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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8화 (108/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8화

“위험하진 않습니까.”

“의식이 없거나 힘을 안 주려고 버티는 경우면 모를까. 자의적으로 주는 거면 괜찮습니다. 뭐, 죽을 만큼 아프고 빈사 상태가 될 순 있겠지만, 어쨌든 죽진 않습니다.”

이화의 낯이 창백해졌다.

“위험한 거 맞잖습니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흑룡 진해입니다. 이 내가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기겁하여 뱉은 말이 예상치 못하게 진해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진해의 머리 위로 용뿔이 쑥 나오며 그의 눈동자가 세로로 쭉 찢어졌다.

“헉.”

“음.”

흑월과 위중혁이 동시에 침음을 뱉었다. 위중혁이 흑월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놀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바로 방금까지 무섭게 날뛰던 그림자 괴물이 멋쩍게 침묵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진해가 이화의 손과 무륜의 손을 각각 쥐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미약한 이화의 숨이 다해가고 있었다.

이화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무륜이 그의 이름을 불러 정신을 일깨웠으나 눈꺼풀은 점점 더 감기기만 했다. 그때, 이제까지와 비견할 수 없는 거대한 함성의 물결이 위금성을 메웠다.

이화가 가물거리는 눈으로 먼 곳을 봤다. 지한국군이 언덕의 능선 너머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가 마른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끝났군요.”

마지막 전투는 끝났다. 5년간 이어진 전쟁도 곧 완벽히 끝날 것이다.

지한국엔 남은 것이 없다. 사월린은 다시 북방에 봉인되었고, 왕은 죽었으며, 어떻게 포섭했는지 모를 흑월도 제 곁에 있다. 이제부턴 그들이 지나왔던 길을 따라 역으로 밀려나게 될 터.

하늘을 뚫을 듯 울려 퍼지는 병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이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를 본 무륜은 울듯이 웃으며 ‘드디어 나의 봄이 돌아왔구나’ 하였다.

<14장 봄날의 귀로 완결>

전투 후의 수습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부서진 성벽을 보수하고 다른 성에서 식량을 보급해 왔다. 동시에 정찰을 보내 지한국군의 동태도 살폈다.

지한국군은 위금강의 건너편에 새로운 진지를 쳤다. 이제 겨울이 끝나 곧 위금강이 녹을 것을 염려한 것으로 보였다.

5년간의 전쟁에서 지한국군이 패배한 것은 손에 꼽았다. 그러나 이번 것은 특히 뼈아팠다. 고작 몇 번 중의 한 번이 아니냐며 털고 일어날 수준이 아니다.

몽휼이 때는 이때라며 타낙한의 시신을 단장하여 보내고자 했다. 예우를 갖추기 위함이라고는 하는데, 시신을 보내 사기를 더 떨어뜨리려는 셈속이 훤히 보였다.

문제는 눈밭에 파묻어둔 시신이었다. 몽휼이 찾아갔을 때, 타낙한의 시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의 이야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병사들을 시켜 철통같이 지키게 했건만 대체 누가 시신을 빼돌렸단 말인가.

“태백이겠지.”

아직 태백이 내 형임을 모르는 무륜이 잡놈, 쌍놈 해가며 으르렁거렸다.

“막판에 왜 모습을 감췄는진 모르나, 섬기던 주인이 그리 객사했으니 마음에 걸렸으리라. 그렇다고 여우 새끼 닭 물어 가듯 시신을 물어 가? 빌어먹을 놈.”

몽휼은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며 슬그머니 문을 향했다. 위중혁은 무륜을 향해 충심 가득한 염화미소를 시도했다. 무륜과 위중혁의 눈이 마주쳤다.

“당장 추살령을 내려라.”

위중혁의 마음은 전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추살대 대장으로는 네놈이 가라.”

심지어 이유는 몰라도 미움까지 받은 모양이다.

의외인 건 위중혁의 반응이었다. 대번에 부복하여 속하의 죄가 무엇이냐 물을 줄 알았는데, 그는 감히 대답도 않고 빤히 무륜을 응시했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새까만 눈 안쪽으로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무륜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위중혁을 마주 노려봤다. 둘 사이에 심상찮은 기류가 흘렀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둘을 지켜봤다.

상대가 아끼는 심복이라서일까. 무륜은 저 발칙한 것을 끌어내라 일갈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도록 들여다볼 뿐이었다.

위사들이 애써 시선을 돌렸다. 금군은 멀찍이 선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며, 밀영군은 서까래 뒤로 들어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슬금슬금 도망하던 몽휼이 오도 가도 못하고 문가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의 이상한 분위기가 비단 저와 위중혁의 기 싸움 때문만은 아닌 것을 알아차린 까닭이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타낙한의 시신이 사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저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분명 기분이 나쁘다 못해 바닥을 찍었을 것이다.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있었던 일은 다 보고를 받은 줄 알았는데.”

무륜은 애먼 몽휼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안이 조금 예민한 데다 개인사가 엮여 있던 것인지라.”

