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6화 (96/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6화

같은 시각. 태백은 제 막사의 뒤편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불침번을 선 병사들이 굳어서 식은땀을 흘릴 만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가히 패도적이었다. 지금 그의 내심은 몰아치는 폭풍과 같았다.

겨우 다시 만난 줄 알았던 동생은 알고 보니 백호였다. 진짜 동생은 5년 전에 죽었다. 한데 이 백호를 동생이 아니라 말할 수도 없었다. 영물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쉬이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제기랄!”

신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콰앙!

흐트러진 검로가 바닥을 긁었다. 마치 용이 할퀴고 간 자국처럼 땅에 균열이 생겼다. 태백이 검을 팽개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와중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어쨌든 이화가 죽었다는 거다. 그것도 비교적 근래까지 제법 잘 살았다. 그 여율령의 아들이었으니까.

태백은 빈말로도 영민하다 할 수 없으나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다. 그는 타낙한이 과거 지나가는 말처럼 여율령의 죽음에 손을 거들었다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금국의 황실이라고 관여하지 않았을까.

이화는 지한국에서, 타낙한의 곁에서 죽었다. 타낙한은 그에 관해선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어설픈 거짓말은 아예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태백은 어이가 없는 한편 분노가 치솟았다. 그런 태도는 타낙한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화의 죽음에 관여되었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몇 번을 물어도 태백이 납득할 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알 만한 자에게 물어야지. 태백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백호를 데려오던 때를 떠올렸다. 번개가 쉼 없이 내리치는 와중에도 황제는 흙집에서 뛰어나와 이화를 부르짖었다. 그라면 자신이 원하는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무렵, 태화는 진지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 있었다.

갑자기 거대한 막사가 새로 쳐졌다. 그 막사 안에는 작은 막사가 하나 더 있다. 이곳을 지키는 건 타낙한 직속의 그림자들뿐, 일반 병사는 근처에도 올 수 없도록 명이 내려졌다.

그 막사 한중간엔 하얀 새장이 있었다. 사월린이 얼음과 서리로 만든 우리였다. 침상에 모로 누워 있던 사내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새카만 시선이 태화를 향했다.

신수로서의 힘은 쓸 수 없고, 껍데기도 인간의 것을 썼으나, 본질은 백호였다. 순수한 무력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원급 무사인 태백 정도였다. 그렇다고 귀한 인력인 태백을 백호에게 마냥 붙여둘 순 없는 노릇. 그래서 이 새장이 필요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더냐.”

백호, 이화는 가만히 태화를 봤다. 과거에 연이 있는 자를 만나면 다들 어떤 느낌을 주었다. 개중에서도 이 앳된 청년은 특별했다. 무륜과는 다른 의미로 눈에 밟혔다.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궁금한 것이라도 있더냐.”

“아주 많지요.”

의자를 끌어온 청년이 새장 앞에 앉았다. 이화는 새장 안의 침상에 걸터앉았다. 비단 보료가 깔린, 전장에서 보기엔 꽤나 과분한 것이었다.

기실 침상만이 아니었다. 탁자, 의자, 화병, 구절판의 주전부리까지. 내부는 온갖 고급품으로 가득했다. 창살 안쪽의 과분한 살림살이. 이 또한 묘하게 익숙했다. 이화는 그 기시감을 이젠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영혼의 물 잔이 아주 조금씩 차올랐다. 가장자리에서 물이 찰랑거리다 넘치게 되면, 그땐 온전한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 말하려는 거지. 침묵이 유독 길었다. 너무 심각한 표정이라 섣불리 재촉하기도 뭐했다. 초조함을 누르며 태연을 가장했다. 납치되고 벌써 보름이었다. 무륜이 걱정돼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선 될 일도 아니 되는 법.

긴 기다림 끝에 태화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말입니다. 큰형과 셋째 형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와 지었습니다. 첫째부터 넷째 형의 이름은 전부 어머니께서 지어주셨는데, 저는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놈이라 이름을 받지 못했거든요.”

이화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태화는 질문이 아니라 고해를 시작했다.

“둘째도 있고 넷째도 있는데 왜 하필 셋째 형이었냐면, 큰형이 진 마음의 빚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형들은 대기근이라는 불가항력 때문에 죽었지만, 셋째 형은 큰형이 집을 비운 새 아버지가 상단에 팔아넘겼거든요.”

“서론이 길구나. 뭘 말하고 싶은 게냐.”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한 큰형은 당시 상단을 호위했던 표국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선택을 해야 했죠. 고작 열 살이었던 날 데리고 관군을 피해 도망하며 셋째 형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지한국으로 넘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인지.”

태백이 그때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게냐.”

이화가 대수롭지 않게 되묻자 태화가 웃었다. 묘하게 안도한 웃음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그렇다고 했잖느냐.”

“하면 당신이 정말 제 형이 맞습니까?”

이화가 멈칫했다.

“몇 번을 말하게 하느냐. 내 전생이-”

“설령 전생에 제 형이었다 한들 완전히 새로 태어나 피도 섞이지 않고, 기억도 없는 자를 그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겁니까?”

섞이지 않은 피. 다시 말해 혈육의 의미가 사라진 몸.

