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3화
태백이 제 허릿대를 풀었다. 손에 쥐고 기운을 불어넣자 흐물거리던 천이 빳빳하게 서며 검기를 머금은 검이 됐다. 그는 망설임 없이 사월린의 우리를 잘랐다. 소리 없이 잘린 창살은 깨지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태백이 등을 돌려 앉았다.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태화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그 등에 업혔다.
원급 무사가 마음먹고 움직이자 그 흔적을 눈으로 좇을 자가 없었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지한국 진지를 빠져나왔다.
“우선은 남방으로 가자. 그곳이라면 타낙한도 그리 쉽게 뒤를 쫓지 못할 것이다.”
태화는 대답 대신 바람처럼 달리는 태백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십 년 전의 그날과 같았다.
* * *
“빌어먹을!”
와장창!
탁자 위에 있던 집기가 바닥에 쏟아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타낙한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그가 거친 숨을 쏟아냈다. 발치에는 피가 흥건했다. 보고했던 그림자의 피였다. 그는 타낙한의 칼에 맞아 실려 나갔다.
“당장 추적대를 보내!”
그림자들이 읍하고 사라졌다. 타낙한이 흐트러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도 안다. 추적한들 성과는 없을 것이라고. 상대는 원급 무사다. 천천히 흔적을 모아 뒤따른다면 언제고 다다르겠지만, 그게 근 시일 내는 아닐 것이다.
일 만의 지원군이 다 소용없게 생겼다. 개미가 아무리 많이 모여도 개미일 뿐이다.
타낙한의 계획은 단순했다. 불완전한 사월린에 인간이지만 원급인 태백을 더해 백호를 온전히 묶어둔다. 그럼 나머지는 평범한 군세의 싸움. 위금성이 함락되면 황제를 인질로 백호를 휘두른다.
그런데 모든 것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던 바로 이 시점에서 태백이 사라졌다.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너답지 않은 실책이구나. 아주 제대로 당했어.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그 입 다무시죠.”
태화의 밀고에 들떴던 과거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그래. 그는 밀고 자체를 함정으로 쓸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새로운 족쇄가 생겼다며 기뻐했었지. 멍청한 것. 어리석은 것!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하는 수 없지요.”
타낙한은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하얗게 질린 병사들에게 제 막사를 정리하라 지시한 후 밖으로 나왔다.
그의 시선이 언덕 아래 분지의 위금성을 향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지긋지긋하게 보아온 풍경이었으며, 일말의 변화조차 없는 모습. 앞으로 천년만년 이 상태일 것이다, 그리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타낙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다시 솟구치는 분노에 정수리로 열이 오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뻐해라. 아무래도 운명은 네 편인가 보구나.
“예?”
“전하!”
미구르였다. 오랜만이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타낙한은 미구르를 어디 붙여놨었는지 떠올렸다. 그의 안색이 일변한 것과 미구르의 입이 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수정에! 수정에 금이 갔습니다!”
새로운 신수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 * *
하늘은 제 손을 들어주었다. 타낙한은 신수의 탄생을 지켜보는 이 순간에 그를 확신했다.
‘그것’은 타낙한이 당도한 시점에 일어났다. 수정의 한중간이 퍽 하고 터졌다. 무수한 조각이 바닥에 쏟아졌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흑피의 신이 조각 위로 내려앉았다.
바작. 사내는 두 발로 서서 제 양손을 내려다봤다. 현무의 외견은 평범했다. 아니, 평범하다 하기엔 미목수려하고 풍채도 단단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백호와 같은 기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으로 현신한 모습이라 그러한가.’
-글쎄. 그렇다고 하기엔 영 기운이 약하다.
이거 뭔가 이상하군. 사월린의 중얼거림에 타낙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나 완벽하게 잘 풀리는 일이 없었다. 해도 눈앞의 이 신수가 새로운 희망이자 유일한 변수임은 변함없는 사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 땅의 지고한 기둥 중 하나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지한국의 왕, 타낙한이라 합니다.”
신수가 고개를 들었다. 심연처럼 새까만 눈이 타낙한을 응시했다. 마치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타낙한이 주춤했다. 그러나 이쪽도 사월린을 품은 몸.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말을 걸었다.
“당신이 누구신지 아시겠습니까.”
신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말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대신 주변을 돌아봤다. 막사를 꼼꼼히 살피곤 그대로 발길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타낙한은 차마 막지 못하고 초조하게 신수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온 신수는 지한국 진지를 돌아다니다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언덕의 능선. 저 멀리 위금성이 보이는 자리였다. 위금성을 보던 신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수님?”
“…….”
타낙한을 돌아본 신수가 떨어진 나뭇가지를 쥐었다. 그걸로 흙바닥에 글자를 써 내려가다 말고 멈칫하여 몸을 일으켰다.