“개인사? 지금 개인사라 했나? 전시에 그따위 것을 따져 보고를 누락시키다니. 네 제정신이더냐?!”

분위기가 더욱 묘해졌다. 위사들과 금군들이 내 눈치를 봤다. 무륜이 멈칫하여 나를 봤다. 나는 멋쩍게 말문을 열었다.

“태백 대장군이 제 형이었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형이라면, 친형?”

“예. 그, 어릴 적에 헤어진 친형 말입니다. 막냇동생도 함께 있었습니다.”

태백이 친형이면, 막냇동생이라는 그 친동생이 누군지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형제들을 두었구나.”

무륜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만인지상이라 이런 거 못 할 줄 알았는데 처세술이 태감 영감 저리 가라다. 하지만 그런 무륜이 의외였던 건 나뿐이었다. 측근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 뭐 당연히 그러시겠죠, 하고 넘어갔다.

“추살령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다녀올까요.”

위중혁이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사방에서 헛숨을 삼켰다. 나 역시 당황했다. 그가 눈치가 없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방금은 묘한 것이 느껴졌다. 적의라고 하기엔 약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기엔 턱 걸리는 무언가가.

“네 귀가 먹었느냐? 태백이 이화의 형이라는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지엄한 황상의 명을 어찌 거부하오리까.”

“내 명이 그토록 지엄하여서 아까는 대답을 아니 했더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힐긋 몽휼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뭐야. 그새 어디 갔어?!’

몽휼은 도망했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에도 둘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들개처럼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나는 불안해졌다. 예로부터 권력자의 반절은 저를 적대하는 칼에 죽었지만, 나머지 반절은 가까이 있던 측근의 변심에 변을 당했다.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없다. 사람의 마음은 연약한 찰흙과 같아서, 아주 작게 난 틈이 어느새 거대한 협곡이 되기도 한다.

“폐하. 그리고 당하.”

둘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보았다.

“제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두 분 사이에 뭔가 있는 듯하온데, 이렇게 별 소득 없이 으르렁거리실 거면 차라리 허심탄회하게 말을 나누십시오.”

“저놈만 마음을 접으면 해결될 일이다.”

무륜이 위중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아마 해결될 수 없을 겁니다.”

아. 그것이구나. 깜박 잊고 있던, 날카로운 사기 조각 같은 기억이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가장 크게 얽혀 있음에도 감히 할 말이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위중혁이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곤 집무실을 나섰다. 내내 구석에서 화병을 만지작거리던 진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화. 당신은 치명적인 사내군요.”

용이 개소리를 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치명적인 사내라고 한다 했습니다.”

“……누가요.”

“천태백호님이요.”

그 신수는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아닙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진해가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정말로 내 짐작이 맞다면, 나나 무륜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붙잡고 대화를 나눌까? ……아니다. 위중혁의 성격상 외려 올곧게 고백해 올 가능성이 더 높다.

“저 새끼는 신경 쓰지 마라.”

무륜이 미운 일곱 살처럼 말했다. 씩씩대는 모습을 보니 질투하는 것도 딱 그 수준이었다. 솔직히 귀여웠다. 또 그의 질투가 그리 싫지만도 않다.

하지만 마냥 기꺼워하기엔 위중혁이라는 존재가 그리 하찮지 않았다. 위씨 가문의 장자. 특급의 무사. 무륜의 가장 날카로운 검. 또 결코 배신하지 않을 우직함을 가진 사내. 부디 그가 자신의 우직함대로 길을 찾길 바랄 뿐이었다.

무륜이 내 허리에 팔을 휘감아 당겼다. 엉덩이가 그의 다리 사이에 떨어졌다.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내 앞에서 위중혁을 생각하지 마.”

이건 그냥 귀여운 게 아니라 엄청나게 귀여웠다.

“예, 그러겠습니다.”

“……내가 없을 때도 생각하지 마.”

귀여움이 치사량을 넘었다. 손으로 심장을 부여잡았다. 무륜은 내가 어디 아픈 줄 알고 펄쩍 뛰었다. 구석에서 난초를 만지작거리던 진해가 얼결에 불려 왔다.

그는 벌게진 내 낯과 가슴께를 움켜쥔 손을 번갈아 보다 ‘증상을 보아하니 이 또한 천태백호님께 들은 적이 있는 병이군요’ 했다. 의아해서 무슨 병이냐 되묻자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지랄염병이십니다.”

무륜과 내가 동시에 굳었다.

“아, 물론 두 분 다 같은 병입니다.”

짜게 식은 눈으로 보던 진해가 뒤돌아섰다.

“잠깐 바다에 다녀오겠습니다. 벌써부터 우짖는 것이, 울증이 도진 모양입니다.”

바다가 울증을 앓고 있다니.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에 대해 물을 새도 없이 진해가 사라졌다.

그는 내가 불안하다며 결국 이곳에 남았다. 대신 훌쩍 사라졌다 훌쩍 돌아오길 반복했다. 바다를 달래러 다녀오는 거였다. 철썩거리며 사납게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와 그 앞에서 바다를 달래는 진해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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