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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9화 (109/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9화

“갔군.”

“네. 갔네요.”

“하면 이제 우리 둘뿐인가.”

단단한 손이 상의 속으로 쑥 들어왔다. 맨가슴을 더듬는 손길이 음흉했다. 당황해서 허둥거리던 찰나, 몽휼이 되돌아왔다. 석상처럼 굳었던 그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폐하, 부디 자중하십시오. 뒷수습부터 귀환 준비까지. 할 일이 어디 한둘인 줄 아십니까.”

해석하자면 ‘일해라, 최고 권력자’가 되겠다. 무륜이 께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최고 권력자다운 미소였다.

“이제 겨우 내 봄이 돌아왔거늘. 충신이라면 섬기는 이의 마음부터 헤아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건 ‘사정 다 알면서 팍팍하게 굴지 마라’가 되겠다. 몽휼이 후- 하고 웃었다.

“저도 마음 같아선 두 분을 광실에 넣고 한 일주일 방치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모, 몽, 몽휼!”

얼굴로 피가 몰렸다. 붉은 열꽃을 피운 채 몽휼을 부르자 그가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이미 볼 장 다 봤는데 뭘 새삼 부끄러워하십니까.”

잠깐. 볼 장 다 봤다니.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휘감은 와중에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되묻기 무섭게 기함할 말이 줄줄 쏟아졌다.

“술래잡기하다 낮부터 정사를 벌이시더니, 욕탕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모든 이의 눈을 흑천으로 가리셨죠. 그때 뒤처리를 누가 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

“또 뭐가 있더라. 수련제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서 한 번. 그 외에 궁인들 눈 피해서 한 것까지 다 세면-”

으아악!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무륜이 작게 웃으며 그런 내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아래로 내렸다.

“몽휼. 그만.”

웃음기 어린 낯과 달리 선을 긋듯 냉정하고 근엄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몽휼이 저가 무례하였다며 고개를 숙였다. 슬그머니 눈을 돌리자 바로 앞에 무륜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내 귓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이화를 놀리는 건 나만 할 수 있다.”

“…….”

“이화가 부끄러워하는 것도 나만 볼 수 있지.”

가슴팍이며 허벅지를 쉴 새 없이 지분거리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하얗게 질려 몽휼을 봤다. 그가 어련하시겠냐는 표정으로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까의 진해와 같은 눈빛이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갈 조짐을 보여 다급히 무륜의 손을 잡았다. 힘으로 저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무렴. 나는 지금 백호의 육신을 입고 있으니까. 그런데 무륜이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이제 겨우 만났는데. 무정한 연인은 이렇게 붙어 있는 것조차 허락해 주지 않는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세상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너마저 날 등한시하면 세상 살 낙이 없거늘.”

아, 진짜.

“붙어 있는 건 저도 좋습니다. 다만 보는 눈이 많은 데서 이렇게 대놓고 손장난을-”

무륜은 이번에도 들은 척도 않고 내 말을 잘랐다.

“몽휼은 내 오른손이고 밀영군은 내 그림자다.”

“……제 눈에 몽휼은 몽휼이고, 밀영군은 은신과 암수에 뛰어난 특급 무사들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란 뜻이었다.

내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태도로 나오자 무륜이 바로 방법을 바꿨다. 눈썹이 팔자로 휘며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겨우 만난 정인을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내 서러워 죽겠다. 날 그렇게 버리고 홀랑 지한국으로 떠났을 때, 네 무정함을 알았지만 다시 만나서도 이럴 줄은 몰랐구나.”

아니, 제가 뭘요.

억울했으나 버리고 간 건 사실이고, 그로 인해 무륜을 아프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 일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라 변명도 항의도 못 하고 어물거렸다.

그리고 무륜은…….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한결같은 청송(靑松)의 마음으로 5년을 기다렸는데 결국은 찬밥 신세라.”

말하다 보니 내가 없던 날들이 떠올랐는지 진짜로 서러워했다. 음울한 낯을 마주하자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쥐었다.

“폐하.”

“부르지 마라. 듣지 않을 테다.”

그가 내 손을 피했다. 시작은 분명 반쯤 농이었을진대, 결국 진심이 된 무륜이 몸을 물렸다. 멀찍이 떨어진 그는 자신이 토라졌음을 알리듯 등 돌려 앉기까지 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몽휼이 ‘폐하께서 이화 님께 등 돌리고 앉으시다니. 큰 결심 하셨네요’ 하고 태평한 소리를 했다. 나는 몽휼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눈짓했다.

‘그런 말 말고 어떻게든 해봐.’

‘이화 님도 안 되는 걸 제가 무슨 수로요.’

‘생각이라도 해봐라. 폐하를 가장 오래 모신 것은 네가 아니냐.’

몽휼이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폐하의 토라진 마음도 풀어드리고, 일도 열심히 하게 할 기가 막힌 비책이 하나 있습니다.’

단, 반드시 자신이 시키는 말과 행동을 그대로 해야 한다고 덧붙엿다. 어쩐지 불길함이 발목을 휘감았다. 몽휼이 해사하게 웃으며 재차 강조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하셔야 합니다.’

