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02화
“백호를 만나고 오셨습니까.”
“아니. 이화를 만나고 왔다.”
태화의 낯이 무섭게 굳었다.
“그러십니까. 하지만 전 그분을 셋째 형님이라곤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하더냐.”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너와 논쟁을 하여 이길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내밀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니, 판단은 네가 하려무나.”
불길함이 태화의 발목을 휘감았다.
“이화가 기억을 찾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더구나. 나와 이화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이래도 그를 네 형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느냐.”
“…….”
이화. 백호의 모습을 보고도 와 닿지 않던 그 이름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태화는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태화야.”
“부르지 마십시오.”
목소리 또한 잔뜩 흔들렸다.
“태-”
“부르지 말라 하였습니다!”
당황하긴 태백도 마찬가지였다. 태화를 업어 키운 그로서도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그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종래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기함한 태백이 몸을 들썩였다. 그를 결박한 사슬이 철그렁 소리를 냈다. 이깟 사슬. 끊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리하면 곤란해지는 건 저가 아닌 태화임을, 태백은 경험으로 알았다.
태백이 애먼 가슴을 앓으며 비틀거리는 태화를 불렀다.
“태화야. 태화야!”
“으…….”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태화가 상체를 숙였다. 머릿속이 멍했다. 게 누구 없느냐고 소리치는 태백의 우렁찬 목소리마저 멀게 들렸다.
그때, 누군가 태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타낙한의 그림자 중 하나였다. 그 손을 쳐낸 태화가 비틀거리면서도 홀로 섰다.
“별일 아니니 물러가라.”
“별일이 아니기는! 지금 네 안색이 어떤 줄 아느냐?”
“어째서 멀뚱히 섰느냐! 나는 다 물러가라 하였다.”
그들이 태화와 태백을 번갈아 봤다. 눈치를 살피던 그림자들은 결국 태화를 향해 무슨 일 있거든 부르시라며 물러났다.
막사에는 다시 두 형제만이 남았다. 태화가 창백한 낯으로 새장에 붙어 앉았다. 가만히 무릎을 꿇은 그가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였다.
“형님.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태백은 눈치 없이 그리 묻지 않았다.
“감히 용서받지 못할 제 죄에 대한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태화의 손이며 어깨가 벌벌 떨렸다. 그 죄가 무엇이든 간에 제 상상을 훌쩍 뛰어넘으리란 걸, 태백은 불길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태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평생 감추지 못할 것은 알았지만…… 차마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한 일입니다.”
고해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화 형님이 상단에 팔린 것은 전부 제 탓입니다. 제가 그리 만들었습니다.”
“모르겠다, 태화야. 난 둔자라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화 형이 자개함에 담겨 팔려 가는 걸 몰래 따라가서 다 보았다 하였지요. 거짓말이었습니다. 전 보지 못했어요. 그저 알았을 뿐이죠. 형이 어디에 숨겨져 팔려 갈지.”
깊은 곳에 묻어둔 검은 상자가 들썩였다. 태백도 모르고 이화도 모르는, 오직 태화만이 아는 대죄가 담긴 상자였다.
“형님. 제가 이화 형님을 팔았습니다.”
유리가 깨지듯 태화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부서졌다. 먼지처럼 사그라든 세상 너머엔 국경 지대의 깡촌이 있었다.
그때의 태화는 열 살이었다. 몸은 뼈에 가죽만 얹은 듯했고 배는 올챙이처럼 튀어나왔다. 그런 몸으로도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땔감을 주우러 나선 참이었다.
가까운 곳은 이미 민둥산이라, 별수 없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가다 보니 옆 마을이었다. 태화는 거기서 번드르르한 옷차림의 상단주와 마주쳤다. 그는 태화에게서 어떤 ‘자질’을 보았다. 감히 아이를 통해 발견해선 안 될, 더럽고 추악한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영민한 태화는 바로 알아차렸다.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음. 길바닥 돌멩이치곤 나쁘지 않군.’
‘하면 이대로 업어 갈까요?’
‘납치는 도리를 모르는 무뢰한들이나 하는 것이다. 나처럼 돈 있고 기품도 있는 자가 할 만한 짓이 아니야. 값을 치르고 정당히 데려오면 되는 것 아닌가.’
‘어유, 그러믄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마침 딱 아이 하나 숨길 자리가 남아. 자개함이 비었거든. 그것도 팔 물건이지만 기왕 옮기는 거 뭐든 채워 넣는 편이 좋겠지. 어디 보자. 아이야, 네 집이 어디더냐.’
태화는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았다. 제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이는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집은 소우골입니다.’
‘저 옆 마을이구나. 그럼 부모, 형제는?’
‘아버지와 두 형이 있습니다. 본래는 저까지 오 형제였는데 대기근이 시작되고 둘이 죽었습니다.’
