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9화
“……환장하겠네.”
배를 드러낸 채로 뒤집어진 몸을 바로 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크게 하품을 했다. 쩝. 입맛까지 한 번 다시자 그제야 잠이 좀 깼다. 위금산에 있을 적엔 뜨고 지는 해보다 철저한 생활을 했었는데. 자유로워진 게 아니라 방만해진 걸지도 몰랐다.
격자창을 열 필요도 없었다.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길게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에 무륜이 다녀갔다. 급히 쓸 일이 있다며 힘을 가져갔고, 나는 다시 잠들었다. 그래서 지금 내게 남은 힘은 절반. 그마저도 쓸 수 없으나 별걱정은 되지 않았다.
슬렁거리며 성주의 저택 안을 돌아다녔다. 마주친 이마다 인사를 건넸다. 이젠 내가 제법 익숙해졌는지 호의와 반가움뿐인 인사였다.
위금성주는 아예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작은 몸이 와락 달려들어 내 목덜미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무심하게 고개를 들자 수업 중이었던 듯, 감투를 쓴 학자가 아이고 소릴 내고 있었다.
“위금성주.”
“옥동이라고 부르시라니까요.”
위금성주의 이름은 주옥동이었다.
“그래, 옥동아.”
“예! 백호님!”
“이리 매달려도 공부는 뺄 수 없다.”
옥동이의 몸이 흠칫했다. 항시 그의 뒤를 따르던 호위무사가 다가와 옥동이를 떼어갔다. 단단한 손에 잡힌 옥동이 축 늘어졌다.
“놀 거면 다 끝낸 후에.”
“…….”
“대답.”
“알겠습니다.”
“장하다.”
‘장하다, 우리 아가.’
불현듯 귓가를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흠칫하여 뒤를 돌아봤다.
“백호님?”
마당은 공허했다. 반쯤 치우다 만 눈과 옥동이 만든 몇 개의 눈사람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만 가마.”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멍하니 생각했다. 그 꿈은 분명 전생의 꿈이었다. 내 어미였던 자와 형이었던 자,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여러 인과관계에 따라 만나게 되었을 무륜까지. 이미 흐릿해진 꿈을 복기하고 되씹을 때마다 묻어둔 욕망이 강해졌다.
인간이 되고 싶다.
물론 진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불가능했다. 내가 원하는 건 사월린처럼 인간의 껍데기를 쓰는 거였다. 그럼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막연하지만 맹목적인 예감이 강하게 일었다.
‘해결이라니. 대체 뭘 해결한다는 말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이 문제만 쌓여가는 기분이었다.
“음?”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무륜이었다. 늘어졌던 꼬리에 힘이 들어가고 귀가 절로 팔랑거렸다. 단내에 홀린 벌처럼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힘이 필요하다던 일은 해결했는지, 무륜은 구석진 곳에 홀로 앉아 한 손에는 종이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뭔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낡은 종이는 초상화였다. 단정하면서도 미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내가 빛바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손에 굴리던 것은 동곳이었는데, 얼마나 만졌는지 끝에 새겨진 목련 조각이 매끌매끌했다.
나는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금국의 여름 축제 때, 검은 반가면을 썼던 사내의 머리에 있던 물건이었다. 걸음마다 슬픔이 묻어났던, 딱 한 번 보고도 좀처럼 잊히지 않았던 그 사내가 바로 무륜이었다.
불현듯 초조해졌다. 상선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나 그것을 견딜 인내심이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무륜.”
“…….”
“무륜!”
크르렁! 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그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무륜은 초상화부터 얼른 접어 품에 넣었다. 나는 그가 넋 놓고 있던 것을 지적하는 대신, 동곳에 관심을 표했다.
“그 동곳에 새겨진 건 목련이구나.”
“예.”
그러자 무륜이 동곳마저 품에 넣었다. 이것에 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정인이 준 물건이더냐.”
“……예.”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도 과민한 반응을 보였지. 네 정인의 이름도 목련과 연관이 있더냐.”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나.”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생각보다 날 선 반응이었다.
“어째서 죽은 제 정인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어, 그냥. 궁금해서 그런다.”
나는 당황했다. 이런 무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첫 만남부터 그는 시종일관 점잖았고 정중했다. 그런데 내 어떤 말이 그의 역린을 건드렸을까. 날카롭게 반응한 무륜은 곧장 가시 방벽을 세웠다.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제게 어떤 호의를 품고 계십니까? 그래서 제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을 기회라 여기고 계십니까?”
“뭐? 아니, 아니다. 나는 그저…….”
그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륜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몰아친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는 새 정신을 차린 무륜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독한 피로가 묻어나는 숨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쳐서 망언을 하였습니다.”
“어어, 아니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 그런 민감한 걸 함부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귀가 푹 죽었다. 항상 허공에서 슬렁거리던 꼬리도 축 늘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무륜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내가 생각을 해보았는데.”
