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4화
눈만 굴려 태백을 봤다. 그의 낯에 짙은 낭패감이 어렸다. 나는 태백에게, 태백은 내게 정신이 팔려 무륜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여기에.”
흔들리는 무륜의 눈이 나와 태백을 번갈아 봤다. 내 허리를 단단히 휘감아 안은 태백의 팔. 우리는 그냥 잡은 거라는 걸 알지만, 각도에 따라선 구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다른 손.
‘아.’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먼저 행동에 나선 건 태백이었다. 황제를 마음에 두었다는 내 고백. 그리고 무륜이 보인 반응. 그걸로 황제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음을 알게 된 태백이 검을 뽑아 내 목에 댔다.
“움직이지 마라.”
스산한 목소리였다. 무표정하게 전장을 누비던, 내가 알던 태백이었다. 그러나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황제의 곁에 선 위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죄 이쪽을 향했다. 황금빛 갑옷을 두른 소수의 금군이 주변을 둘러쌌다. 긴 전쟁을 겪으며 낡았지만 번쩍거리는 빛은 그대로였다.
낮은 지붕과 담장 위엔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금국 황실이 자랑하는 특수군, 밀영군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셋뿐이다. 하지만 느껴지는 음울한 기척은 여섯. 나머지는 이곳 어딘가에 숨어 태백의 급소를 노리고 있을 터다.
무륜의 명을 받은 금군이 사저를 향해 달렸다. 남은 금군과 밀영군을 비롯해 병사들을 부르러 가는 거였다. 나머지 금군은 창을 든 채 제자리에 섰다. 공격을 위한 진이었다.
소수 정예인 밀영군과 달리 금군은 같은 일류 무사라도 개개인의 무위는 밀영군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 대신 합격이나 서로 호흡을 맞춰 몰아치는 협공에 강했다.
하지만 그게 먹히는 건 특급 무사까지다. 원급 무사는 연 대륙의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경지였다. 다시 말해, 이다음의 일은 금군도 태백도 서로 부딪혀 봐야 알 수 있었다.
“무륜, 잠깐. 태백 대장군, 당신도 우선 진정하십시오.”
내 말은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무륜과 태백이 동시에 쏘아붙였다.
“무륜? 금국 황제를 이름으로 부른다고?”
“거기서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일단 무륜, 지금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는 사실과 다르다. 의심된다면 물어도 좋아. 나는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나름 자신감의 발로였다. 꿍꿍이속도 있었다. 무륜이 나와 태백의 관계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야말로 바라던 바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어쨌든 태백을 이용해 내 전생이 ‘이화’임을 전하리라. 그걸 위한 묵인이었고, 동행이었다.
“둘이 같이 집을 보러 다닌 게 사실입니까.”
……저건 예상 못 했는데.
“대답을 못 하시는 걸 보니 사실이군요.”
“아니, 그게, 내가 다 설명할 수 있네.”
“설명이 아니라 변명이겠지요.”
확신에 찬 무륜이 일축했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이는구나. 오해의 골이 너무 깊어 어찌 메울 길이 없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의 말처럼 무어라 변명이라도 하려는데 무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던 거군요.”
음?
“그저 잘나고 잘생긴 사내이면 다 좋았던 겁니까. 그래서 이번엔 태백에게 마음을 주셨습니까.”
무륜이 태백을 쏘아봤다. 태백은 묵묵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복장이 터졌다. 그럴 땐 어이가 없다는 표정 정도는 지어줘야 할 것 아니냐! 그보단 아니라고 어서 부정하란 말이다! 곁눈질로 태백을 보며 눈빛으로 의지를 전했다. 태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열어라. 아니면 이 사내의 목숨은 없다.”
목에 드리운 칼날이 더 바짝 다가왔다. 염화미소는 실패했다.
금군과 밀영군의 기세가 일변했다. ‘잘나고 잘생긴 사내’에서 삐걱거렸던 그들이 잘 벼려진 칼날이 되어 이쪽을 노려봤다.
“……지조 없는 호랑이 같으니.”
무륜이 중얼거린 말은 아주 작았다. 너무 작아서 나밖에 듣지 못했다. 아니, 그런 줄만 알았다. 몇몇 금군과 밀영군의 어깨가 흠칫했다. 특급을 목전에 둔 뛰어난 자들이었다.
옆에 있던 태백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만큼이나 무륜의 말을 선명하게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머릿속으로 ‘애칭이 호랑이인가’ 따위를 생각하고 있겠지, 분명.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상선, 게서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다못해 번개라도 내려주소. 나는 한탄했다. 이 환장할 촌극을 타파할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바로 그때였다. 쿠르릉. 마른하늘에 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면적. 딱 우리가 선 자리의 위편에 휘몰아치듯 모여 먹구름을 만들었다.
‘……상선?’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다. 하도 답답하여 농지거리하듯 상선을 불렀으나 그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타낙한.”
