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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8화 (88/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8화

타낙한은 서둘러 생각을 흩으려 했으나, 안개처럼 머무는 것을 완전히 지워낼 순 없었다.

-패자의 분풀이군.

‘빌어먹을 계약.’

그는 사월린과 꼭 같은, 음울한 웃음을 지었다. 둘 사이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방금 내가 뭘 좀 들었는데 말이다.”

주체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게 누구인지 안다.

“황제와 백호. 둘 중 하나만 주살해야 한다면 누구를 없애는 것이 낫다고 보느냐.”

“전하!”

태화가 다급히 타낙한을 불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대신 안고 있던 태화를 부드럽게 내려놨다. 태화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군사.”

“……예.”

“내가 묻지 않았나.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태백 장군은 홀로 적진에 들어가 황제와 백호, 둘 모두를 주살해야 하게 될 것이다.”

“어느 쪽도 성공할 가능성이 극히 낮지 않습니까!”

태화가 이를 악물고 답했다. 타낙한은 태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태백을 불렀다. 태백이 공손히 답했다. 여기서 타낙한이 ‘둘 모두의 목을 베어 오라’고 한다면, 태백은 그리할 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태화, 그를 위해서.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태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태백은 부정할 테지만 태화는 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 어리다는 말로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이후, 입에 넣는 모든 것은 깨진 사기 조각 같았고, 혼곤하여 잠드는 밤에는 언제나 그를 만났다.

단순히 목숨이 붙어 있다 해서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태화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소스라쳐 깨어나면 그는 팔로 제 몸을 으스러져라 안으며 울었다. 이는 제 죄의 결과이고, 대가였다.

그때부터 태화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의 순수를 믿고 있는 형, 태백을 위해.

“……백호입니다.”

냉정을 되찾은 태화가 답했다.

단순한 문제였다. 둘 중 하나만 주살해야 한다면, 그렇게 주살하고 난 후 살아남은 쪽의 대응이 어떠할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황제가 죽어 백호가 분노한다면, 태백은 결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반대로 백호가 죽고 황제가 남는다면 기껏해야 특급 무사뿐인 금국 측에선 원급인 태백을 잡기 어려울 터. 전쟁도 본래의 전황대로 돌아와 지한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급격히 커진다.

“하지만 전하, 백호를 죽인다는 건 이리 쉽게 언급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떠나-”

“군사는 이만 돌아가 보라. 내 대장군 태백과 긴히 말을 나눌 일이 있으니.”

그 나눌 말이 무엇인 줄 아는 터라 태화는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그가 간절히 타낙한을 불렀다.

“전하.”

가느다란 손가락이 타낙한의 어깨에 살짝 얹어졌다. 어떤 명령도, 언급도 없이. 태화가 자의로 타낙한에게 접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잔잔한 파도처럼 타낙한의 뇌리를 갉작이던 두통이 조금 더 연해졌다.

그래도 타낙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용품은 대용품일 뿐. 타낙한은 이미 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폭풍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충격과 전율은 결코 대체될 수 없었다.

무감각한 시선에 태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장군이 잘못된다면 저 또한 살 수 없습니다. 부디 그를 헤아려 주시길.”

그가 표독스러운 말을 남기고 막사를 나갔다. 사납게 펄럭이는 입구의 천이 태화의 심경을 대변했다. 타낙한은 서늘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숨만 붙여놓을 방법은 없나. 남방의 독 중에 그런 기능을 하는 것도 있다 얼핏 들은 것 같은데.’

태화는 이화가 아니다. 그와 어떤 혈연적 관계가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타낙한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태화에게 일말의 애정도 품지 않았다. 말, 행동 전부 계산된 연기에 불과했다. 아마 태화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뛰어나다는 말도 부족한 아이니까.

다만 제 속을 드러내면 태백만 위험해진다는 걸 알기에 얌전히 안겨 있는 거다. 안긴 채로 생각하겠지. 어떻게 하면 태백과 함께 안전해질 수 있을지.

무지한 태백은 그저 충성을 다해 저를 섬기고 높은 자리에 앉으면 둘 다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태백.”

“예, 전하.”

“성에 들어가 백호를 주살하라.”

태백이 드물게 대답을 삼갔다. 표정을 숨길 수 없는 그의 낯에 짙은 고뇌가 드러났다. 타낙한은 태백의 생각을 확인했다. 태화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가득했다.

‘하긴. 굳이 볼 필요도 없지.’

태화도 그랬다. 태백을 구금한 후, 태화가 저를 찾아왔을 때. 그때만 해도 타낙한은 태화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겉보기엔 담담했으나, 그의 속내는 온통 형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를 읽지 못하게 된 것은 태화가 타낙한의 능력을 알게 된 이후의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질이 되는 그 형태가 들킨 순간, 두 형제는 나란히 타낙한의 손에 떨어졌다.

태화는 영리했으나 아직 어렸다. 그래서 타낙한이 자신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음을 확인하자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도망칠 수 없다면 차라리 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얻겠다는 것. 그는 곧 안정된 지위와 부귀였다.

