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4화
“암묵단은 포기한다. 대신 위수혁만이라도 불러들여. 지금은 일류 무사 하나가 아까운 때다.”
알겠다, 대답하는 몽휼은 이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태백이 소리 소문 없이 돌아간 이후,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가 진실을 들었다. 당연히 경악했다. 그러나 백호의 입에서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지는,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그리운 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위중혁을 제외하고.
“당하께는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떠날 때 그리 떠났으니 감히 용서를 구할 염치가 없구나.”
그를 ‘당하’라 부르는 조곤조곤한 어조에 몽휼은 ‘아, 정말로 그 사람이구나’ 하였다. 마치 백호가 사라지고 그 몸에 이화가 들어간 것만 같았다. 하룻밤의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극적인 변화였다.
“위중혁이 얼굴을 비치지 않는 건 아마 다른 이유 때문이라 생각합니다만.”
“다른 이유?”
몽휼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이화가 뒤늦게 ‘아’ 했다. 기억난 게 틀림없다. 이화는 애매한 표정이 되어 침묵했다.
빌어먹을 투구벌레. 한숨을 쉰 몽휼은 저와 이화, 그리고 위중혁의 관계가 새삼 묘한 것을 깨달았다.
이화는 위중혁을 당하라 부른다. 하지만 몽휼은 이화에게 존대를 하고, 위중혁과는 이제 막역한 사이라 편하게 말한다. 그걸 여태 이상하다 느끼지 못한 이유도 알게 됐다. 셋 중 누구도 그를 개의치 않은 까닭이다.
“그보다는 폐하의 용태가 문젭니다.”
무륜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의원이 진료를 보고 안과 밖이 모두 완벽하다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
“본인도 연유를 모르시니 답답할 노릇이군.”
이화는 그날 이후 매일 밤 무륜의 꿈을 찾아들었다. 다시 만나면 많은 말을 나눌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움이 바다 같았고 하고픈 말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눈이 부딪힌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화의 그리움이 바다 같았다면, 무륜의 그리움은 하늘과 같았다. 무륜은 그 하늘 가득 다시 목련이 피는 날을 그려왔다. 이화가 있는 지금이 바로 그날이었다. 이 순간이 그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질펀하게 뒹굴었다. 물론 목적을 잊진 않았다. 이화는 헐떡이면서도 현실의 상황을 소상하게 전했다. 그의 의견을 묻고, 깨어나지 못하는 연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륜은 이화를 탐닉하면서도 황제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는 군의 방침을 정하고, 지시사항을 전했으며, 지한국의 총공세를 함께 대비했다.
“벌써 나흘째다.”
이화의 몸이 앞으로 숙어지며 순식간에 거대한 백호의 모습으로 변했다. 정자 하나는 들어갈 크기의 망루가 삽시간에 들어찼다. 백호의 털에 눌린 몽휼이 ‘무엇이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지한국군에서 형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몽휼이 움칠했다. 이화가 지칭한 ‘형님’이 태백이라는 건 머리로 이해한다고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태화야 워낙 안에서만 생활하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새로운 군세가 합류했는데도 나서지 않는 것은 역시 이상하지.”
“뭐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글쎄.”
말을 뭉뚱그렸지만 대충 짐작 가는 건 있었다. 무단으로 저를 찾아온 것이 들켜 구금당했거나, 태화와 형제 간의 대화를 잘 마치고 함께 도망하였거나.
이화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내면도 외면도 헤어질 적 그대로이던 순진한 형님. 그에게 한 충고는 틀림없이 그와 태화를 위한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무륜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이화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토끼가 산을 메울 만큼 모인들 범을 당해낼 순 없는 법.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다.”
천명? 개나 주라지.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무륜을 위해서라면 이화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휴전협정에 서명하거나, 멸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으르렁. 이화가 범의 울음을 토했다.
“선택은 타낙한의 몫이다.”
* * *
타낙한은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잿빛으로 가라앉은 눈이 탁자 위의 호롱불을 노려봤다. 품이 허전했다. 허전함은 곧 날카로운 두통이 되어 그의 뇌리를 찢었다. 그가 독한 술을 벌컥 들이켰다.
이렇게 술에 의존하여 잠자리에 드는 건 오랜만이었다. 타낙한이 신음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안 그래도 아픈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연이어 수도를 함락시킬 때만 해도 승기는 지한국에 있었다. 금국이 온전히 손에 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것이 위금산을 지나며 뒤바뀌었다. 형세의 역전이라는 말은 빌어먹게도 딱 맞았다.
위금산의 백호.
“하하.”
하지만 그를 생각하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의 전생이 이화라는 사실이었다.
“사월린.”
-무어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당신이 사랑했던 인간의 이름이 뭐였습니까.”
의미 있는 물음은 아니었다. 주정뱅이의 호기심에 가까웠다.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렇구나, 하고 넘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잊었다. 위문현과의 계약으로 묶어두지 않았다면 아마 얼굴도 잊었을 것이다.
