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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8화 (98/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8화

문가에 선 건 창백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검은색과 검붉은 색이 어우러진 장포를 겹겹이 입고 허리에는 문양이 수놓아진 대를 맺다.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의복 양식이었다. 새카만 머리칼은 바닥에 닿을 만큼 길었다. 그걸 질질 끌며 다가온 사내가 한숨을 폭 쉬었다.

“그 인간을 살려주면 그만 우실 겝니까.”

세로로 쭉 찢어진 눈이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홀린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해.”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흑룡이었다.

“예. 흑룡인 진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개를 까닥인 그가 내 옆에 앉았다. 넓고 긴 소매에서 하얀 손이 튀어나왔다. 진해는 무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제야 백호의 기억에서 진해의 능력을 떠올렸다.

세 신수는 각각 날씨, 땅, 바다를 다스리는 힘 외에도 고유의 이능을 가지고 있다. 백호는 영물의 통솔권을. 사월린은 심안과 염력을. 그리고 진해는…….

“아슬아슬했군요. 하지만 숨만 붙어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재생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스슥. 그의 손바닥에서 하얀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을 되돌리듯 무륜의 상처가 아물어갔다. 피가 멎고 터진 자리에 새살이 돋았다. 곧 외상이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내상도 마찬가지였다. 뒤틀렸던 기혈이 가라앉고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확실하게 잡히는 맥을 확인하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흐느적거리며 뒤로 넘어가려는 내 몸을 진해가 받쳤다.

“감사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 어린 말이었다. 나처럼 어리고 미숙하지 않으며, 사월린처럼 봉인된 반쪽짜리도 아닌, 무르익은 신수의 힘은 그야말로 위대했다.

“사소한 일입니다. 나야말로 울음을 그쳐줘서 참으로 고맙군요.”

약한 비아냥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어투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재차 그의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진정, 감사합니다.”

멈칫한 진해가 나를 빤히 봤다.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을 쉬더니 결국 무언가 해탈하곤 마주 고개를 숙였다.

“……별것 아닙니다. 외려 제가 말이 심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악몽과 함께 깨어난 터라 예민해서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더 무례해도 됩니다. 모욕하고 매도해도 듣겠습니다. 무륜을 살려주셔서-”

“됐습니다.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중한 것과 별개로 칼 같은 구석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그렇게 무 자르듯 내 말을 자른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당장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내상과 외상 모두 거의 완벽하게 수복되었습니다만, 며칠은 눈을 뜨지 못할 겁니다. 소실된 피와 기력은 직접 회복해야 하니까요. 깨어나면 미음을 먹이고 후엔 고기를 잘게 다져 먹이세요.”

“신룡의 은혜에 감읍하나이다.”

내내 표정이 굳어 있던 몽휼이 울먹이며 말했다. 진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예까지 온 게 내 우는 소리 때문이라 하였지. 눈치 빠른 몽휼이 헉하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안도와 설움이 한데 복받치는지 어깨가 연신 들썩였다.

“어디 따로 분리된 공간이 있습니까.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진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측근들이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옮겨지는 무륜을 보다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으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예서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앞장서 집무실을 벗어나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몽휼과 위중혁이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진해를 보내고 나면 설명하고 사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장의 상황은 정리되었으되, 끝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를 내 광실로 안내했다. 납치되어 있던 중에도 매일 정리했는지 내부가 깔끔했다.

곧 간단한 안주상이 차려졌다. 진해는 의외로 술을 좋아했던지 이걸 누구 코에 붙이냐며 아예 동이째로 가져오라 하였다. 당황한 시비가 보랑을 종종걸음 놓아 멀어졌다.

“내 소개는 하였는데, 당신의 소개는 아직이군요.”

그제야 경황이 없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백호인 이화라 합…….”

따라주던 술이 멈췄다. 내 경황이 없긴 한가 보다. 제 이름까지 헷갈리다니. 진해는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하다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용은 특별합니다.”

“……예?”

“모든 용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수로 납니다.”

“예? 어, 그야 뭐…….”

신수가 태어나는 방법은 두 종류다. 하나는 영물이 긴 세월 힘과 내력을 쌓아 격을 높이는 것. 다른 하나는 날 때부터 신수로 나는 것이다. 그는 같은 목(目)에 속해 있어도 마찬가지다.

