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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2화 (92/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92화

태백을 본 총감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여기 온 지 이제 겨우 넉 달. 태백의 몸에서 심상찮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오래도록 무인을 다뤄온 총감은 그를 바로 알아봤다. 일류 무사의 기세였다.

‘평생 검이라곤 잡아본 적 없던 무지렁이였는데!’

그는 바로 태도를 바꿨다. 단순한 원석인 줄 알았던 것이 금청옥보다 귀한 보배였다.

“내 그간 자네에게 소홀하긴 했지. 대기근으로 우리 표국도 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임금을 내렸지만, 대신 내 다른 것으로 보상함세.”

총감은 당장 우마차를 준비시키고 거기에 쌀을 다섯 가마니나 실었다. 그러곤 같이 태백의 집으로 가자 했다. 태백은 당황했으나 당장 보이는 쌀가마니의 산에 홀린 듯 앞장을 섰다.

태백의 마을은 국경 근처 유일의 표국이라 불리는 총감의 표국보다도, 훨씬 더 국경에 인접해 있었다. 총감은 태백이 가리킨 어느 허름한 집에 우마차를 세웠다. 한데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온 촌부의 얼굴이 낯익었다. 총감을 발견한 그도 놀라 눈을 홉떴다.

대체 저 흔하디흔한 촌부를 어디서 봤을까. 총감이 고민하는 사이, 열 살의 막내가 작은 손가락으로 총감을 가리켰다.

“이화 형 데려간 아저씨.”

아비도, 총감도 우뚝 굳었다. 태백이 스르륵 두 사람을 돌아봤다.

총감은 그제야 촌부를 기억해 냈다. 지한국과 금국을 오가며 마약과 인신매매를 하는 상단주가 사 간, 어떤 아이의 아버지였다.

“마, 막, 막내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태백이 물었다. 말은 더듬었으나 그의 기세는 고인 물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아버지가 이화 형을 저 아저씨와 함께 온 사람에게 팔았어. 이화 형은 큰 자개함에 담겨서 어딘가로 갔어. 내가 몰래 따라가서 다 봤어.”

열 살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하고 담담한 설명이었다.

총감의 눈이 다른 의미의 탐욕을 담아 막내를 봤다. 이 집은 대체 씨가 어떻게 되길래 이런 돈 될 법한 아이가 바글거린단 말인가. 접때의 아이도 눈과 머리 색이 특이하고 미모가 출중했었다.

그는 아깝다며 입맛을 다실 뿐, 별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똘똘해도 열 살. 잘못 본 것이라 딱 잡아떼면 제가 무슨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다음 순간, 눈의 강렬한 통증과 함께 총감의 세상이 어둠으로 떨어졌다.

“아악! 내 눈! 내 눈이!”

“더러운 눈으로 내 동, 동생을 보지 마라.”

태백의 손에 들린 검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총감이 양손으로 상흔이 남은 얼굴을 짚었다. 그와 같이 왔던 일류 무사들이 뒤늦게 반응했다. 사방에서 발도하며 사나운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마, 막내. 누, 눈 감고 있어.”

“응.”

착실하게 대답한 아이가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태백은 새카만 폭풍이 되어 장내를 휘몰아쳤다. 몇 번의 비명이 끝나고 죽음으로 만들어진 고요가 내려앉았다.

“아직 눈 뜨, 뜨지 마.”

“응.”

검을 검집에 넣은 태백이 막내의 몸을 안아 올리곤 힐긋 뒤를 돌아봤다.

바지에 오줌을 지린 아비가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십 년은 늙은 얼굴이었으나 제가 떠나기 전보다 살이 올랐고 행색도 멀끔했다. 여전히 비쩍 곯은 막내와는 달랐다. 그때 태백은 아비에 대한 모든 천륜과 정을 끊어냈다.

“가자, 막내야.”

막내를 업고 길을 나선 태백이 물었다. 이름 갖고 싶지 않으냐고. 막내는 그렇다 했다. 하지만 태백은 제 머리가 나쁜 것을 알았다. 줄글을 몰라 어미처럼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줄 수 없었다.

그래서 태백은 제 이름에서 한 글자를, 셋째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가져와 막내의 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막내의 이름은 태화가 되었다.

* * *

어느새 해가 뉘엿하게 저물어갔다. 나는 옆에 앉은 사내를 힐긋 곁눈질했다. 넋두리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어째선지 귀를 기울이게 됐다.

죄인이 되어 관아에 쫓기게 된 태백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도망자의 신분으로 금국에 머물며 어딘가로 팔려 간 이화를 찾을지. 아니면 지한국으로 넘어가 태화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할지. 그건 결국 이화냐, 태화냐의 선택이었다.

태백은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넓은 어깨가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다. 나는 이 사내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셋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태백의 마음에 빚이 됐다. 그가 죄인처럼 중얼거렸다.

“둘째와 넷째를 앗아간 건 대기근이었으나, 너를 잃은 건 아비의 이기심과 나의 무관심 때문이었지. 그리고…….”