얼른 입을 열었다. 달랠 때는 당과만 한 것이 없었다. 나는 당과 같은 말을 꺼냈다.
“네게 준 힘. 굳이 내게 돌려줄 필요 없다. 나는 혹여 네가 내 힘에 취하거나 중독되면 어쩌나 염려하였는데,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그 말씀은…….”
“귀찮게 뭐 하러 줬다 받았다 할 것이냐. 네 올곧기가 대나무와 같으니 그냥 계속 가지고 있으렴.”
가라앉아 있던 표정이 깨졌다. 그제야 아차 한 무륜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걸 내가 가로막았다.
“피곤하다 하였지. 그럼 예서 이리 있지 말고 그만 들어가 쉬거라. 나도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가보련다.”
“…….”
그가 신수인 나를 어려워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내가 변심하여 그를 따라온 것처럼, 또 갑자기 변심하여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는 그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도 장담할 수 없고, 함부로 약속할 수 없는 것이 신수라는 존재다.
이마로 그의 옆구리를 슬쩍 밀었다. 무륜은 저항 없이 일어나 제 처소로 들어갔다.
* * *
지한국은 잠잠했다. 별다른 공세가 없음에도 무륜은 내게 힘을 돌려주러 오지 않았고, 자연히 그를 만나는 날은 줄어들었다.
내 힘이 목적이었나?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내 힘이 목적이었겠지. 이능을 사용하는 적과 마주해 패퇴하는 상황에서 ‘백호’라는 이름이 어떻게 보였을지 굳이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볼일 없다는 건가.’
절로 비뚤어지는 생각을 다잡았다. 바쁠 것이다. 이젠 마냥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세를 준비해야 할 테니까.
생각을 다른 곳으로 틀었다. 며칠 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초상화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본 얼굴이 눈알에 찍힌 것처럼 계속 아른거렸다. 물에 비친 내 얼굴은 털북숭이에 근엄하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여태 봐온 익숙한 낯.
그런데 초상화를 본 이후부턴 뭔가 탈을 쓴 기분이었다. 내 진정한 모습은 이 헌앙한 자태의 산신이 아니라 한갓 인간이라. 얼결에 그리 생각하면서도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는 자신이 낯설었다.
“음?”
버릇처럼 광실 바닥을 발톱으로 득, 긁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어음?”
아래를 내려다보자 하얗게 뻗은 다섯 개의 손가락이 보였다. 섬섬옥수는 이 손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으응?”
한데 그 손이 내 손이었다. 양손을 뺨에다 댔다.
챱. 푹신이 아니라 챱이다. 입을 떡 벌렸다. 몸을 벌떡 일으키자 머리가 쑥 올라갔다. 그래 봤자 백호일 때보다 시야가 낮았다. 익숙하지 않은 몸이 휘청거렸다.
두 발로 광실을 빙빙 돌았다. 한 바퀴를 돌자 넘어지지 않게 됐고, 두 바퀴를 돌자 달릴 수 있게 됐다. 구석에서 동경을 찾아 세웠다. 검은 홑겹 장포를 입은 사내가 동경 안에 서 있었다. 초상화 속에 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들뜬 마음이 더욱 벅차올랐다. 이전의 생부터 이어진 인연이 비로소 온전한 형태와 증거를 갖춰 내 손에 쥐어졌다. 나는 그의 사람이었고, 그는 내 사람이었다.
손을 들어 가슴께를 짚었다. 매끈한 살의 감촉과 함께 박동하는 작은 인간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무륜을 향해 뛰는 심장이었다.
“무륜.”
그래. 무륜.
나는 광실을 뛰어나갔다. 무륜. 나는 그를 만나야 했다.
* * *
무륜은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부대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지한국의 진지는 조용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위수혁은 아직도 연락이 없나.”
“예. 죄송합니다.”
위중혁이 답했다. 그의 동생 위수혁은 소수의 밀영군을 이끌고 남방에 가 있었다. 목적은 하나. 여율령의 사후에 모습을 감춘 암묵단을 수소문하는 것이었다.
백호를 만나기 전. 어떻게든 타낙한의 치명타를 피하며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으나, 끝이 멀지 않은 것을 무륜은 알았다. 하여 두 번째 도읍을 빼앗겼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위수혁을 남방에 보냈다.
“내달까지 못 찾거든 그냥 돌아오라고 해라.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 그가 얻은 것은 ‘기연’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지금도 제 안에서 들끓는 힘을 느꼈다. 인세를 아득히 벗어난 힘. 조금만 방심하면 튀어나와 주변을 집어삼킬 듯 패도적이고 묵직한 땅의 힘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힘의 주인을 떠올렸다. 첫 만남부터 눈을 뗄 수 없었던 하얀 호랑이. 어쩜 이름도 백목련이었다.
끼익. 붓을 놓은 무륜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