……뭐든 간에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다. 하지만 저렇게 우울해하는 무륜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결국 꺼림칙함을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몽휼이 손을 까닥였다. 더 바짝 붙으라는 손짓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자 그가 내 귀에 대고 비책을 속삭였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뭐?!”

큰 소리에 무륜의 귀가 쫑긋했다. 돌아보고 싶은데 자존심에 차마 먼저 고개를 돌릴 수 없어 들썩이는 지존이시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무륜이 아니었다.

“미, 미쳤-”

“제가 방금 한 말. 토씨 하나 틀림없이 그대로 하셔야 합니다.”

목소리를 낮춘 몽휼이 강조했다.

“행동까지도.”

행동.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못하겠다고 도리질 치자 몽휼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럼 저렇게 토라진 폐하를 달래는 건데 보통의 방법으로 될 줄 아셨습니까.”

“그래도 이건…….”

“그나마 당장 판을 벌이는 건 아니잖습니까.”

판은 밤에 벌어진다. 어쨌든 벌어지긴 한다는 뜻이다. 결국 조삼모사 아닌가!

“둘이서 아주 재밌나 보군. 난 안중에도 없어.”

“설마요. 그보다 이화 님이 폐하께 할 말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돌아앉았던 무륜의 몸은 이미 반쯤 원위치 되었다. 그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고뇌했다. 저렇게 기대하는 걸 보니 이까짓 게 뭐라고 망설이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 무륜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니겠는가. 정말 이걸로 행복해질까 싶은 의문은 있지만 몽휼이 하는 말이니 틀림은 없을 것이다.

“폐하.”

결심을 굳히고 무륜을 불렀다. 무륜의 귀가 재차 쫑긋했다.

“이…… 일 다 끝내고 오시면 제가 바, 밤새 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다 해드리리다.”

그렇게 말하며 몽휼이 시킨 대로 살짝 가슴을 까 보였다. 씻을 때나 옷을 갈아입을 때가 아니면 밖으로 드러날 일이 없는 곳에 찬 공기가 스쳤다. 반대로 정수리엔 뜨끈한 열이 올랐다.

“미친.”

무륜이 험한 소리를 했다.

심이 철렁했다. 설마 안 먹힌 건가 했는데 그 반대였다. 무륜은 마음이 풀리다 못해 녹아내린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체로 무표정인 낯이 풍랑 맞은 갈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낮게 신음했다.

“몽휼 넌 진정 빌어먹을 충신이고, 더럽게 얄미운 악우다.”

“예. 황공무지하니 이제 일하시죠.”

“젠장!”

그날, 무륜이 보여준 능률은 그야말로 접신의 경지였다.

* * *

2월 중순. 금국군은 귀환을 준비했다. 진군이 아닌 귀환이었다. 지한국군은 현재 저들의 나라, 지한국으로 퇴각하는 중이었다.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전투 직후만 해도 무륜은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어 지한국군의 뒤를 칠 생각이었다. 그렇게 뒤에서부터 야금야금 삼켜 나가 본래의 국경을 수복하고, 지한국까지 위협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하나 그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실행할 필요가 없었다.

전투가 끝나고 나흘 뒤, 지한국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서한이 당도했다. 비단에 싸여 신줏단지처럼 모셔져 온 그것은 휴전을 제안하는 협정서였다.

타낙한과 달리 본국의 노인네들은 겁이 많았다. 무엇에 대한 겁이냐면, 겨우 손에 넣은 권력을 잃는 것과 머릿속에서 한껏 부풀려진 신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무륜은 전쟁 시작 전의 국경을 다시 확립시키고, 소정의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하라 배짱을 부렸다. 받아들이면 좋고, 아니면 조율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노인네들은 그걸 겁박이라 여겼는지 단숨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휴전하지 않으면 신수들을 앞세운 금국의 무뢰배가 쳐들어와, 역으로 지한국을 멸망시키리라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상상이라고. 화려한 토굴에 틀어박혀 있던 늙은 권력자들의 머릿속에선 지한국의 수도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려고만 한다면 가능할 터.’

일말의 가능성. 지한국은 그 가능성에 패배했다. 타낙한이 살아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필요 이상의 두려움에 집어삼켜진 노인들은 당장의 안전 확보가 우선이었다.

‘타낙한.’

불쌍한 자였다. 그가 이런 생각을 알았다면 ‘싸구려 동정을 줄 바엔 같은 무게의 마음을 달라’ 하였을지 모르나, 어쨌든 그랬다.

나는 그를 어떤 의미론 온전한 피해자라 생각했다. 본인의 의지 따위 없이 계약으로 심어진 본능에 따라 날 사랑한 사람. 지금 떠올려도 심경이 복잡했다. 그가 죽어 없어진 지금에도 그러했다. 딱히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영 찝찝했다.

시신만 홀연히 사라진 채 발견되고 있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걸리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 무륜은 그 후로도 포기하지 않고 틈만 나면 나와 둘만 있을 기회를 노렸다. 물론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몽휼이 말했듯, 무륜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픈 마음이 태산 같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와중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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