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5화
“인간의 힘을 빌려야만 힘을 쓸 수 있다는 제약은 크다. 아마도 3할. 잘해봐야 4할. 그 이상 사용하면 타낙한의 육신이 무너지겠지.”
봉인되지 않은 본신의 사월린은 이미 천태백호를 죽인 전적이 있다. 만약 그가 풀려난다면 이제 갓 태어난 백호인 이화로선 제대로 상대조차 못 해보고 패할 것이 분명했다.
‘절대 결계가 무너지게 두어선 안 돼.’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는 건 물론이고, 이후엔 부서진 결계석도 하나하나 보강해야 했다. 혀를 찬 이화는 일단 당면한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후퇴하여 상황을 주시하라. 이건 명령이다.”
“예. 위사장.”
위사장. 무의식적으로 그리 부른 몽휼도, 옆에 있던 위중혁도, 불린 이화도 모두 놀랐다. 화살이 빗발치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멋쩍은 분위기가 퍼졌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이화였다. 백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휘어진 눈매가 이화 그 자체였다.
위중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커졌던 눈은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너였구나. 계기가 제공되자 봄비가 천에 스미듯 받아들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역시 나는 네가 좋다.”
이미 백호일 적 ‘황제와 위중혁이 같은 사람을 연모했느냐’ 물었던 이화였다. 당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답은 알았다. 확인 사살과도 같은 말에 이화가 어정쩡하게 굳은 반면 위중혁은 무언가의 결심을 굳혔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몽휼이 손을 들어 얼굴을 훑어 내렸다. 그는 위중혁의 안에서 일어난 연쇄적인 변화를 정확히 알아차렸다.
‘하여간 힘든 길을 사서 가는 투구벌레로다.’
몽휼이 한숨지었다. 끝이 정해진 외사랑을 지켜봐 주는 것도 악우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위사장은 이렇다 할 답 없이 흙벽을 벗어나 내달렸다. 하나의 하얀 빛줄기가 되어 전장을 가로질렀다. 몽휼은 그 모습을 일별하고, 아직 눈을 떼지 못하는 위중혁의 어깨를 쥐었다.
“우리는 이 틈에-”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하늘을 가르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눈앞이 번쩍하며 하얀빛이 사방을 메웠다. 흙벽의 절반이 부서졌다. 금군은 무너지는 흙덩이를 피해 몸을 날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몸을 추스르기 무섭게 전방을 주시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선 알아야 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은 불꽃이었다. 하늘을 향해 날리는 흑단. 새까만 아지랑이를 두른 악귀. 그것의 모습은 어떤 말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림자…….”
금군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몽휼은 동의했다. 가장 흡사한 것을 꼽으라면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일 것이다.
그건 키가 칠 척에 달하는 그림자 괴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지 않는 검은 불꽃을 둘렀고, 손끝은 짐승의 것처럼 뾰족했다. 두 발로 선 녀석이 입을 벌렸다. 얼굴이 벌어지듯 사이가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이화의 낯이 심각해졌다. 영물이라 하기엔 가진바 힘이 고강하고, 신수라고 하기엔 영 잡다하게 섞인 느낌이었다. 물려받은 백호의 기억에도 저런 것은 없었다.
하면 대체 무어냐. 저 불온하고 불길한 것은.
“크르르아아!”
그림자는 포효조차 괴물에 가까웠다.
“혁중아, 저게 대체 무엇이냐.”
“모르겠다.”
위중혁이 검을 움켜쥐었다.
“다만 강한 놈이라는 건 알겠구나.”
괴물의 눈에 새빨간 안광이 번뜩였다.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이화!”
위중혁의 목소리는 전장의 소란에 묻히고 말았다. 새까만 빛살이 전장을 갈지자로 가로질렀다. 병사들 틈을 질주한 그림자는 앗, 하는 사이 이화의 지근거리에 당도했다.
콰직! 뾰족하게 모은 그림자의 손이 백호의 옆구리에 박혔다.
신음을 삼킨 이화가 앞발로 그림자를 쳐냈다. 양손을 교차해 막은 그림자가 멀리 날아갔다. 발을 길게 끌며 착지한 녀석은 곧 허리를 숙이며 양팔을 늘어뜨렸다. 눈은 여전히 백호를 응시한 채였다.
곧 새카만 그림자의 신형이 길게 늘어났다. 흑과 백의 선이 사납게 뒤엉켰다. 땅 위에 천둥과 번개가 치며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전투는 처음부터 그림자의 우세로 시작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 입고 피 흘리는 건 백호뿐이었다. 하얀 털이 피투성이로 변했다.
뚝. 흐른 피가 떨어진 땅에는 순식간에 풀이 자라고 꽃이 피었다. 하계에서 가장 순수한 생명력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광경이었지만, 금군들은 그를 마냥 경이롭게 볼 수 없었다.
백호는 적호(赤虎)가 됐다. 그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인간을 뛰어넘었지만, 신수에는 미치지 못한 원급 무사 태백. 가장 강한 신수지만 북녘땅에 봉인되어 반쪽짜리만도 못한 사월린. 그 둘이 합쳐야 겨우 붙들어 막을 수 있었던 것이 백호라는 존재였다.
