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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7화 (97/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7화

“금국의 영토를 점령하는 와중에도 결계를 부수는 작업은 착실히 진행됐다. 최근엔 결계의 축이 되는 비석을 하나 부쉈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완전한 해방이 머지않았다.”

이화는 전신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사월린이 해방된다.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킬 뻔하고 전대 백호를 죽인 사월린이.

“멸망시킬 생각 없다고 했잖아.”

생각을 읽은 사월린이 한숨을 쉬었다. 본래라면 불가능하지만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는 이화와 일시적으로나마 타낙한의 몸을 차지한 사월린이 만나 불가능이 불식됐다.

“믿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을 멸망시켜 어쩔 것이냐.”

이건 제법 그럴듯했다. 이화가 주춤하자 의자에서 일어난 사월린이 다가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얼음을 통과해 새장 안쪽에 들어섰다. 그러곤 침상에서 굳은 이화를 내려다봤다. 얼어붙은 사월린의 심장을 유일하게 쥐고 흔드는 얼굴이었다.

어찌 이리 닮았을까.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 생각하면 꼭 상선의 이름이 뒤따랐다.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그라면, 일부러 이자를 안배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필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널 온전히 이해하는 자다. 신수로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역사가 증빙한 말이 이화의 가슴을 찔렀다. 움트는 동질감을 억누르는 게 최선이었다. 사월린은 그런 이화의 속내마저 꿰뚫어 봤다.

“네가 원하는 건 금국 황제의 안녕과 행복이지. 그를 보장해 주마.”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낙한을 설득해 전쟁은 여기서 멈추도록 하겠다. 대신 국경은 이곳 위금성을 기준으로 나뉠 것이며 천태백산의 남은 결계를 부수는 것도 조건에 들어간다.”

“개소리. 어차피 이대로 가면 전쟁에서 이기는 건 금국이다. 지한국이 쌓아온 것들은 곧 모래성처럼 무너질 터. 그딴 불합리한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넌 여기서 죽는다.”

그가 타낙한에게 자신을 죽이자고 제안한 것은 알고 있었다. 인간처럼 ‘신수’라는 위명에 흔들리지 않고, 목적을 혼동하지 않으며, 수단과 방법 또한 가리지 않는 사월린이었기에 생각할 수 있던 방법이었다.

죽음. 다시 말해 소멸. 신수에게도 공평한 인과율을 앞에 두고도 이화의 심은 잠잠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사라진 후, 홀로 남을 무륜이었다. 이화는 저가 진정 무륜에게 매였음을 새삼 실감했다.

“상관없다. 내가 죽으면 외려 내게 남아 있던 힘이 무륜을 찾아가겠지. 이 땅에서 지한국을 밀어내고 금국의 번영을 이룩하기엔 충분한 힘이다.”

“허어. 그게 균형의 수호자인 백호가 할 말인가?

“인간을 사랑하게 된 신수가 할 법한 말이지. 너야말로 타락한 주제에 신수로서의 본분을 말하나? 어불성설이군.”

“…….”

“인간의 수명은 매우 짧지. 그가 죽고 나면 그 힘은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새로운 백호를 탄생시킬 것이다. 사월린. 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북녘땅에 갇힌 채 지한국의 몰락을 그저 지켜보게 되겠지.”

사월린이 하, 하고 비웃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말이겠지.”

입술을 뒤튼 그가 천천히 발을 뒤로 물렸다. 이화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가 본능처럼 침상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뻗어진 손이 창살을 빠져나가 사월린의 옷깃을 스쳤다.

쾅! 가슴이 창살에 부딪혔다. 새장 밖에 선 사월린이 한껏 뻗어진 이화의 손목을 낚아채 움켜쥐었다. 다른 손은 이화의 턱을 잡아 들었다.

“그래, 맞다. 너와 나 사이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사월린이 손에 힘을 주었다. 옥죄어오는 고통에 이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연모하는 자를 잃었나, 그렇지 않나.”

이화의 눈이 놀람과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나와 달라서 내게 동조하지 못하겠다 하였나. 그렇다면 나와 같게 만들면 되겠군.”

“사월린! 무륜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라. 그에게 뭔가 한다면 북쪽 땅을 통째로 날려 버리겠다!”

“네 반응을 보니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구나. 널 죽이는 것보다 더 좋은 수가 있는 것을. 덤으로 세상만사를 다 안다는 듯 판을 짜놓은 상선의 면상에 먹물을 뿌려줄 수도 있고 말이다.”

사월린의 팔이 하얗게 얼어붙으며 피부에 서리가 맺혔다. 힘을 사용할 징조였다. 기함한 이화가 그를 뿌리치려 애썼으나 사월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만둬!”

“그래. 막상 백호로서의 천명을 완전히 버리자니 겁이 났겠지. 그를 피하고자 쓴 편법이었을 것이다. 또 네가 힘을 쓰지만 않으면 안전할 것이라 그리 안이하게 생각했겠고. 음. 이번 일이 좋은 공부가 되겠구나.”

그가 이화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세상에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다.”

안 돼.