무륜이 짓씹듯 답을 말했다.
타낙한이 사월린의 힘을 쓰고 있는 거였다. 무륜이 양손을 벌렸다. 콰드드득. 솟구친 땅이 흙집의 형태가 되어 금군과 밀영군을 감쌌다. 곧 하얀 번개가 내리쳤다.
콰광!
‘이상하다.’
위문현의 피를 이어 계약을 물려받았으나 타낙한 자체는 평범한 인간이다. 게다가 사월린 역시도 죄인의 신분으로 눈이 가려져, 타낙한의 눈을 빌리지 않고선 북녘땅 밖을 보지 못할 터인데…….
“그렇군. 예 온 거야.”
고개를 확 돌렸다. 난장판에 쏠려 있던 정신을 집중하자 멀지 않은 곳에서 사월린의 기척이 느껴졌다.
“대장군!”
타낙한이 부리는 그림자가 어느새 지척에 와 있었다. 태백이 내 허리를 움켜쥐었다. 뿌리치려 했으나, 인간의 육신을 입고서는 원급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힘을 쓸 수도 없다. 반동으로 다치는 건 내가 아닌 무륜이다.
하얗게 질렸다. 비로소 내가 얼마나 위태로운 처지인지 실감했다.
“폐하! 위험합니다!”
콰광. 쾅. 사나운 울음을 토하는 번개들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륜이었다. 끌려가는 나를 본 그가 망설임 없이 뛰어왔다. 나는 경악하여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냐! 위험하다!”
“폐하!”
다행히 옆의 금군들이 달라붙어 그를 다시 흙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륜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온갖 감정이 눈 안에서 휘몰아쳤다. 꿰뚫릴 듯 강렬한 갈망이 온전히 나를 향했다.
나를. 나만을.
목 안쪽으로 치닫는 아릿한 것을 꿀꺽 되삼켰다. 대신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걱정 마라.’
‘내 곧 돌아오마.’
‘금방 오마.’
그러나 무륜은 절망했다. 대체 무얼 잘못한 걸까. 그의 무엇을 잘못 건드렸을까.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금군을 뿌리치며 날뛰는 그의 모습이, 내가 본 마지막이었다.
* * *
나는 그대로 지한국의 진지까지 끌려왔다.
태백은 막사에 당도한 후에야 나를 바닥에 내려줬다. 대장군의 막사라 감히 접근은 못 하지만, 진지의 입구에서부터 무수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대부분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구심이었고, 몇몇은 놀라워했다.
그 놀라움이 익숙했다. 인간의 모습이 된 이후, 위금성주의 사저에서 느꼈던 것과 꼭 같은 유의 놀라움이었다. 다시 말해, 적국인 지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인간은 2년 전 지한국에서 죽었다.’
그제야 상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과거의 내가 지한국에서 죽었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멈칫했다. ‘전생’도 아니고 ‘과거’라니.
단순히 기억을 잃은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내 무의식은 그 차이를 없던 것으로 하려 했다. ‘인간이 되고 싶다’의 연장이다. 나는 내 안에 침체된 욕망을 하나 더 알게 됐다.
태백은 나를 침상에 내려두곤 말이 없었다. 뭔가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려다볼 뿐.
정적이 깨진 것은 외부로부터였다. 웅성거림이 가까워지더니 기별도 없이 막사의 천이 열렸다. 다수의 사람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선두에 선 둘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타낙한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는 친숙함이 느껴지는 앳된 청년이었다.
“이화?”
타낙한이 익숙한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수정에서 눈 뜬 이후, 무륜보다도 먼저 눈에 새겨두었던 자가 이전의 나를 알고 있다니.
이건 또 묘한 기분이었다. 그게 지한국의 왕이라 더 그랬다. 그는 언제나 냉정했고 때론 비정했다. 그런 사내가 혼란과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화. 네 진정 이화가 맞느냐.”
비틀거리며 다가온 그가 손을 뻗었다. 타낙한의 반응에, 그가 나를 알고 있었다는 것에, 덩달아 놀란 태백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볼 뿐이었다.
떨리는 손끝이 내 뺨에 닿았다. 아가미의 사용법을 처음 알게 된 물고기처럼 그가 겨우겨우 숨을 내쉬었다.
막사 안의 공기가 기묘하게 가라앉았다. 타낙한의 뒤를 따라온 청년은 개중 가장 복잡한 표정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른 측근들이나 병사들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상선.
나와 타낙한이 동시에 흠칫했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탓일까. 타낙한의 안에서 울리는 사월린의 목소리가 내게도 들렸다. 타낙한의 눈동자가 일순 하얗게 빛났다. 북쪽의 동토에 있는 사월린이 타낙한을 통해 나를 보고 있었다.
-속지 마라. 저건 백호다.
“예?!”
타낙한이 기함했다. 나는 말없이 눈을 가늘게 떠 타낙한의 뒤에 선 사월린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