명분과 실리를 찾아 번득이는 걸. 실로 놀기 딱 좋은 핑곗거리긴 했다. 심지어 지금 자리엔 몽휼도 없다.
무륜이 근엄한 낯으로 말했다.
“그럼 위금성주와 논의해 옥석제를 준비하도록 하지. 당일엔 민심을 살필 겸 잠행을 나가도록 하겠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위사장의 머리로는 황제가 지금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마땅함을 알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음은 위사장이 아니라 무륜의 정인이라, 나 역시 그가 하고픈 걸 다 하게 해주고 싶었다.
신하들이 오오, 일제히 감탄했다.
“역시 백호의 인정을 받은 분은 다르십니다.”
“맞습니다. 역사에 다시없을 성군이십니다.”
무륜의 시커먼 속은 모른 채 그저 경외의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그들을 모른 척했다. 딱 이번만 머리에 달린 눈을 감고 마음이 따르는 대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완벽해 보였던 무륜의 계획은 비슷한 잠행복을 입은 몽휼의 등장으로 초장부터 엇나갔다. 몽휼이 피곤한 기색으로 읍했다.
“아무리 잠행이라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잖습니까. 백호님이 붙는다 하더라도 호위 하나 없이 가실 순 없으십니다.”
무륜이 눈으로만 욕했다.
“아주 지긋지긋하다. 이제 너나 나나 좀 떨어질 때도 되지 않았누?”
이미 볼 장 다 본 몽휼은 까닥하지 않았다.
“저라고 뭐 오고 싶어 온 줄 아십니까. 노신들이 폐하께서 잘못될까 심장이 두근두근하여 오래 못 살겠다고 제 바짓가랑이를 잡는데, 그럼 어쩝니까.”
아무리 무륜이라도 금성에서 예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온 충신들의 마음을 두고 험한 소리는 할 수 없는 일. 그는 이를 아득아득 갈며 몽휼의 합류를 받아들였다.
“거기 잘 잡아!”
“이건 어디로 옮겨?”
위금성은 완전히 들뜬 분위기였다. 협정서가 오갔으니 사실상 종전이다. 내도록 수세에 몰렸던 판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완전히 뒤집혔다. 위금성 사람들과 패퇴를 거듭했던 병사들의 마음에 이른 봄이 찾아왔다.
그 가운데 누가 먼저 ‘옥석제’에 대한 말을 꺼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위금의 토박이였을 것이다. 세상엔 듣는 것만으로도 그리움과 기쁨에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말들이 있다. 위금성 사람들에겐 옥석제가 그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위금에선 상질의 옥석이 많이 났다. 옥이 날 만한 땅이 아님에도 그러했다. 위금강 강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는 아이들은 저녁이면 옷자락에 깨진 옥 조각을 가득 담아 돌아오곤 했다.
옥과 함께 자란 위금성의 사람들은 옥에 대한 추억이 많았고, 온 제국을 들썩이게 하는 수련제나 위난제보다도 옥석제를 더 귀하고 중하게 여겼다.
이 소소한 행사는 많은 이의 마음에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엇?!”
허름한 옷을 입고 동네 아이들과 옥석치기를 하던 옥동이 깜짝 놀라 굳었다. 놀란 건 옥동만이 아니었다. 무륜과 나 또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옥동은 삐거덕거리며 아이들과 인사를 하더니 도다닥 달려왔다.
“엇. 엇흠. 폐하께서도 잠행을 나오셨습니까. 저도 민심이 어떤지 살피고 있던 참입니다.”
그 민심 참 어리기도 하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륜은 한숨을 쉬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래. 꼭 이런 쪽으로는 일이 쉽게 풀린 적이 없었지’라고 살벌하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옥동이 자연스럽게 합류하자 그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호위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륜은 그 호위의 합류까지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아직 나와 단둘이 놀겠다는 원대한 꿈을 포기한 것 같진 않았다. 그의 눈이 살벌하게 번득였다. 늘어난 일행을 어떻게 치울지 고민하는 게 틀림없었다.
실은 나도 그렇다. 까놓고 말해, 무륜과 단둘이 있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하나 그렇다고 그것에만 고심하여 기껏 나온 시간을 낭비하는 건 싫었다. 슬그머니 무륜의 옷자락을 잡고 작게 속삭였다.
“전 이리 같이 저잣거리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폐하는 아니 그러십니까.”
“…….”
한숨을 쉰 무륜이 느른하게 웃었다. 살벌하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무륜이 옥동을 불렀다.
“위금성주.”
“예!”
“옥석제가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겠나. 보고를 듣긴 했지만 문자로 보는 것과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것은 또 다르지.”
옥동의 낯이 활짝 폈다. 나쁜 어른이 분위기 좀 바꿔보려 별생각 없이 꺼낸 말에 착한 아이는 사명감으로 불타올랐다. ……미안하다, 옥동아.
“옥석제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위씨 성을 가진 무사와 금씨 성을 가진 귀한 여인이 서로 만나기 전. 거기서 다시 천태백호가 살아 있고, 사월린이 미치지 않고, 진해 님이 깨어 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앗, 잠시만요.”
조잘조잘 이야기하던 옥동이 단 걸 파는 좌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인에게 옥패를 꺼내 보였다.
주인은 인원수만큼 사탕을 뽑아 건넸다. 과일과 설탕을 졸여 눈 위에 굴려 만든 사탕이었다.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가득 퍼졌다. 무륜은 제 몫을 내게 쥐여줬고, 옥동의 호위는 그냥 들고만 있었다. 몽휼은 사탕을 전투적으로 씹어댔다.
옥동은 한 입 베어 문 것을 다 삼킨 후 설명을 이었다.