사월린에게서 나온 기운이 이화에게 스며들었다. 송곳처럼 파고들어 온 빙설기린의 기세가 불안정한 내부를 헤집었다. 이화는 그제야 사월린이 뭘 하려는지 정확히 알게 됐다. 경악으로 물든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쪼개졌다.

“방심은 화를 부른다. 힘 같은 건 밖에서 강제로 끌어내면 그뿐이야. 넌 몰랐겠지만.”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새장이 산산조각 났다. 새장만이 아니다. 막사 전체가 터져 나가며 거대한 뭉게구름이 일었다. 밖에 섰던 그림자들이 놀라 우왕좌왕했다.

쿠웅! 재차 큰 소리가 나며 먼지구름 속에서 크고 흰 덩어리가 움직였다. 콰직! 거대한 백호의 앞발이 사월린을 후려쳤다. 타낙한의 육신이 울컥 피를 토했다. 그러나 사월린은 웃으며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았다.

“가보지 않아도 되겠나. 지금쯤 네 소중한 인간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텐데. 일각이라도 빨리 가야 마지막 유언이라도 듣지 않겠나.”

사월린을 향해 돌아간 백호의 눈자위가 벌겠다. 핏발이 선 눈으로 이화가 으르렁거렸다.

“사월린. 네 찾는다던 인간은 내 반드시 먼저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주마.”

복수를 위해 인간을 죽이겠다니. 이제 갓 태어난 백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잠깐 굳었던 사월린은 이내 픽 하고 웃었다.

‘그래. 너 역시 타락하여 가는구나.’

타락이 뭐 별거냐. 인간에게 마음을 주고, 인간처럼 변하는 것이 곧 타락이지.

“마음대로 해라. 그도 찾아낼 수 있을 때의 일이니.”

사월린은 끝까지 웃는 낯으로 백호의 속을 긁었다. 백호는 살기를 담아 포효했다. 주변에 섰던 병사들이 풀썩풀썩 기절해 쓰러지고 타낙한의 그림자들도 무릎을 꿇었다.

태백이 현장에 도착하기 직전, 하얀 짐승의 신형이 눈 쌓인 벌판을 가로질렀다. 밤하늘에 가끔 그어지는 빗살처럼 쏘아지더니, 이내 위금성벽을 넘어갔다.

“전하,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음. 설명하자면 길다.”

“예?”

“일단 타낙한을 부탁하마.”

훅. 혼이 빠져나간 듯 쓰러지는 타낙한의 몸을 태백이 받았다. 방금의 말을 복기한 그의 낯이 깨달음과 함께 희게 질렸다. 뒤를 떠넘긴 사고의 주범은 유유히 북녘으로 도망했다.

* * *

알고 있었다. 사월린의 말이 아니더라도 예상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나는 모르지 않았다.

하나, 막상 당도하여 현장을 목도하자 생각이 마비됐다.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전신을 내달렸다. 집무실은 피바다였다. 이게 전부 한 사람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배, 백호님!”

그를 둘러싸고 있던 측근들이 희망의 불씨를 보듯 우르르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무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살아 있다고? 저게 살아 있는 거라고?

내 반응을 확인한 측근들의 낯에 짙은 절망이 드리웠다. 무륜의 상태는 처참했다. 살아 있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아직 숨은 붙어 있다’나 ‘빠르게 죽어가는 중’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반쯤 기다시피 무륜에게 다가갔다. 그의 지척에서 ‘무륜’ 하고 불렀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측근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만 비탄에 찬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주인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 감히 입에 담기도 두려운 말을 털어내려 고개를 휙휙 도리질 쳤다.

급하게 인간으로 현신해 반듯하게 누워 있던 그의 상반신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만 다친 곳을 건드렸다.

이를 악물었다.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온몸이 난자당한 것처럼 터져 나갔다. 안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맥이 빠르게 약해졌다. 피와 함께 그의 생명력도 빠져나갔다. 백호의 이성이 말했다. 더는 방법이 없다고.

“아니야.”

그가 죽는다.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

심장이 아스러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서럽게 울었다. 내장을 다 쏟아낼 듯 오열했다. 내 슬픔에 동조한 땅이 울렸다. 잔잔하고 슬픈 울림이었다.

“죽지 마라. 눈 좀 떠보아. 내가 다 잘못했다. 전부 내 잘못이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네가 이리 누워 있느냐.”

어헝. 어어엉.

피투성이 얼굴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차게 식은 뺨을 매만졌다. 체온이 너무 낮았다. 산 자 같지 않은 온도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무륜. 무륜아. 죽지 마라. 죽으면 안 된다.”

아무리 애원하고 매달려도 죽어가는 자의 숨이 돌아오진 않았다. 머리맡에 선 죽음을 느꼈다. 울음이 짙어졌다. 땅울림도 더 세졌다. 서까래에서 먼지가 투둑투둑 떨어지던 그때, 낯선 인기척이 내 등 뒤에 섰다.

“시끄럽습니다.”

채채챙! 놀란 측근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왔든 무슨 상관인가. 당장 내 품에 죽어가는 무륜이 있는데.

“당신의 울음소리가 심해 밑의 땅까지 울리는 걸 아십니까? 덕분에 도저히 잘 수가 없어 이리 왔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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