신수가 손을 들어 제 목을 잡았다. 음. 흠. 목을 울려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곤 입을 벌렸다. 아- 하는 소리가 났다. 그가 흠칫하여 중얼거렸다.
“그렇군.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건가.”
어딘가 어눌한 말투였다. 타낙한의 불안이 정점에 달했을 때, 이상한 행동만 하던 신수가 드디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타낙한이라 했지.”
겨우 대화의 장이 열렸다. 타낙한은 약간 안도하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연 대륙력으로 지금이 몇 년이냐.”
“예?”
타낙한이 되물었다. 신수는 방금 했던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다시 읊었다.
“연 대륙력으로 지금이 몇 년이냐.”
“452년입니다.”
“5년인가.”
타낙한도, 그와 연결된 사월린도 그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러나 무엇이 5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는 지한국의 왕이라 했지. 그럼 이곳은 지한국인가?”
“아니요. 금국의 땅입니다. 현재 금국과 지한국은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침략자는 너희 쪽인가.”
“……예.”
머뭇거리며 답한 타낙한이 잔뜩 긴장하여 신수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신수는 ‘감히 쓸데없이 전쟁 따위를 벌이다니’라고 하는 대신 엉뚱한 걸 물었다.
“현 금국 황제는 누구지?”
“예?”
“꼭 두 번 말하게 하는 게 지한국의 예법이던가?”
“아니. 아닙니다. 그는 건룡제입니다.”
신수가 웃었다. 그 모습에서 타낙한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후로도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현재 전황은 어떤지. 대륙의 정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타낙한은 그런 신수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다. 음독하여 사경을 헤매다 보름 만에 눈을 떴던 지한국의 재상이 딱 저러했다.
기묘한 느낌의 정체가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사월린이 이르길, 본래 태어나는 신수들은 어느 정도 지성을 가지고 있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수’로서의 자아와 기억의 계승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갓 태어난 신수들은 천명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에 가까웠다.
“그럼 너는 다 잡은 고기를 백호에게 빼앗긴 격이군.”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한데 눈앞의 신수는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질문을 했다. 또한 그 목적이 있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
“좋아. 협력하지.”
“예?”
“이제 알겠다. 되묻는 건 네 습관이군.”
“그,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어쨌든 네게 협력하여 백호를 견제해 주마.”
타낙한은 믿을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수가 있나. 제발 도와달라 엎드려 빈 것도 아닌데 신수가 자진하여 저를 돕겠다니. 타낙한은 급격히 차분해졌다. 그가 생각하는 진리는 하나다.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대가 없는 호의 역시 없다.
“실례가 아니라면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금국 황제에게 악감정이 있다. 이거면 대답이 되겠나.”
이제 막 태어난 신수가 금국 황제에게 어떻게 감정이 있을 수 있나? 혼란만 가중됐다. 타낙한이 머뭇거리자 사월린이 답답해하며 의견을 냈다.
-믿을 수 있고 없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어찌 됐든 신수의 입을 통해 나온 이상, 저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네 자꾸 잊는데 신수는 망설을 하지 못한다.
“그래, 그 말대로다. 사월린.”
타낙한이 우뚝 굳었다. 그 안의 사월린은 침묵했다.
“나는 너희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저 내가 앙갚음을 할 두 대상 중 하나가 너희와 일치할 뿐이다.”
-둘이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지?
신수는 인간처럼 웃었다.
“상선.”
* * *
건룡제 6년. 2월 초하루. 지한국 지원군 일 만이 당도했다. 예정보다 열흘은 늦어진 일정이었다. 하지만 위금강은 아직 얼어붙어 있었다.
군세가 합류한 후, 지한국의 진지는 병사로 가득 찼다. 새까만 개미 떼 같았다. 성벽의 망루에서 그를 지켜보던 이화가 혀를 찼다.
“작정을 했군.”
감출 만한 군세도 아니었고, 구태여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곧 총공세가 있을 것이라. 타낙한은 온 사방에 그를 알리고 있었다.
‘이건 뭐 저잣거리 왈패도 아니고.’
옆에 있던 몽휼이 근심 어린 낯으로 고했다.
“남방에 인편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제시간에 당도하긴 어려울 듯합니다.”
위수혁. 그는 여율령 사후 흩어진 암묵단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꼬리에 아예 탁 털어버리고 돌아오지도 못하였다.
이화는 암묵단이 부러 위수혁을 잡아둔 것임을 알아차렸다. 소소한 화풀이였다. 그래도 도련님과 깊게 지내던 자의 동생이라고, 성질대로 위수혁을 죽이거나 난도질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변함없는 사람들인지.
그리움이 번짐과 동시에 백호로 눈뜨자마자 보았던, 기억이 없어 알아보지도 못했던 그리운 사람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야.’
당장에라도 산맥의 줄기를 따라 내달리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대신 몽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