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3화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처소로 돌아가던 날. 내원 쪽을 지나는데 한가운데 못 보던 바위가 있었다. 자세히 보자 백호의 등이었다. 그는 앞발을 모은 채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무륜은 별생각 없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덜걱했다. 백호가 보고 있던 건 무륜이 머무는 침소의 창이었다. 육각의 격자창. 그 앞의 나무는 목련이 아닌 산수유였지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무륜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백호를 지켜봤다. 백호는 미동이 없었다. 누가 저를 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창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창이 열릴 듯이. 무륜은 무엇인가 견딜 수 없어져 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복이 내린 눈이 백호의 정수리와 어깨에 쌓여갔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기 그렇게 있었는지 무륜은 알 수 없었다.
“…….”
아니. 실은 알 것도 같았다.
회상을 끝낸 그가 손을 위로 들어 잘 꽂혀 있던 동곳을 잡아 뽑았다. 긴 머리가 출렁거리며 쏟아졌다. 동곳을 손안에서 굴렸다. 하도 만져서 반들거리는 기물을 쥐자 술렁이던 마음이 조금은 잠잠해졌다.
무륜은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보랑을 가로질러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하지만 안으로 향하지 않고 밖을 돌아 내원으로 걸음 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자각쯤은 있었다. 그런데 텅 비었어야 할 내원에는 선객이 있었다. 저보다는 작지만 충분히 사내다운 체구. 오묘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머리칼의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했다.
무륜의 숨이 멎었다.
저건 가짜였다. 백호가 변하여 만들어낸 허상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젠장할. 참다못한 무륜이 상소리를 뱉었다. 동시에 꽉 쥔 주먹이 옆에 벽을 후려치려 움직였다. 하나 벽에 닿기 직전, 백호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쇄도하던 주먹이 그대로 멎었다. 비켜난 백호의 시선은 산수유를 보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어떻게 봐도 이상해하는 기색이었다. 마치 저곳에 있을 나무는 산수유가 아니라는 듯이.
얼어붙은 무륜은 백호가 떠난 후에도 한참이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나이다.]
이화가 남긴 서신에는 그리 적혀 있었다. 그 한 문장이 무륜을 살게 했다. 아니었으면 초저녁에 제 목에 칼을 꽂았으리라. 무륜은 장담할 수 있었다.
망연한 눈을 위로 든 그가 겨우 걸음을 뗐다. 자박자박. 내원을 가로지른 흑피 공단화가 어느 지점에서 딱 멈췄다. 백호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무륜은 거기서 백호가 보던 것을 보았다.
“만약.”
그건, 아주 작은 생각이었다.
“만약 네가 돌아와 내 곁을 맴도는데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사소한 계기로 어쩌다 떠올리게 된, 허무맹랑에 가까운 가정이었다.
“네 어떤 사정이 있어 말하지 못하거나, 이전의 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면.”
다른 말로는 희망이라고도 했다.
무륜의 눈동자가 폭풍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백호의 나이는 세 살. 이화가 죽은 것은 오 년 전. 어쨌든 백호는 이화가 죽고 나서 태어난 자였다.
* * *
무륜은 진솔한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해서 백호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제 침소 창문 앞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 어딜 쏘다니는지 백호는 좀처럼 사저에 붙어 있질 않았다.
밤에 찾아가려고 보면 또 어디 밤마실을 나갔단다. 성벽 너머 뒷산을 달리고 온다 했다고. 지한국이 사방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다닐 수 있다니. 진정 위대한 신수구나. 새삼 실감했다.
그런 이유로 백호를 보지 못한지 벌써 이레였다. 자연히 백호의 힘이 무륜의 몸에 머문 것도 일주일이 됐다.
잠깐 방심하면 줄기줄기 뻗어 나갈 것 같던 강대한 힘이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한 번 쓸라치면 제어가 되지 않아 진땀을 뺐던 것을, 이젠 적어도 소 잡을 땐 소 잡는 칼을, 닭 잡을 땐 닭 잡는 칼을 꺼낼 정도는 되었다.
며칠 전에는 지한국의 공세가 있었다. 성벽을 타고 오를 사다리를 앞세운, 정석적인 돌격이었다. 무륜은 백호의 힘으로 땅을 뒤집어 사다리를 무너뜨렸다. 지한국은 성벽 언저리도 오지 못한 채 패퇴했다.
전투를 복기한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부를 써 내려가던 손이 멎었다.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타낙한답지 않은 공격이었다. 뒤통수가 싸늘했다.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문밖에서 위중혁이 고했다. 곧 무륜의 허락을 얻은 그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어떤 소문을 물어 왔다. 정확한 시작이 언제, 누구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최근 위금성주의 사저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죽은 위사장의 모습으로 변한 백호가 밖에서 어떤 사내를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무륜의 손에 쥐어져 있던 붓이 뚝 부러졌다.
“방금 뭐라 했느냐.”
그의 뒤에 서 있던 몽휼이 양팔을 교차하며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신호를 받은 위중혁이 무륜을 봤다.
