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6화
‘하긴. 위금성을 무너뜨리면 금국은 무너진다. 그럼 전쟁의 승리는 확실시되는 상황. 내가 전쟁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하면 떨어질 여우 목이 한둘이 아니니 똥줄이 탈 만도 하지.’
얼음으로 만든 검을 휘두르며 타낙한은 웃었다.
본래도 이성이 희미하긴 했지만, 5년 전에 만난 어느 봄꽃은 그나마 있던 이성마저 앗아갔다. 그때 깨달았다. 제 혼에 새겨진 것은 이능을 보장하는 신성한 계약이 아니라 타락한 신수가 토해낸 집착의 찌꺼기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 타낙한은 사월린이 새로 내민 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잠깐이나마 봄꽃을 손에 쥐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 향기만 맡았을 뿐인데 스러져 버린 꽃. 그 경이로운 향취가 가시질 않아, 타낙한은 이곳에 왔다.
가장 찬란한 봄꽃이 사랑했던 사내를 죽이기 위해.
이 추악한 질투와 미칠 듯한 격정은 전부 사월린이 남긴 잔재였고, 그의 물그림자였다. 하지만 세상엔 알아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들이 있다. 타낙한에겐 이 감정이 그랬다.
카강! 콰각!
검기와 검기가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한겨울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몽휼. 위중혁. 타낙한. 셋 모두 어느 한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피가 울컥울컥 솟는 옆구리를 틀어막은 위중혁이 몽휼을 힐금거렸다. 가장 상태가 심각한 건 몽휼이었다. 그는 본래 그림자다. 이렇게 앞에서 맞서는 전면전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위중혁이 슬쩍 몽휼의 사선을 점하며 앞을 막아섰다. 타낙한의 칼은 자연히 위중혁을 향하게 됐다. 몽휼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혁중아. 뭐 하냐.”
“약자를 보호하는 중이다.”
“뭐? 이 투구벌레 자식이?!”
“연약한 소금쟁이는 물러나 있어.”
위중혁의 낯에 그늘이 졌다.
백호는 정체불명의 그림자에게 잡혔다. 저와 몽휼도 타낙한을 상대하는 게 고작이다. 금군과 부대별관들이 병사들을 잘 이끌고는 있으나 중심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무륜의 부재가 뼈아팠다.
“돌을 더 가져와! 어서 끓는 물을 부어라!”
그때, 누군가 성벽 위로 올라섰다. 키가 옆에 선 말단 병사의 허리춤에 간신히 닿을 만큼 작았다.
“뭘 멀뚱히 섰나! 단 한 놈도 성벽에 올리지 마라! 이곳이 어디냐.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위금성이다. 너희가 누구냐. 그런 위금성의 자식들이다! 이따위 외적들에게 굴하지 마라!”
위금성주였다. 평소의 천진한 어린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백이 장수와 같았다. 사나운 일갈에 병사들의 움직임이 일변했다. 씨도둑은 못한다고. 위중혁은 토끼 같은 옥동에게서 불곰 같던 선대 위금성주의 모습을 보았다.
전투는 치열하고 처절했다. 지한국군과 금국군, 양쪽 모두에게 그랬다.
“물러서지 마라! 버티면 이기는 건 우리다!”
위금성주의 목이 다 쉴 때쯤, 슬슬 기나긴 전투의 결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 돼.”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지한국군이 무수한 시체를 발판 삼아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위중혁은 전투 중에도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무리를 이룬 지한국 병사가 위금성주를 향해 창칼을 들이밀고, 호위가 그를 간신히 막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끝났다.”
타낙한이 낮게 웃었다.
“이 전쟁은 나의 승리다.”
그는 지한국의 승리라 하지 않았다. 자신의 승리. 봄꽃을 마지막으로 가진 것도 저였고, 금국을 손에 넣는 것도 자신이다. 한데 짧은 성취감 뒤에 무언가 따라붙었다. 거대한 공허였다. 타낙한은 비어버린 제 내부를 무시하려 애썼다.
쿠웅!
버티고 버티던 이화가 기어이 쓰러졌다. 피를 토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백호의 어깨를 어느새 다가선 그림자가 밟아 눌렀다. 발톱이 눈 덮인 땅을 긁었다.
“대체 그 사내의 어디가 좋다고 다들 이러는지.”
이미 주변의 눈밭은 이화가 지나온 길을 따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림자가 백호를 내려다봤다. 백호는 빈사 상태에서도 사납게 눈을 번득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 눈빛이 누군가를 지독히 닮은 듯해 그림자의 속이 뒤틀렸다.
사실 백호는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무리 상성이 나쁘다지만 그림자를 이길 방법이 아주 없진 않았다. 이 일대의 모든 땅을 무너뜨리면 된다. 설 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그림자라도 방도가 없을 터.
‘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지.’
백호의 등 뒤에는 그가 이런 꼴을 당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그런 점이 닮아서 더더욱 불쾌하다.”
“혼자 무슨 헛소리를.”
백호가 으르렁거렸다. 그림자는 듣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요 며칠 위금성을 지켜봤다. 저는 태생부터 반쪽짜리라 아주 선명하게 보지는 못하였으나, 위금성 내부를 얼핏 훑어볼 정도는 되었다. 그 어디에도 이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었구나. 정말로 죽었어. 혹 기적이 일어나 이화가 살아 있다면 무륜의 곁에 없을 리 없다.
그림자는 분노했다. 상선을 향한 분노였다.
‘어리석고 못난 것. 내 너를 너무 크게 보았구나. 어디 할 게 없어 자진을 하더냐.’
