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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9화 (99/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9화

“저 역시 원하는 바이나 그는 어렵습니다. 제가 바다를 비우면 사월린보다 바다가 먼저 대륙을 집어삼킬 겁니다.”

이미 수천 년이 흘러 어린 용은 온전한 성체가 되었다. 하지만 바다는 너무나 크고 강대하여 아직도 그에게 온전히 저를 내주지 않았다.

“저는 이제부터 다시 잠들 겁니다. 드넓은 바다를 감당하려면 의식이 있는 채론 아직도 조금 버거워서 말입니다. 아주 잠깐 이리 나왔을 뿐인데, 먼바다는 벌써 들썩이고 있군요.”

그런 주제에 독점욕과 질투심은 심했다.

뭐 그딴 게 다 있어. 묵묵한 땅만 아는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진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손이 세 번째 호리병을 잡았다.

문득, 그가 이리 급하게 술을 붓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른 돌아가 봐야 하는데 바닷속에선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예서 다 마시고 돌아가려는 거다. 물론 정말 그런 건지 차마 물어 확인할 수는 없었다.

벌컥벌컥. 독한 술을 물처럼 마신 그가 긴 한숨을 뱉었다.

“전 말입니다. 누가 우는 소리는 질색입니다만 개중에서도 백호의 울음은 특히 싫어합니다. 그 왜, 인간 중엔 어린 시절의 안 좋은 경험이 커서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제 경우 백호의 울음이 그렇습니다. 땅을 울리는 그 소리는 가장 싫어하는 기억을 되새기게 합니다.”

쩌적. 진해가 쥔 술병에 금이 갔다. 잘게 부스러진 사기 조각이 반상 위로 떨어졌다.

“사월린의 손에 심장이 꿰뚫리고도, 외려 본인을 죽인 사월린이 안타까워 울던 천태백호의 모습을 말이죠.”

흐트러진 하얀 조각들은 꼭 눈물 같았다. 진해는 담담하게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너무나 오래되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빛바랜 기억으로만 남은 이야기였다.

“우리 셋은 한날한시에 신수가 되었으나 분명한 서열이 존재했습니다. 서열이라고 할까, 정확히는 위계였죠.”

“…….”

“전 지금의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신수치곤 어린 나이였고 사월린 역시 젊은 축에 속했는지라, 자연스레 천태백호가 우리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저와 사월린은 그를 따르며 많은 것을 의지했죠.”

손을 털어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광실을 가로질러 창 앞에 섰다.

“이리 말하는 건 우스울지 모르나, 천태백호는 우리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닫혀 있던 격자창이 저절로 열렸다. 진해가 나를 돌아봤다. 그의 목덜미에서 비늘이 돋아나며 눈동자가 세로로 쭉 찢어졌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거대한 힘과 고결한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야말로 진정한 신수였다.

“부디 울지 마십시오.”

새카만 용이 창문을 넘어 하늘로 승천했다. 쿠르릉. 그가 지난 자리마다 구름이 부딪히며 천둥을 만들어냈다. 구름 사이로 긴 몸통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멀어졌다.

* * *

며칠이라던 진해의 말과 달리 무륜은 열흘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날은 이제 달을 넘겨 어느덧 2월이었다.

위금성의 분위기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쉬쉬한들 새어 나갈 것들은 새어나가게 마련이다. 무륜의 용태는 발도 없이 퍼져 나가며 와전되고 왜곡됐다. 당장 오늘내일한다는 유언비어를 막기 위해선 사실을 인정하고 술렁이는 민심을 다독여야 했다.

몽휼은 나를 십분 활용했다. 황제가 쓰러진 건 과로에 의한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금방 회복하실 것이다. 그동안은 백호님께서 우리를 굽어살펴 이끌어주실 것이다. 이분이 예 계신 것을 보아라. 하늘과 상선의 뜻이 우리에게 있다.

그걸로 당장은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안은 장기에 똬리를 튼 병마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깊고 넓게 퍼져 있었다. 폐하께서 어서 깨어나 주시지 않으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수심에 찬 몽휼이 말했다.

그사이, 위금성을 향한 공세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엔 타낙한도 태화도 없이 태백만이 전장에 나타났다. 그를 앞세워 성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지한국군은 내가 땅을 뒤집자 미련 없이 물러났다. 후퇴하는 태백의 시선이 성벽 위에 선 내게 닿았다. 멀리서도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 번째는 드디어 타낙한이 등장했다. 분칠로 가렸으나 초췌한 안색이 선명했다. 사월린이 빙의해 날뛴 후유증이 남은 것이다. 타낙한만이 아니었다. 긴 겨울, 지리멸렬한 전투로 지친 것은 지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시래기처럼 시들거리다 별 성과 없이 퇴각했다.

그 후, 지한국의 본국에서 지원군을 꾸려 보낸다는 소식이 위금성까지 흘러들어 왔다. 지한국은 딱히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그마치 일 만에 달하는 군세라 했다.

“물량으로 단숨에 밀어붙일 셈이군.”

“여기만 점령하면 금국을 점령하는 것이라 생각한 거겠죠. 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 여기가 저희의 무덤이고, 배수의 진입니다.”