술이 다 깼다. 타낙한이 놀라 되물었다.
“잊었단 말입니까? 그 긴 세월을 변함없이 사랑한 사람을 어찌 잊을 수 있답니까.”
-네 말대로 내 마음은 수천 년의 세월에도 마모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기억은 별개였지.
묘한 어조였다. 더 들어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사월린은 알지 못했던 거다. 자신이 그를 잊을 것이라고.
-정신을 차려보니 잊어버렸다. 뭔가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야.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 모래 한 움큼을 손에 쥐고 있다 어느 순간 펴보니 아무것도 없던 것과 같았다.
그 순간, 사그락거리는 모래의 소리가 타낙한의 귀에 들렸다.
-잊는다는 건 그런 거다.
“……저도 언젠가 이화를 잊을 수 있을까요.”
-글쎄. 안타깝게도 인간의 수명은 찰나나 다름없지. 네 마음이 노을보다 짙다면 아마 잊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너를 찾을 것이다.
타낙한은 쓰게 웃으며 빈 잔을 다시 채웠다. 노을? 제 마음은 피보다 짙은 색이었다.
* * *
둥. 둥. 아침부터 북소리가 울렸다. 도열한 군세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 멈춘 그들의 수는 도합 육 만. 말에 오른 타낙한은 굳은 눈으로 위금성을 응시했다. 저 빌어먹을 방벽은 여전히 단단하고 굳건했다.
타낙한 옆에는 인간형의 현무가 서 있었다. 그는 수정에서 깨어난 이후, 한 번도 본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건 뭡니까.”
지금은 흑의 무복에 복면까지 썼다. 현무가 아니라 그림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무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긴 아무려면 어떠랴. 타낙한에겐 그가 현무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백호를 상대할 감춰진 비장의 패.
‘나는 그림자다.’
가진바 힘과 이능을 물었을 때, 현무는 그렇게 답했다.
‘다른 세 신수들처럼 초자연적인 힘은 없지만, 나는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고 또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타낙한은 그가 백호의 목을 노릴 비수가 될 걸 확신했다.
같은 시각. 위금성의 성벽 위에도 병사가 도열해 있었다. 그들에게선 여태 없던 비장함이 엿보였다. 이화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온다.”
효시가 하늘을 갈랐다. 훗날 ‘위금의 지변’으로 기록될 전투의 개전(開戰)이었다.
* * *
와아아아! 함성이 들판을 집어삼켰다. 무장한 병사들이 벌건 눈으로 달려들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쇠약해진 몸을 광기로 움직였다. 끓는 기름과 돌이 성벽 위에서 쏟아졌다.
위금성의 병사들 또한 이것이 마지막 전투임을 알고 있었다. 오늘 해가 지면 5년을 이어온 전쟁이 마무리될 터다.
무수한 피와 죽음이 만들어졌다. 어느 쪽도 물러나지 않았고 기세는 비등했다.
쿠르릉. 위금성 위쪽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겨울 날씨에 폭우가 내렸다. 털을 잔뜩 부풀린 이화가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 것은 그 직후였다. 쿠구구. 그가 뛰어내린 자리가 분지처럼 푹 패었다.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물결이 일듯 땅의 파도가 일었다.
“으아악!”
“어어억!”
수만의 병사가 넘어지고 수천의 병사가 뒤엎어진 땅에 휘말렸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성문이 열리고, 쏟아져 나온 금국군이 지한국군을 덮쳤다. 땅에 발과 정강이가 묻힌 지한국 병사들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 하고 죽어갔다.
지한국 본진 측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단번에 죽은 자는 운이 좋은 거였다. 다리에 화살을 맞은 금국 병사가 끔찍한 비명과 함께 경기하며 뒤집어졌다. 독이었다.
금국 병사들은 이를 악물며 병장기를 휘둘렀다. 외려 주춤한 건 지한국 병사들이었다. 성문을 중심으로 쏟아진 화살비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살에 맞아 쓰러진 자 중엔 지한국 병사도 있었다. 금군을 이끌던 위중혁이 욕설을 뱉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도를 넘는군.”
동감이었다.
두 번째 화살비가 쏟아졌다. 이번엔 늦지 않게 발을 굴러 토벽을 만들어냈다. 해일처럼 높게 솟은 벽은 화살을 막아주었으나 아군의 전진도 함께 막았다.
“일단 한 번 돌아간다.”
몽휼과 위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이끌고 나온 병사들에게 후퇴를 지시했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몸을 물렸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건 두 사람을 위시한 금군이었다.
“너희도 들어가라. 나는 이대로 전장을 가로질러 타낙한을 치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모른다.”
이화는 솔직하게 답했다. 이미 오랫동안 봉인 상태인 사월린과 봉인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화. 결국 둘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한지는 직접 부딪히기 전까진 단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