“목련 님이 밖에서 사내와 밀회를 갖는 모습을 벌써 여럿이 보았습니다.”
수신호는 수신에 실패했다. 무륜은 일단 상식적으로 부정했다.
“잘못 본 거겠지.”
“만나면 포옹부터 한답니다.”
“…….”
“그러고 나면 손을 꼭 맞잡고 앉아 담화를 나눈답니다.”
지존의 등에서 스멀거리는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몽휼은 두 손 모아 상선께 맹세했다. 이 순간만 지나면 기필코 저 빌어먹을 투구벌레의 허리를 접어버리겠노라고.
다행히 무륜은 황제로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내버려 둬라. 이화의 얼굴로 그러고 다니는 것이 불쾌하긴 하나, 이 이상 백호의 심기를 거스를 순 없는 일이니.”
“……같이 살림살이며 집도 보러 다닌답니다.”
무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궁금한 걸 참다못해 태백에게 물었다.
“대체 집은 왜 보러 다니는 겁니까.”
“임무가 장기전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제게 하는 말입니까?”
“글쎄다.”
태백이 내 시선을 피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다. 그가 말한 ‘장기전’의 주체는 따로 있었다.
‘다른 임무가 있군.’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를 만난 태백의 경악과 반가움은 진짜였다. 바꿔 말해 예서 날 만날 것을 예상치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잠입해 들어왔다는 건데, 적국의 원급 무사가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시점에 홀로 잠입해 왔다면 목적이야 뻔했다.
“황제를 죽일 겁니까.”
“뭐, 뭐뭐, 뭣?!”
정직한 반응이었다. 기함하는 그를 쏘아봤다.
“황제를 죽일 거군요.”
“……설마, 네 마음을 줬다던 사람이.”
“예. 맞습니다.”
태백의 낯이 파래졌다 다시 하얘졌다 했다. 속내를 숨기는 건 물론이고 표정 관리조차 되지 않았다.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이 사내를 멀리서 봤을 땐 그야말로 폭풍을 두른 늑대였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붉은 핏물이 강을 이뤘다.
전장에서 병사들이 보이는 표정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과한 긴장과 공포로 눈을 부릅뜬 채 웃기도 하고, 일그러뜨리기도 하며, 넋이 나가 멍한 표정으로 적을 상대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무표정했다. 제 손에 든 건 식칼이고, 제 앞에 있는 건 무라도 되는 듯 어떤 감흥도 감정도 없이 그저 베어 나갔다. 어떤 의미론 타낙한보다 지독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다. 내 목적은 황제가 아니야.”
그런 태백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 오래 겪은 건 아니지만 그런 걸 잘할 종류의 인간의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전장에서 본 살육자와 지금 내 눈앞의 순박한 사내가 같은 인물이라니.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할 일 없을 것 같던 내 눈을 의심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럼 뭡니까.”
“그, 그건 말해줄 수 없다.”
“어떻게 해도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한다.”
지나가던 잡졸을 향해 손을 들었다.
“아, 거기 병사님.”
“헉.”
반은 압박이었고, 나머지 반은 농이었다.
기함한 태백이 펄쩍 뛰더니 내 입을 막으며 허리를 낚아챘다. 진중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애원을 담아 나를 봤다. 이 사내가 ‘그’ 태백이라니.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입을 막은 손바닥에서 심장의 박동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어지간히 긴장했는지 그의 낯이 파리했다. 막말로 들켜도 혀나 한 번 차주고 도망할 수 있는 원급의 무사가 말이다.
손을 들어 입을 막은 손을 치웠다. 태백은 의외로 저항 없이 손을 물렀다. 대신 그대로 손을 미끄러뜨려 내 손목을 쥐었다. 맞닿은 살갗으로 떨림이 전해졌다.
“왜 그렇게 떠십니까.”
“들킬까 봐.”
“들켜도 도망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혼자라면 그렇지. 하지만 둘은 힘들다.”
눈썹을 위로 올렸다. 어쨌든 날 데려가겠다는 뜻이다. 내 의견을 무시하는 것 같아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 안 간다고 했습니다.”
“들킨다면 가야 해.”
다음 말을 멈칫하게 하는 진중한 목소리였다.
“나와 접선한 것을 들키면, 설령 네 진실이야 어떻든 고초를 겪을 것이다. 나는 그 꼴 절대 못 본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태백을 봤다. 그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거구의 사내 위로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어린애가 겹쳐 보였다.
“게다가 그렇게 헤어지면 그 뒤는?”
태백은 두려워했다. 원급 무사가 진정 두려움에 떠는 진귀한 광경에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외려 몽글거리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숨을 쉬고 아직도 떠는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가볍게 도닥이자 거대한 덩치가 움찔거렸다. 음. 묘하게 귀여운데. 누구랑 닮은 것도 같고. 하늘을 향해 날리는 하얀 비단처럼, 아련하게 떠오른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백호님?”
나와 태백이 선 골목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골목. 언제 왔는지 알 수 없는 무륜이 거기 서 있었다.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태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