뒤통수가 망치에 맞은 듯 얼얼했다. 지금껏 당연히 여기던 것이 실은 당연하지 않았다. 이화는 그 생경한 공포에 얼어붙었다. 굳은 시선이 태화를 향했다. 여전히 앳된 얼굴이었으나 눈은 그렇지 않았다. 백전노장처럼 노련하고 냉정했다.

“당신은 내 형이 아니야.”

태화의 말은 비수처럼 이화의 가슴에 박혔다.

“그래. 네 말 잘하였다. 저것은 이화가 아니다.”

막사 입구의 천이 펄럭이며 타낙한이 들어왔다. 태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전-”

타낙한을 부르며 읍하려던 태화가 멈칫했다. 그가 타낙한을 빤히 응시했다.

“사월린?”

“영민한 아이는 이래서 좋다. 입 아프게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으니.”

흐뭇하게 웃은 타낙한이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화는 뻣뻣하게 굳어서 쓰다듬을 받고만 있었다.

대체 어떻게. 입안을 맴도는 경악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만 네 막사로 가 쉬려무나. 내일이 되면 네 근심하고 염려하는 일이 다 해결되어 있을 것이니.”

타낙한의 의식을 점령한 사월린이 태화의 귀에 속삭였다. 어지간한 일류의 무사조차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신수인 이화의 귀에는 그 말이 똑똑히 들렸다.

“음험하고 지저분한 심상은 인간의 특징이지. 하니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너는 지극히 인간다울 뿐이니.”

태화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이화는 그 반응을 보고 무언가 깨달았다.

‘그렇구나.’

태백과 달리 태화는 이화가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다. 거기까지 알고 나니 그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여태 둘이 의지하고 살아왔다는 것. 태백이 이화에게 만금 같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추측에는 그 두 가지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가보렴.”

태화는 이화가 있는 쪽으론 눈도 주지 못한 채 도망치듯 막사를 나갔다. 사월린이 빙긋 웃었다.

“귀엽지 않나? 누구랑 닮아서 더 그런 것 같아.”

“사월린.”

이화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얼굴은 사람인데 표정은 호랑이를 닮았다. 사월린은 ‘거 참 신기하다’며 가벼이 웃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냐.”

“제안을 하나 하러 왔다.”

“거절한다.”

“듣지도 않고?”

“들을 필요도 없다.”

“들어야 할 거다. 제안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가 절대 용서하지 못할 짓을 저지를 테니까.”

이화는 난생처음 움트는 살의를 느꼈다. 하계의 공적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타락한 기린. 그 기린을 향한 선대 백호의 적의가 본능처럼 꿈틀거렸다.

“웃기는군. 뭘 어찌할 것이냐. 다시 한번 대륙을 멸망시키기라도 할 테냐.”

“아니. 금국의 황제를 죽일 것이다.”

콰앙!

이화의 손이 철창을 후려쳤다. 푸르스름한 예기가 깃든 주먹이 창살을 후려칠 때마다 천지가 진동할 소리가 났다. 하지만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는 몸으론 사월린의 감옥을 부술 수 없었다.

“네 본신이면 모를까. 지금 상태론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다.”

사월린이 타낙한의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비열한 웃음의 정석이었다.

“게다가 방금의 발악으로 넌 놈의 쓸모를 스스로 증명했다. 그 녀석은 지금 네가 갇힌 이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족쇄가 될 테지.”

“사월린!”

“어때. 이제 내 제안을 들어볼 용의가 생겼나?”

이화의 입이 다물렸다. 사월린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태화가 앉았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타낙한과 손을 잡은 건 그가 오랜 세월 계약을 이어받은 위문현의 핏줄인 까닭도 있지만, 실은 그보다 더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다.”

“……목적?”

수천 년 전 하계를 멸망시키려 했던 사월린이 새삼 목적을 갖는다니. 이보다 수상하고 불길한 말이 또 있을까.

“먼저 말해두겠는데,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 같은 건 없어. 오히려 그 반대면 모를까.”

“뭐?”

“북녘땅을 뒤지고 또 뒤지다 확신했거든. 내가 사랑한 자는 이 얼음의 땅에 없노라고.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상선은 하계의 모든 것에 대해 애정과 연민을 품은 자다. 아무리 나를 벌주기 위해서라지만 인간의 혼을 그런 곳에 버려둘 리 없어.”

사월린이 쓰게 웃었다. 그걸 너무 늦게 확신했지. 늦어도 너무 늦었어. 이화는 들어도 이해 못 할 소리였다.

“나는 이곳을 나갈 거다.”

그가 말하는 ‘이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봄이 오지 않는 땅. 영원히 얼어붙어 있는 북방의 감옥.

“그러기 위해선 천태백호의 시신으로 만든 결계를 없애야만 해.”

대륙의 북쪽에 있으며, 서쪽의 지한국과 동쪽의 금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결계이자 장벽. 천태백산. 이화는 그제야 사월린과 타낙한의 협력 관계가 명확하게 보였다.

“지한국에 있는 절반의 결계는 이미 오래전에 해결했다. 이 녀석이 전적으로 협력해 줬지. 덕분에 하계에 행사할 수 있는 힘과 간섭력이 커졌고, 계약도 새로 맺을 수 있었다.”

사월린의 목적은 금국에 있는 천태백산의 결계를 해제하는 것이었다. 타낙한의 목적은 금국을 정벌해 지한국을 대륙 유일의 제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거였다. 절묘하게 맞물린 이해관계가 둘의 협력을 만들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