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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7화 (107/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7화

두 사내의 시선이 부딪혔다. 무륜의 혼란은 짧았다. 그는 그림자의 기행보단 당장 가슴에 구멍이 뚫린 이화의 상태가 중했다.

“안 돼. 안 된다. 네 내게 또 이럴 수는 없다.”

부들거리는 손이 이화를 보듬어 안았다. 그런 손이 네 개였다. 마치 주술이 풀리듯 그림자가 녹아내렸다. 그 안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흑월이 나타났다.

흑월은 울면서 이화의 손을 들어 제 뺨을 감쌌다. 피투성이 손이다. 자신이 이리 만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숨이 턱 막혔다. 정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이화는 그런 흑월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나 모르게 언제 깨어났더냐. 아무튼 잘 일어났다. 이화는 눈을 접어 웃었다. 흑월이 여율령의 저택에서 매일 보았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흑월.”

“예. 예, 도련님.”

흑월은 눈을 감았다. 희게 질린 뺨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핏방울이 씻겨 내려갔다. 이화를 해하며 튄 피였다. 그는 차마 이화를 보지 못했다. 너른 어깨를 옹송그렸다.

무슨 말을 하실까. 두려움에 떨어도 의미는 없다. 어떤 말을 해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저는 죄인이었다. 이전 생엔 감히 주인을 두고 도망쳤고, 이번 생엔 감히 주인에게 살수를 펼쳤다. 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흑월은 이화의 말을 기다렸다.

“혀가 생겼구나.”

“…….”

흑월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이화가 설핏 웃었다. 흑월의 심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이 이화에게 박혔다. 죽어가는 이화의 모습이 그제야 온전히 보였다.

풍 맞은 사람처럼 전신이 떨렸다. 마지막에 인간으로 변한 뒷모습을 보고 동요하지 않았다면, 흑월의 손은 이화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을 것이다. 흑월의 떨림이 격해졌다.

“이제 다신 그리 가지 마라.”

백호가 되었어도 변함없는 도련님은 ‘왜 저를 공격했냐’ 묻지 않았다. 저를 두고 홀로 죽은 것만을 아직까지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흑월은 울음을 삼켰다. 너른 어깨가 들썩였다. 그는 이제 천명이 아니더라도 자진할 수 없게 됐다.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아. 저는 처음부터 상선의 손바닥 안에 있었구나.

모든 것이 그의 거대한 덫이었다. 흑월은 한탄했다. 어째서 몰랐을까. 어째서 의심하지 않았을까. 죽은 저도 살려냈을진대, 그리 아끼던 이화를, 심지어 아직 살아 있던 이화를 그리 죽게 둘 분이 아니셨던 것을.

흑월이 지독히 후회하던 때, 위중혁이 성벽을 뛰어올라 당도했다. 숨을 헐떡이는 그를 향해 이화가 ‘당하’ 하고 불렀다. 위중혁의 낯이 일그러졌다.

“말하지 마라.”

“저 새끼 말이 맞다. 말하지 마라.”

참으로 저렴한 어휘가 지엄한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이화가 아픈 와중에도 움칠했다. 내가 언제 달팽이관도 다쳤었나.

하나 잘못 듣지 않았다. 무륜은 이화를 걱정하는 와중에도 위중혁을 노려봤다. 무륜은 위중혁의 고백을 잊지 않았다. 깃을 세운 수탉 같은 적의였다. 위중혁은 개의치 않았다. 서둘러 다가가 얼른 한 자리를 차지했다.

쓰러진 이화의 모습이 세 개의 등판 사이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타낙한은 성벽 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륜을 향해 찬란하게 빛나는 표정. 그 표정을 보고 직감했다. 저것은 이화다. 일전에 만났을 땐 같은 얼굴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이화라기보단 백호였으니까. 하지만 저건. 지금 보는 저건.

“……이화.”

틀림없는 이화였다. 타낙한이 사랑한 봄꽃은 무륜의 손에서만 피는 것이었다.

“하. 하하하.”

그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울면서 웃는 그의 등에 몽휼이 칼을 박아 넣었다. 웃음이 뚝 그쳤다. 타낙한은 담담하게 뒤를 돌아봤다. 검날이 폐를 건드렸는지 입가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타낙한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잿빛의 표정으로 죽었다. 아마 몽휼이 검을 내지르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몽휼은 찜찜함을 애써 거두며 말했다.

“시신은 예우를 갖춰 돌려보내 주마.”

그렇게 성벽 아래쪽이 마무리 지어졌고, 전쟁도 끝을 고했다.

그러나 승리의 현장에 있던 것은 몽휼뿐이었다. 그는 장정 셋이 다람쥐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성벽 위를 보다, 현장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물론 크게 다친 이화가 걱정됐다. 하지만 하나라도 제 역할을 해야지 않겠나.

그가 검을 높이 들며 타낙한의 죽음을 알렸다. 성벽 위를 가득 메운 금군 병사들이 환호했다. 닫혔던 성문이 다시 열리며 사기가 최고조인 금국군이 쏟아져 나왔다.