‘흠. 보기보다 똘똘하군. 그게 과연 네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겠다만.’
상단주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태화는 두 사내가 제 앞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상단주는 말했다. 딱 아이 하나 숨길 자리가 남는다고. 결국 그가 데려갈 수 있는 아이는 하나뿐이라는 뜻이었다.
태화는 미끼를 드리웠다.
‘첫째 형은 멀리 일을 나가 집에 없습니다. 셋째 형은 머리와 눈이 이상하여 저처럼 땔감을 줍거나 나무껍질을 벗기러 다닙니다.’
‘음? 머리와 눈이 이상하다니. 어떻게 이상하단 말이냐?’
‘당연히 가져야 할 먹색 대신, 기이한 색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호오. 기이한 색이라.’
상인이 뱀처럼 웃었다.
그땐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죄악감도 부재했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욕망뿐이었다. 태화는 그렇게 제 형을 밀고했고, 운명은 바뀌었다.
태화는 바닥을 향해 숙인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이화가 백호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가 느낀 것은 반가움도 경악도 아닌, 두려움이었다. 혹 팔린 그가 상인에게서 뭔가 들은 것은 아닐까. 자신의 밀고를 알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다 전생의 기억이 없음을 알았을 땐 부끄러운 안도를 하였다.
“경멸하십니까. 아니면 이따위 짐승을 지금껏 동생이라고 돌봐왔다며 후회하고 계십니까.”
태백은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칼날보다 무겁고 시렸다. 태화의 몸이 부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다. 각오도 했다. 지금껏 머릿속으로 수천수만 번 그린 결말이었다.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 경멸스럽구나.”
태화의 고개가 확 들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새카맣게 가라앉은 태백의 눈이었다. 여태 없던 단호함으로 중무장한 눈. 마치 타인을 보듯 얼어붙은 시선이 태화를 찔렀다.
일순 숨이 멎었다. 귓가로 이명이 울렸다. 손가락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태화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그를 지옥으로 끌어 내렸던 태백은, 다시 말 한마디로 그를 건져 올렸다.
“네가 인륜을 저버린 짐승이래도 여전히 내 동생이지.”
“…….”
태백은 태화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정당화하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았다. 애당초 용서는 자신의 권한이 아니었다.
“지금의 수치와 참담함을 기억해 둬라. 그리고 이화를 다시 만나거든 지금의 심경 그대로 사죄하거라.”
태화의 고개가 다시 땅을 향했으나 태백은 알았다. 그 아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용서해 줄 것이란 걸. 아니, 외려 잘했다고 할지 모른다.
태백이 기억하는 이화는 그런 아이였다. 조용하고 어른스러우며 제 몫을 동생들에게 양보할 줄 아는 아이. 그 상냥한 성품에 대해 칭찬하면, 형이 나를 보살피는 게 당연한 것처럼 나도 내 동생들을 챙기는 게 당연하다 웃었다.
그리도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제 아비는 고작 머리색이 이상하다며 저어하였다. 워낙 소심한 자라 대놓고 학대하진 않았지만 없는 사람처럼 굴곤 했다. 그래서 어머니도 저도 유독 이화를 예뻐했다. 영원히 눈에 밟힐 아이. 눈 감으면 눈꺼풀에 그 아이가 아른거렸다.
“이화가 그러더구나. 너와 대화를 해보라고.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오해가 생기며, 어림짐작만으로 서로를 이해하려 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태백은 그러니 대답해 보라 했다.
“네 혹 권력과 부귀영화가 좋아 타낙한의 옆에 있는 것이더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형님은 저희가 어쩌다 예 붙들렸는지 잊으셨습니까?”
“그래. 방금 그 한마디로 하나의 오해가 풀렸구나.”
“…….”
“그럼 이대로 훌훌 떠나도 아무 문제 없겠지.”
“지한국은 연 대륙의 패자가 됐습니다. 어디로 도망치든 타낙한의 추적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럼 이화에게 가자.”
이젠 곤란할 것이 없다. 사슬에 결박되어 웅크리고 있던 태백이 몸을 일으켰다. 작정하고 힘을 주자 사슬들이 썩은 나무처럼 끊어졌다.
“내 같이 가주마.”
같이 잘못했다 빌자꾸나.
신체의 자유를 되찾은 그가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태화의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막냇동생을 응시했다. 황제와 신료들 사이에서 제 의견을 피력하던 군사는 사라지고, 제 형을 찾던 아이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이화가 어른스러운 아이였다면 태화는 이미 어른인 아이였다. 넘어져도 울지 않고 상처부터 살피던 아이. 그런 아이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고 있었다.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죄를 청하는 것이 네 할 도리다.”
“감히, 감히 그분의 낯을 볼 자신이 없습니다.”
“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될 때까지 함께 기다려 주마.”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태화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