한데 그런 백호를 혼자서 몰아붙이는 그림자 괴물이라니. 이화의 힘이 황제에게 봉인되어 있음을 모르는 금군들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였다. 절망은 병마와 같이 퍼져 나갔다.
한편, 이화는 입에서 피를 쏟으며 으르렁거렸다. 역시 힘이 봉인된 게 컸다. 거기다 상성마저 나빴다.
백호의 힘이 일 대 다수의 백병전에서 절대적 우위를 가진다면, 저 그림자는 일대일의 싸움에서 절대 우위를 점했다. 움직임은 어떤 신수보다 빨랐고, 손에 두른 새까만 검기는 백호의 거죽마저 뚫어버렸다. 극단적으로 말해, 신수의 몸을 입은 암살자 같았다.
빌어먹을. 이화가 욕설을 삼켰다. 대체 어디서 이런 것이 튀어나왔을까. 영물 중에 언제고 격을 높여 신수가 될 놈이 나오고, 개중에서도 사월린처럼 타락하는 놈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타락한 신수가 맞긴 한가? 그렇다고 하기엔 어딘가-
“백호여.”
그림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상선에겐 빚이 있으나 네겐 어떤 유감도 없다. 그저 내 목적에 방해가 되기에 적대하고 있을 뿐. 지금이라도 물러나겠다면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겠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원래 그런 건지 말투도 다소 어눌했다. 자연히 태백을 떠올린 이화가 쓰게 웃었다.
백호의 눈이 그림자를 느리게 훑었다. 그 또한 완벽하게 멀쩡하진 않았다. 앞발에 차이고 발톱에 찢기며, 옆구리와 허벅지에 꽤 큰 상처를 입었다. 그 증거로 처음보단 움직임이 둔해졌다.
“네 목적이 무엇이냐.”
“금국 황제의 목이다.”
“그렇다면 물러날 수 없다.”
이화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그림자만큼은 아니지만, 그가 박차는 땅이 곧 그의 편이었다. 콰직! 앞발이 피하는 그림자를 쫓아가 할퀴었다. 후드득. 새카만 그림자와 새빨간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림자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네가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무륜의 목을 노린다는 점이 중요하지.”
“……나는 네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너는 내가 아는 사람을 닮았다.”
스멀거린 그림자가 상처를 덮었다. 뾰족한 손끝이 길어지며 괴물의 기세가 폭발했다.
“그래서 더 거슬린다.”
콰광! 쾅! 인간을 아득히 벗어난 힘이 맞부딪힐 때마다 멀쩡한 땅이 분지가 되고 휘말린 병사들이 죽어났다.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몽휼이 물었다.
“어이, 혁중아. 어찌할 테냐.”
“너와 같은 생각이다.”
몽휼이 크게 웃었다.
“그래.”
위중혁이 미친놈을 보듯 몽휼을 봤다. 몽휼은 개의치 않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들은 금군에게 후퇴를 명했다. 금군은 굳은 낯으로 거부하다 몽휼에게 엉덩이가 걷어차여 쫓겨났다. 나란히 검을 쥔 그들이 백호에게 가세하려 달려갔다.
그러나 합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파팍! 몽휼과 위중혁이 양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움직이던 진로에 화살이 꽂혔다.
“타낙한.”
위중혁이 읊조렸다. 말에 오른 타낙한이 제 그림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지한국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본래 검은색이던 타낙한의 눈 한쪽이 은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얼음으로 만든 검을 손에 쥔 채 몽휼과 위중혁을 내려다봤다. 일류 무사에 간신히 턱걸이한 그에게서 가공할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틀림없는 특급 무사의 기세였다.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사월린의 짓이 분명했다.
“비장의 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겨둬야 하는 법이지.”
얼음의 검 위로 선명한 검기가 씌워졌다.
“오늘 건룡제의 왼팔과 오른팔을 한꺼번에 잘라내고, 황제의 수급을 위금성 성벽에 걸겠다.”
“네 이놈!”
몽휼과 위중혁이 타낙한에게 달려들었다. 그 또한 마주 임했다. 타낙한으로서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곳은 무륜과 타낙한. 양측 모두의 배수진이었다.
검을 앞으로 겨눈 타낙한은 이때까지의 날을 되돌아봤다. 전쟁 초만 해도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본국에서의 지지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러나 그가 승전을 거듭하며 본국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다른 마음을 품는 것들이 생겨났다.
아무리 무서운 권력도 가까이 있을 때가 두려운 법. 가끔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왕의 공백은 컸다.
그가 있을 땐 바닥을 기던 가신들이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범 없는 골짝에서 왕 노릇을 하려 드는 여우 새끼도 나타났다. 여우들은 민생의 피폐함과 가신들의 타락을 모두 타낙한의 탓으로 돌렸다.
타낙한은 그에 관해 손쓸 도리가 없었다. 막 금국의 경계를 넘었던 때면 모를까. 동쪽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은 지한국 왕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우들도 그를 알고 있었다.
아직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한다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진다. 그것이 부질없고 의미 없는 자기 위안임을 알면서도, 타낙한은 회군할 수 없었다. 막말로 지금 보내온 지원군 중에 암살자가 섞인 것은 논제도 아니다. 묻는다면 ‘몇 명이 섞여 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