왕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지한국군은 머릿수만 많은 오합지졸이었다. 심지어 이젠 군사인 태화도, 원급 무사인 태백도, 사월린도 없었다. 소장군들이 어떻게든 병사들을 독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장 명을 내리는 그들의 눈에도 혼란이 가득했다.

지한국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 해보고 패퇴했다. 아마 근 시일 내에 휴전협정을 맺고자 할 것임을 몽휼은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었다.

“폐하, 전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으니 말을 아껴라. 입을 열 때마다 피가 나오질 않아. 빌어먹을. 의원은 아직이냐!”

안 그래도 의원을 등에 업은 밀영군이 성벽을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올해 칠십 먹은 의원은 밀영군이 비조처럼 내달릴 때마다 억, 억, 단말마 같은 신음을 뱉었다.

“신수는 튼튼합니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습니다. 그보다 폐하야말로 어디 좀 누우십시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 이제 막 깨어났잖습니까. 이리 막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무륜이 미간을 찌푸렸다. 흑월과 위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이화를 지켜볼 뿐. 민망함에 무어라 더 말하려던 이화가 쿨럭 피를 토해냈다.

‘이거 큰일 났군.’

여태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이화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신수로부터 입은 상처라 쉽사리 회복되질 않았다. 게다가 상선도 오수에 든 참이다. 되살려 줄 이도 없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자꾸 눈이 감겼다.

“네 이번에도 날 두고 가면 바로 따라갈 것이다.”

무륜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연모하는 사람이 저런 으름장을 놓는데 어찌하랴. 이화가 가물거리던 눈을 번쩍 떴다.

“안 갑니다.”

“거짓말.”

“신수는 거짓말 못 합니다. 북망산도 아니 오르고, 삼도천도 건너지 않을 겁니다.”

이화가 팔을 뻗어 매달리듯 무륜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내 이화에게 닿아 있던 흑월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무릎 꿇은 두 사내의 앞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당신을 두고 가긴 어딜 갑니까. 제가 어떻게 돌아왔는데요. 예 있을 겁니다. 가라 하셔도 예 있을 겁니다.”

무륜은 그런 이화를 와락 품에 보듬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손은 상처를 꽉 짓누르고 있었다.

신수는 거짓말을 못 한다. 하지만 인간은 말로 함정을 팔 수 있다. 신수의 몸으로 인간의 마음을 얻은 이화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제 몸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시각각 나빠졌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손아귀에서 새는 모래처럼 생명력이 줄줄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본 그것은 두려움도 뭣도 없는 공백이었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아니겠지. 무륜이라면 정말로 저를 따라 자진을 할지도 몰랐다. 이화는 그것이 두려웠다.

“난장판이군요.”

그때,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네 쌍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한 사내가 불퉁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진해?”

잠자러 간다던 흑룡, 진해였다.

“전 백호가 우는 건 딱 질색이지만 가슴에 구멍이 뚫려 죽어가는 백호는 더더욱 싫습니다. 당신께선 제 인내심을 시험할 참입니까.”

흑룡은 짜증을 내며 다가왔다. 그가 얼이 빠진 사내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 당신들은 눈치도 없습니까. 당장 엉덩이 안 치우고 뭐 합니까.”

흑월과 위중혁이 찍소리도 못 내고 쫓겨났다. 이화는 미묘한 표정으로 진해를 봤다.

“……얼마 전에 뵈었을 때랑 성격이 좀 바뀌신 것 같은데요.”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게 원래 성격입니다.”

그땐 잠이 덜 깼던 것뿐. 그가 태연히 말했다. 이화는 그제야 진해가 첫 대면에 비아냥거렸던 것과 칼같이 제 말을 잘랐던 걸 기억해 냈다.

“제가 다친 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돌아가 해류를 베고 누웠는데 도통 잠이 와야 말이죠.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진해가 손을 뻗어 아직도 피가 울컥거리는 상처를 가렸다. 은은한 하얀빛과 함께 얇은 막 같은 것이 상처를 감쌌다.

“용케 살아 계시는군요. 당장 육신의 명이 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인데.”

뾰족한 시선들이 이화에게 쏠렸다. 이화는 상처가 아닌 다른 이유로 식은땀이 고이는 걸 느꼈다.

“신수는 거짓말 못 한다고…….”

“그, 그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무륜의 사나운 읊조림을 가로막으며 이화가 얼른 말했다. 하지만 진해는 냉정했다.

“아뇨. 그 정도입니다. 다행히 심장은 비켜났군요. 문제는 상성이 맞는 기력을 당장 구하기 어렵다는 건데…….”

진해가 말끝을 늘였다.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긴장하여 그를 봤다. 뭔지 몰라도 문제가 있는 건 확실했다.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예?”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진해는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무륜을 향해 물었다.

“지금 당신의 안에 백호의 힘이 있는 걸 아십니까.”

“……그게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까.”

“당신이 고꾸라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 어린 백호님은 내내 절반의 힘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 쌍의 뾰족한 눈이 다시 이화를 향했다. 이화는 진해가 저를 살리러 온 건지, 죽이러 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지금 당장 백호와 상성이 맞는 기력이 필요한데, 마침 당신 안에는 백호의 힘이 반절이나 봉해져 있죠. 그 힘을 가져다 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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