처음 들은 음성은 먹먹하였다.
‘반쪽짜리나마 신수가 되었으니 네게 천명을 주마.’
먹먹함은 이내 미약한 분노를 품었으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한겨울 밖에 내놓은 화로처럼 열기가 식고, 남은 빈자리로 풀꽃 같은 염려와 애정이 피어났다.
‘살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것이 네 멍에이자 천명이다.’
나직한 목소리를 따라 얼핏 정신을 차렸을 때, 그림자는 자신이 왜 거기 있으며, 어떻게 살아난 것인지를 이해했다.
불완전하게 신수가 된 그는 본래 잊었어야 할 전생을 온전히 기억했다. 대신 신수로서의 권능을 잃었고, 목적 없는 천명만이 남았으며, 인간일 적의 특성까지 뒤섞여 변질되었다.
그렇게, 마치 암살자 같은 신수가 탄생했다.
‘나는 이제 오수에 들 것이다. 흐름을 뒤틀어 신수를 만든 탓에 기력을 너무 소진했어.’
입을 열 수 있었다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이화가 없는 세상에 자신을 던져놓은 상선이 지독히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눈뜨자마자 이화와 지독히 닮은 눈을 가진 백호를 마주했다. 심지어 선 자리도 같다. 바라보는 것도, 마음을 둔 곳도 같다. 그림자의 속이 절절 끓었다.
“물러나지 않으면 나는 진정 너를 죽일 것이다.”
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말을 했다. 그림자가 기억하는, 강인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에 흔들림 없는 눈이 백호의 눈 위로 덧대졌다.
위로 치켜든 그림자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머물렀다. 차마 아래로 내려찍지 못하고 애먼 시간만 흘렀다.
그림자의 망설임이 눈처럼 쌓여가던 찰나, 성벽 위에서 함성이 터졌다. 어떤 직감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백호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둘만이 아니었다. 광기에 휩싸여 쇄도하던 지한국 병사들이 주춤했다. 몽휼은 곧 울 것처럼 감격하여 소리를 질렀고, 위중혁은 굳은 낯을 조금 폈다. 타낙한은 대로하여 제 눈이 비친 자의 이름을 뱉었다.
“무륜……!”
밀영군을 위시하고 선 것은 틀림없는 무륜이었다. 초췌한 낯에 창백한 뺨. 가늘게 떨리는 다리. 하지만 그는 올곧게 서 있었다. 그 풍모만큼이나 올곧은 시선이 이화를 향했다.
이화는 정수리부터 꼬리를 관통하는 불길함을 느꼈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 이제 막 깨어나 성치도 않은 몸으로, 부러 잘 보이는 성벽 한중간에 오른 연유. 이화는 그 연유를 저를 보는 무륜의 시선에서 읽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무륜이 입을 열었다. 거리가 있었으나 백호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은 아니 된다. 너를 또 잃느니 내가 한 번 죽는 것이 낫다. 위험? 내 알 바더냐. 너만 무사하면 그걸로 된 것을.”
옆에 서 있는 그림자의 다리가 꾹, 하고 땅을 딛는 것이 느껴졌다. 이화의 뇌리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펼쳐졌다.
“살아라.”
무륜이 흐드러진 봄꽃처럼 웃었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
콰앙! 그림자가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화도 마찬가지였다. 흑과 백의 선이 무륜을 향해 쏘아졌다. 몽휼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홀린 듯 성벽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면 둘이 성벽을 향해 쏘아지기 직전, 무언가 느낀 위중혁은 둘이 대치하던 곳을 봤다. 묘한 형태로 푹 꺼진 땅과 솟구치듯 솟아오른 땅덩어리가 보였다. 전자는 그림자가 섰던 곳이었고, 후자는 이화가 섰던 자리였다.
“……안 돼.”
위중혁은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그가 곧장 성벽을 향했다. 남은 기력을 모두 쥐어 짜내 신법을 운용했으나,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이화는 이상하게 몸이 가벼운 것을 느꼈다. 도약의 순간, 그림자가 선 땅은 꺼뜨리고, 제가 선 땅은 솟구치게 했어도 그 이상의 가벼움이 느껴졌다.
‘상관없나.’
전투 내내 속도에서 밀렸으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선 그림자보다 빨랐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화는 제 앞에 선 무륜을 보았다. 경악하여 일그러진 낯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시냐, 물으려 입을 열자 말 대신 피가 쏟아졌다. 이화의 시선이 그제야 아래를 향했다. 가슴팍을 뚫고 검은 손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렇구나. 이화는 가벼움의 정체를 깨달았다. 막아야 한다는 본능이 앞선 탓일까. 육중한 거체보단 같은 힘으로 움직이는 인간형이 더 빠른 것은 당연한 이치. 그는 어느새 백호에서 인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화 님?”
“이화야?”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스르륵. 잘게 떨린 손날이 빠져나가고 이화의 몸이 모로 쓰러졌다. 무륜이 와락 달려들어 그 몸을 받았다. 맞은편의 그림자도 달려들어 이화를 지탱했다.
두 사내의 시선이 부딪혔다. 무륜의 혼란은 짧았다. 그는 그림자의 기행보단 당장 가슴에 구멍이 뚫린 이화의 상태가 중했다.
“안 돼. 안 된다. 네 내게 또 이럴 수는 없다.”
부들거리는 손이 이화를 보듬어 안았다. 그런 손이 네 개였다. 마치 주술이 풀리듯 그림자가 녹아내렸다. 그 안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흑월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