“그때의 대륙은 지금의 바다만 하여 끝이 보이지 않고 인간들도 무수히 번성했던 시절이라, 위금도 그 인간들에게 상질의 옥석을 팔아 거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옥석제는 그런 옥의 풍요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베풀었던 일종의 구휼 행사였죠.”
처음엔 성의 빈곤한 이들에게 넘치도록 음식과 옷을 베풀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며 다 같이 즐기는 장이 되었다. 그래서 옥석제는 제(祭)가 붙었으나 축제보단 마을 잔치에 더 가까웠다.
원칙적으로 옥석제의 모든 것은 서로 베풀고 나누어야 했다. 축제처럼 공연도 하고 놀이판도 벌어지지만, 무언가 사고파는 행위는 금지된다. 좌판이나 상점은 물건들을 그냥 나눠 준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장 빈곤해지는 가장 추운 겨울날이 옥석제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전쟁의 화마가 후미진 위금까지 번져 결국 이번 해는 그냥 넘어가나 했는데, 상선의 굽어살핌이신가 봅니다.”
옥동이 진심을 담아 웃었다. 그를 따라 거리를 거닐며 들썩이는 사람들을 봤다. 금군과 위금성 주민이 격 없이 웃으며 함께 옥석제를 즐기고 있었다.
무륜이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이 얼음장이었다.
“폐하? 왜 이리 손이 차십니까.”
작게 속삭이며 무륜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내력을 운용하면 간단할 텐데 참 이상타 하면서. 무륜이 께느른히 웃었다.
“그래야 네가 남들이 본다며 뿌리치지 않고 지금처럼 이리 꼭 잡아줄 테니까.”
……어디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손잡는 정도는 위금성 사람들이 다 봐도 됩니다. 남이 봐선 안 될 것까지 그 앞에서 하려 하시니까…….”
말끝을 흐리자 무륜이 어쭙잖은 난봉꾼 흉내를 냈다.
“그러냐. 하면 어디까지 해도 좋을지 네가 말해보겠느냐?”
손은 어디까지 넣어도 되느냐? 입술은 어디까지 닿아도 괜찮고. 옷은 어디까지 슬쩍슬쩍 벗겨도 모른 척해줄 테냐.
듣고 있기 민망하여 그의 옆구리를 꾹 떠밀었다.
“자꾸 미운 소리 하시면 같이 안 놀아드릴 겁니다.”
무륜이 크게 웃었다. 몽휼은 먼 산을 봤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예 따라왔을까, 실로 후회가 막심해 보였다.
* * *
옥석제의 기원에는 때까치 한 마리가 있다. 그 때까치가 영물이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설화를 들어보면 누구나 ‘그거 영물이었구나’ 하게 된다.
한 인간을 사랑했던 때까치는 그와 자신의 수명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북방의 누군가가 떠오르는 내용이지만 때까치는 사월린과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내 수명을 그에게 주면 되지.’
때까치는 먹이를 나뭇가지에 꽂아 저장하는 습성이 있다. 미물일 적엔 단순한 습성이었던 것이 영물이 되자 미약한 이능이 됐다.
그것은 ‘무언가’를 ‘어딘가’에 저장할 수 있는 힘이었고, 때까치는 제 수명을 옥석에 담아 저장해 두기로 했다. 그가 사랑한 인간에게 때를 봐 건네줄 목적으로.
때까치는 동굴 안쪽에 거대한 대나무를 준비한 후, 깨끗하고 흠 없는 옥석에 자신의 수명을 담아 대나무에 매달았다.
“때까치가 수명을 나무에 걸자 그게 옥석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그는 아닐 겁니다. 위금은 그 시절에 이미 옥석이 많이 나는 땅으로 유명했거든요.”
옥동이 돈 대신 때까치가 새겨진 옥패를 내보였다. 사탕을 받을 때 보인 것과 같은 패였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금전적인 가치는 없는 물건이었지만, 외려 탁한 우윳빛이 오묘하고 은은해 꽤 예뻤다.
노점의 주인은 송곳으로 옥패 아래쪽에 줄을 하나 그었다. 지금 그어진 줄은 모두 두 개. 줄이 다섯 개가 되면 이 옥패는 쓸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자리에서 기다리자 곧 식사가 나왔다. 주인이 가져온 접시 위에는 수육과 삶은 내장이 푸짐하게 쌓여 있었다. 이 좋은 날에도 번을 서는 금군들과 함께 일하다 눈썹을 휘며 은근슬쩍 합류한 위중혁이 몽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고작 사람 한 명 더해졌을 뿐인데 평상이 꽉 찼다. 옥동을 제한다고 해도 그의 호위까지 다들 한 덩치씩 하는 장정이 다섯이나 되는 까닭이다.
“늦게 온 놈은 따로 앉지? 민폐다.”
무륜이 눈치를 줬다.
“사람이 이렇게 넘쳐나는데 혼자 와서 따로 자리를 잡으면 그거야말로 민폐 아닙니까.”
위중혁이 무륜의 꼽을 튕겨냈다. 몽휼이 곧바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화 님은 역시 다 같이 앉는 편이 좋지요?”
“그야…… 그렇지?”
무륜의 눈치를 보며 긍정했다. 사실 위중혁에겐 물어볼 게 있었다. 멀리 떨어져 앉으면 곤란하다. 그간 무륜의 방해로 만나지 못했던 위중혁이다. 정히 만나지 말라면 납득할 때까지 안 봐도 괜찮으나 지금의 내겐 위중혁을 꼭 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내 말에 위중혁이 엉덩이를 꿈질거리며 꽉 찬 평상을 비집고 앉았고, 무륜은 불만스레 내 손을 조몰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