사내가 뒷말을 삼켰다. 하지 못한 말이 내 귀에는 들렸다. ‘그리고 금국의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지 모를 너를 두고 지한국을 향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품에 열 살짜리 어린애를 안고 도망자의 삶을 살 수는 없었으리라. 게다가 생사가 불명한 동생보단 당장 제 품 안의 어린 것을 살리는 게 합리적이고 당연한 선택이다. 물론 그렇게 버렸던 당사자의 앞에선 다 허울 좋은 변명일 뿐이지만.

본신일 적의 버릇대로 입맛을 다셨다. 사실 이렇게 들어도 별 감흥은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하나도 없는 탓이다. 그래서 천명을 버려도, 전생의 연에 이끌려도, 이렇게 인간의 껍질을 입게 됐어도, 내 자아는 아직 인간보다 백호에 가까웠다.

고개 숙인 태백을 봤다. 꿈에서 형이랍시고 나를 지켜주겠다 말한 어린 소년이 바로 이자였다. 맹목적인 호의가 나를 향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를 이용해 먹기로 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내 이야기도 해야겠지요. 사실 전 3년 전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놀란 태백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제가 아는 건 제 이름이 ‘이화’라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말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대체 어쩌다!”

예상보다 격한 반응이었다. 그가 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선단에는 목련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만이 아니다. 그가 입는 모든 의복에는 목련이 들어갔다. 그 의미를 이제는 안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런 걸 입고 오셨습니까.”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압니다. 대장군을 모르는 자가 예 어디 있으리까.”

“그렇구나. 내가 안일했다.”

그가 머뭇거리다 관에 고할 것이냐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심하며 웃는 낯을 보니 백호의 양심이 찔렸다.

“옷부터 뒤집어 입으세요. 복면 같은 게 있다면 그것도 쓰십시오.”

태백은 군말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장포가 거꾸로 뒤집히고, 품에서 나온 면사포가 그의 얼굴을 가렸다.

“이화야, 나랑 같이 가자.”

다 끝낸 태백이 내 손을 잡았다.

“네 알다시피 나는 지한국의 대장군이다. 너 하나쯤 데려가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여 줄 수 있어. 가면 태화도 있다.”

“못 갑니다.”

“어째서?”

어쩌면 머뭇거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하려 했을 때, 내 입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움직였다.

“제가 마음을 준 사람이 예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도 같이 가자.”

“저는 몰라도 그는 지한국에 갈 수 없는 신분입니다.”

“신분?”

“예. 그러니 저도 못 갑니다.”

“이름이 무언데?”

“그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부러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기실 당신을 고발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반역에 준하는 행위임을, 당신은 아셔야 합니다.”

잠깐 침묵한 태백이 말했다.

“해가 졌다.”

꼭 잠깐의 휴전을 제안하는 병사 같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마. 하지만 또 오겠다.”

“꼭 오겠다.”

“반드시 오겠다.”

같은 말을 세 번 하고 멀어지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환영을 보았다. 형 돈 벌어 올게.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 길을 떠났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바로 지금처럼.

완전히 해가 진 후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심경이 더욱 복잡해졌다.

* * *

지한국에서 드디어 움직임을 보였다.

무륜은 보고를 받자마자 성벽 위에 군사를 추가로 배치하고 몽휼을 같이 올려 보냈다. 성 밖으로 내보냈던 세작들이 되돌아와 추가적인 보고를 했다.

중점이 되는 정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타낙한이 영물들을 동원해 정체 모를 커다란 것을 막사에 들였다는 것. 두꺼운 천에 감싸여 그게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했다.

다른 하나는 태백의 거동이 수상하다는 거였다. 대체 어딜 가는지 자리를 비울 때가 잦았다. 혼자 남아서도 생각에 잠기거나,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고 한다.

무륜은 일단 예의 주시하라고 했다. 그리고 위수혁에 대한 것을 물었다. 그를 담당하는 관리는 침중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의는 싱겁게 끝났다. 홀로 남은 무륜은 문부에 집중하다 마음이 심란하여 밖으로 나섰다. 하얀 입김이 처마를 향해 올랐다.

어느새 해가 바뀌어 곧 신정이었다. 이화가 죽고 5년. 신정이 지나면 6년째다. 이 전쟁이 어떻게 끝이 나든 봄은 오겠지. 무륜은 어느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몇 번째 복기인지 알 수 없으나, 가슴의 쓰라림은 처음 되새겼던 날과 같았다.

“곧 봄이 오겠지.”

널 다시 보지 못해도. 이 전쟁에서 이겨도. 반대로 져서 죽어도. 그래도 봄은 오겠지. 네가 없는 봄이.

무륜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화와 함께한 날들이 홀로 남은 황제의 뇌리를 스쳤다. 그 끝을 잡고 이질적인 장면이 하나 끼어들었다. 백호였다. 정확히는 이화의 모습으로 변한 백호.

똑같았다. 오묘하던 머리 색과 눈 색까지 그대로였다. 순간, 기묘한 느낌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아무리 초상화를 봤다지만, 그렇게까지 똑같이 변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무륜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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