당장 나와 천태백호가 그렇다. 천태백호는 호랑이로 태어나 영물이 되고, 거기서 다시 한번 격을 높여 신수가 되었다. 반면 나는 수정에 잉태되어 신수로 태어났다. 다시 말해, 같은 호랑이 신수라도 그 탄생이나 성장 과정은 다를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용은 다르다. 모든 용은 날 때부터 신수다. 다 크면 자연스레 격이 높아져 신선이 됐다. 다른 신수들처럼 죽어야 비로소 신선이 되는 게 아닌지라 당연히 ‘신’으로 한 번 더 격상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선계의 귀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설화에선 경주를 통해 가장 먼저 도착한 세 영물을 신수로 격상시켰다 했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경주했어도 진해는 비석에 닿기 전에 이미 신수였을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이지요.”

진해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찬연한 오색의 구슬이 손바닥 가운데서 빛나고 있었다.

입을 떡 벌렸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려 ‘격’ 하나를 높일 수 있는 보주이자 용의 두 번째 심장.

“여의주가 아닙니까.”

여의주였다. 저것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어 용이 됐다는 설화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그걸 토끼 간 꺼내 보이듯 내보인다고?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반면 진해는 태연했다.

“용이 용으로 존재하는 데 필요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혼, 육신, 여의주입니다.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그건 온전한 용이라 부를 수 없지요.”

진해가 주먹을 꽉 쥐었다 펴자 여의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만약 여의주가 없다면 저는 무엇이리라 생각하십니까?”

그 말뜻을 곱씹어보고 창백해졌다. 여의주가 없는 용. 그건 더 이상 용이라 부를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답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일단 용은 아니겠지요.”

“…….”

“하지만 여전히 ‘진해’일 겁니다.”

그가 들고 있던 술잔을 비웠다. 탁. 반상에 내려놓은 술잔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혼과 육신이 마저 없어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존재’라는 건 그런 거니까. 하면 당신은 어떠십니까.”

나는 비로소 진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선문답을 즐기는 건 상선뿐인 줄 알았더니. 오래 산 이는 다 이런 모양이다.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 상선이 붙여준 내 이름은 백목련이었다. 여태 아무 문제 없이 그 이름으로 삼 년을 살았다. 하지만 눈앞의 흑룡은 그걸 ‘문제’로 만들었다.

“저는 이화라 합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 그것도 신수가 입에 담은 말에는 세계도 눈을 돌린다. 인간과 백호 사이를 오가던 마음의 추가 인간 쪽으로 좀 더 옮겨 갔다. 이러다 정말 신수의 몸에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월린과 같은 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거면 됐습니다.”

진해는 꼭 상선처럼 말했다. 잔잔하던 수면에 돌을 던진 주제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재차 술을 털어 마셨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술잔만 비웠다.

“그 인간이 누군지 모르지만, 안에 당신의 힘이 들었더군요.”

정적을 깬 첫마디는 굉장히 껄끄러운 화제였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겠습니다. 당신의 어리석음을 비난할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을 알려주려 할 따름입니다.”

“무륜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까?”

“글쎄요. 문제라면 문제겠죠.”

답답한 건 작은 술잔이었을까. 아니면 이 상황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진해가 대뜸 호리병의 목을 잡더니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당신이 그에게 건넨 힘. 그게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탕. 안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병은 멀끔히 빈 채 반상 위에 올랐다.

“그럼 언제든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겁니까.”

“아니요. 이미 한 번 길을 튼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제 당신이 힘을 쓴대도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인간에게서 남은 힘을 강제로 뽑아내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는데, 그런 짓은 안 할 거 아니야. 진해가 표정으로만 말했다. 나 역시 침묵으로 동의했다.

“제가 염려하는 건 인간이 아닌 당신 쪽입니다. 그 인간이 깨어나 자의로 힘을 돌려주기 전까지 당신은 반쪽짜립니다. 힘의 반절을 봉인당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즉 힘을 쓰긴 쓰되, 이전과 같은 위력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거라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이 상황에서 말입니까.”

심해에서 잠만 잤을 신수가 정세에 훤하기도 하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신수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상황이 어렵다는 것도 안다. 이제 사월린과 내 힘은 거의 비등해졌다. 그럼 단순하게 계산했을 때, 타낙한 쪽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일단 원급 무사도 있지 않은가.

진해가 두 번째 호리병을 집었다. 나는 고심하다 말했다.

“혹, 저희를 도와줄 순 없으십니까. 사월린이 다시 세상에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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