“그러냐. 그러면 나도 그리하겠다.”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도망칠 곳을 남겨두려다 무륜을 죽일 뻔했다. 뼈아픈 실책은 한 번으로 족했다. 나는 스스로 절벽 끝에 섰다.

“저들을 전부 땅에 묻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무륜을 지킬 것이다.”

몽휼의 어깨가 흠칫했다. 반면 위중혁은 담담하였다. 다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 면을 응시할 따름이다.

그들에게 무륜이 저리된 것이 다 내 탓임을 설명한 직후, 위중혁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몽휼이 기함하여 말리지 않았으면 그는 필시 내게 달려들었을 터였다.

나는 그에게서 무륜과 비슷한 기척을 느꼈다. ‘이화’를, 내 과거를 향한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지한국 진지에서와 달리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제고 밝히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무륜이 눈을 뜨고, 지금의 상황을 타파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후에야 말이라도 꺼낼 수 있으리라.

몽휼은 예서 날 해하면 자신들이 필패한다 위중혁을 설득했다. 필패는 곧 무륜의 죽음을 뜻했다. 위중혁이 이를 까드득 갈며 검을 갈무리했다.

위금성의 현 상황은 가히 좋지 못했다. 백성과 병사들은 긴장과 불안에 시달리며 나날이 쇠약해졌고, 걱정하던 식량난도 목전에 두었다.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버틴 것이 용하다.’

전부 무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람들은 백호인 나보다 나를 데려온 무륜을 더 믿고 의지했다. 그런 무륜이 혼수상태인 지금이야말로 금국 입장에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신수는 망설은 하지 않는다 하셨지요. 부디 실망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예서 더 실망할 구석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중혁!”

몽휼의 으름에도 위중혁은 대답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가 내 과거에 가지는 미련의 크기가 곧 지금의 내게 갖는 적대감의 크기였다. 손가락을 서로 얽었다. 위중혁을 마주할 때면 무륜과는 다른 의미로 심경이 복잡했다.

“몽휼.”

“어, 예. 백호님.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저 녀석이 폐하에 대한 충심이 깊어서-”

“무륜과 위중혁이 같은 사람을 연모하였나?”

“…….”

몽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곧 대답이었다.

* * *

어둑한 밤. 천개가 드리운 침상 머리맡에 우두커니 앉아 자리를 지켰다. 처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위사들은 문밖을 지켰고, 밀영군은 손이 모자라 지원을 갔다.

나는 창백한 낯의 무륜을 보았다. 그저 하염없이 보기만 하였다. 몇 번을 망설이다 그의 손을 쥐었다. 거기서 다시 수차례 머뭇거리곤 그 손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속이 울컥하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인간을 살려주면 그만 우실 겝니까.’

진해의 말이 떠올랐다. 외려 더 울 것 같아졌다.

“무륜.”

불러도 답이 없다. 그가 쓰러진 이후 여태 그래 왔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미간을 꿈틀한 그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귀를 그의 입가에 바싹 들이댔다.

“……화.”

신음 속에 말이 섞였다.

“이화…….”

이화야, 네 어디 있느냐. 어딜 갔길래 여태 안 오느냐. 보고 싶다. 보고 싶구나.

조각난 말들이 심장을 찔렀다. 동시에 몸이 아래로 푹 꺼지며 세상이 희게 변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갑자기 당한 일에 당황하여 눈만 깜박이는 사이, 나는 어느 내원의 한구석에 서 있었다. 딱 봐도 버려진 내원이었다.

담벼락에는 말라비틀어진 담쟁이가 가득했고 기와 장식 또한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계절은 봄인지 사방에 푸릇한 새 생명이 움을 틔웠으나, 그 대부분이 잡초와 웃자란 정원수였다.

손을 들어 심장께를 짚었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일진대 묘하게 심을 울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무의식이 알려주었다. 무의식? 아니다. 그는 내 혼의 저변에 묻혀 있던 어떤 기억이었다.

뇌리가 찢기고 조각났다. 부서진 파편은 섞이고 뒤집혔다. 힘을 얻은 그것들이 곧 아귀처럼 무수한 손을 뻗었다. 밤을 찢고 나오는 여명처럼 그것들은 백호의 이성과 자아를 헤집고 밖으로 나왔다.

‘하하, 네 말이 맞다. 내 너를 좋아한다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그를 어찌 잊으리까.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겨 봅니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하냐? 하면 다시 말해주마. 내 너를 연모하고 있단다.’

그 옛날. 가만하던 내 마음에 그가 던진 것이 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건 씨앗이었다. 발아한 씨앗은 순식간에 자라 아름드리 거목이 되었다.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한곳을 향해 가지를 뻗었다.

‘어떠냐. 지금 이 순간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으냐?’

‘……예.’

‘하하. 그럼 앞으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오거든 내게 말하거라. 그때마다 연모한다 해주마.’

‘진정이십니까.’

‘하면. 내 네게 망설을 할까.’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모든 순간이 그러한 까닭이다. 무륜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해일처럼 솟구친 기억은 공허하게 비어 있던 자리를 꽉 채웠다.

비틀거리며 발을 뗐다. 한 걸음. 두 걸음. 빨라진 걸음은 이내 뜀박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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