하지만 태백은 아직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태화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저가 도맡으려 하는 성향이 있었고, 태백은 태화의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그저 믿었다.

그 외에도 둘의 관계에는 묘하게 뒤틀린 구석이 있었다.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그런 부분. 좀 더 깊이 파보려면 파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낙한은 그 이상 관심 두지 않았다.

“실패하면 태화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다만 그 뒤틀림을 신나게 이용해 먹었다.

태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이 설원에 사는 짐승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태화는 태백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제 형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타낙한은 무지한 태백을 태화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막 부렸다. 바로 지금처럼.

타낙한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렸다. 어차피 태백의 입에서 나올 말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제법 흐른 후, 태백이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세간은 모르지만 저와 전하는 알지요. 제가 동생 때문에 전하께 복속되었다는 것을요. 태, 태화를 아끼는 척 곁에 두시는 것도 전부 제 무위를 이용하기 위함이잖습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태백이, 타낙한은 이제 좀 가엾게 느껴지려 했다. 물론 농이다. 타낙한은 짐짓 심각한 척 태백의 말을 듣기만 했다.

“여, 여태 계속 전하를 위해 검을 휘둘렀습니다. 하니 약, 약조해 주십시오. 이번 일을 성공시키면 저와 태화를 놓아주시겠다고.”

긴장했는지 겨우 고친 말더듬이 버릇까지 튀어나왔다. 타낙한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진중한 낯을 꾸며낸 그가 태백의 단단한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래. 내 약조하겠다.”

* * *

온통 검은 공간. 마치 그곳만 빛을 비춘 듯 작은 빛 동그라미 위에 웅크린 아이가 있었다. 꼬질꼬질한 어린애는 서럽게 눈물을 훌쩍였다.

‘왜 우니, 목련아.’

어둠 속에서 가늘고 하얀 팔이 뻗어 나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나와 같은 이름으로 불린 아이가 더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제 이름은 왜 꽃인가요. 왜 이화인가요.’

‘그 이름이 싫으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은 난감해하며 아이의 등을 도닥였다. 도닥도닥. 도닥도닥. 어느새 내 등에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가 되어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이겨낼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목련이 피면 봄이 오는가. 봄이 오면 목련이 피는가. 네가 있어 봄이 오고 목련이 피누나. 북망산일랑 보지도 말고, 삼도천일랑 가지도 말고, 이리 오너라. 어여 어여 오너라. 네 따다 줄 산머루가 내 품에 있다.’

마지막 줄은 부를 때마다 바뀌었다. 오늘은 산머루였지만, 어제는 산딸기였고, 엊그제는 별똥별이었다.

‘어, 어, 어머니.’

의식이 까무룩 멀어지려 할 때, 자박자박 다가온 어린 목소리가 여인을 불렀다.

‘쉬이.’

여인이 검지를 세워 제 입술 앞에 댔다. 하나 이미 늦었다. 가물거리던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돌렸다. 나와 똑같이 꼬질꼬질하지만 나이는 더 많아 보이는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펼친 손에는 개구리가 놓여 있었다.

‘이, 이거.’

‘개구리구나. 이화 주려고 잡아 온 거니?’

‘네.’

‘장하다, 우리 아가. 이리 온.’

아이는 이번에도 망설였다. 여인이 재차 손을 까닥이자 그제야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여인은 다른 팔로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개굴개굴. 관심에서 멀어진 개구리는 도망했다. 반대편 품에 안긴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보듯, 나를 봤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혀, 형이야.’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상황과 관계성, 그리고 나이 차가 모든 것을 말해줬다.

‘내, 내가 혀, 형이니까 보, 보살펴 줄 거야.’

보살핌을 받아야 할 건 너 같은데. 아무리 봐도 머리가 모자란 아이였다. 혀를 차며 한마디 하려는데 시야가 뭉개지며 풍경이 바뀌었다.

‘이화야.’

중후한 사내의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나는 계속 안겨 있었다. 하지만 안긴 품은 바뀌었다. 훨씬 넓고 단단한, 사내의 품이었다.

눈을 번쩍 떴다.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정수리로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이리 부산스레 잔망을 떨까.’

귀엽게.

순간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누구십니까?’

‘뭐라? 네 진정 잠이 덜 깼구나.’

농지거리하듯 책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허어. 이것이 내가 누구라고. 어디 얼굴이나 보자. 그런 심경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온화한 그의 낯을 나는 바로 알아봤다.

‘무륜.’

이름을 불린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내 초승달처럼 휘었다.

‘네가 내 이름을 먼저 다 불러주고. 무슨 심경의 변화더냐.’

나는 원래부터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아까부터 이해하지 못할 소리만 하는 그에게 뭐라 대꾸하려다 멈칫했다. 희고 긴 손가락이 열 개. 게다가 답삭 안긴 작은 몸. 나는 인간이었다. 그를 인지한 순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냥.’

뺨을 타고 물줄기가 흘렀다. 온기를 품은 물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리 부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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