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7화
태백은 전쟁 전, 숨은 인재를 찾아낼 셈으로 열었던 비무회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준우승자와의 격차가 너무 커 흡사 어른과 어린애의 싸움같이 보였던 결승전을, 타낙한은 잊을 수 없었다.
그는 태백에게 처음부터 높은 자리를 안겨줬다. 반대는 전부 묵살했다. 출신이나 성분은 중요치 않아질 세상이 올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셈이니까.
태백은 처음부터 비밀과 의문점이 많은 사내였다. 단정하지만 평범한 차림새로 보아 촌부였을 것이 분명한데, 타낙한이 마련해 준다는 거처를 거절하지 않나. 말이 길어질 것 같으면 입을 딱 다물었다.
애초에 태백은 말더듬이였다. 몸 쓰는 것엔 일당백이나 머리가 모자란 건지, 아니면 선천적인 병이라도 있는지, 머리를 쓰는 모든 것에 굼뜨고 느렸다. 글을 뗀 후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처음 만났을 땐 적잖이 놀랐다.
‘하긴 말더듬이면 어떻고 천치면 어떠랴. 그 무위가 원급(元級)인데.’
하지만 오히려 말수가 적으니 무게감이 더해져, 타낙한은 나쁘지 않다 여겼다. 동시에 태백의 뒤에 그를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애당초 불리해지면 입을 다물거나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도, 모두 그 사람의 생각임이 분명했다.
확신한 건 글을 가르치는 한편, 전략 전술에 관한 교육을 할 때였다.
태백은 숙제를 내주면 반드시 애매하게 맞는 대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완벽히 맞는 것도 아니고, 아예 틀린 것도 아닌, 애매하지만 맞는 답. 태백의 뒤에 있는 자는 그의 수준을 잘 알고 있음에도, 차마 틀린 답을 가지고 가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타낙한은 기껍게 웃었다. 무재만 얻은 줄 알았더니 문재가 딸려 있었다.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 왔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태백은 어떤 추궁에도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렁이는 눈빛이, 이대로 돌려보내면 야반도주를 할 참이라. 우직하고 순박한 사내는 속내를 감출 줄 몰랐다.
결국 타낙한은 태백을 구금했다. 구금이라곤 해도 왕족을 두는 곳이라 감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좋은 환경이었다. 그는 이미 태백과 정체불명의 문사를 같이 거두기로 결심한 차였다. 해를 끼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하나 순박하고 모자란 태백은 그를 몰랐다. 구금당한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몇 번의 탈출을 시도하다 제압당하기도 했다. 타낙한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결과는 오래지 않아 나타났다. 태화의 등장이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타낙한은 원급인 태백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크게 놀랐다. 태화는 약관도 되지 못한 소년이었다. 하나 타낙한이 놀란 건 나이가 아닌 다른 부분이었다. 차갑고 무표정한 태화의 얼굴은 그가 아는 누군가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한 핏줄이구나.’
그제야 우직한 태백의 얼굴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보였다. 이를테면 강직하고 올곧은 눈매 같은 것이었다.
“다들 늦는군.”
느슨하게 묶은 태화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타낙한이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틀린 웃음을 지은 타낙한이 버릇처럼 태화의 생각을 들여다봤다. 평소와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가 머릿속을 텅 비워 읽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른다. 다만 사실이 그랬다.
그래서 타낙한은 태화를 볼 때마다 항상 미약한 분노를 품었다.
태어난 이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겪은 적이 거의 없던 그였다. 또, 그 소수의 일이란 게 평생에 기억될 만큼 강렬하고 지독한 것이었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나 눈만은 얼음장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어느 잡것이 헛소리를 하였나. 타낙한은 그 반대였다. 반대일 수밖에 없었다.
이화가 사라진 이후, 두통은 그의 부재만을 기다렸다는 듯 유례없이 강해졌다. 아름다운 나날은 찰나의 춘몽으로 끝나고, 겪어보지 못한 지옥이 그를 찾아왔다.
이미 죽고 없는 자를 갈망하고 또 갈망하는 기분이란 끔찍하다 못해 구토가 났다. 그런데 이젠 그 대용품마저 제 곁을 떠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앗.”
“이런. 미안하다. 다른 생각을 하다 그만.”
타낙한이 태화의 손목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살짝 찡그렸던 태화의 미간이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갔다. 타낙한은 그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사실 태화는 그런 기색을 비친 적이 없다. 근거도 없다. 이건 순전히 타낙한의 생각이었다. 억측이라 해도 좋고, 과한 걱정이라 해도 좋다. 하나 어쩐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이 형제들은 제게 왔을 때처럼, 어느 날 훌쩍 사라질 것이라고.
타낙한이 발개진 태화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태백의 어깨가 굳었다. 외려 입맞춤을 당한 태화는 무반응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슬슬 태화가 어떻게 제 심안을 피하는지 눈치채기 시작한 타낙한이었다. 그가 눈동자만 움직여 태백을 보았다. 그는 아직도 탁자의 옹이만 노려보고 있었다. 저러다 옹이가 아래로 쑥 빠질 듯하였다.
‘태백은 상관없다.’
원급이라는 것이 아깝기는 하나 그뿐이다. 지한국은 이미 그가 필요 없을 만큼 공고한 무위와 세를 쌓았다. 하지만 태화는 달랐다. 그는 지한국이 아니라 타낙한, 자신에게 필요한 자였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막사의 입구가 열리고 소장군이 우르르 들어왔다.
“늦었군.”
엄밀히 말해 늦은 것은 아니나 타낙한이 늦었다면 늦은 거였다. 낯을 굳힌 소장군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되었다. 앉아라. 희소식이 있어 소집한 회의니 괜찮다. 우리 대단한 군사님께서-”
타낙한이 의도적으로 말을 늘였다.
“위금성 안으로 통하는 지하 비밀 통로를 발견하셨다는군.”
승리가 당연시되는 전투에 젖어 있다, 연패를 경험한 소장군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타낙한은 퍽 만족스럽게 웃었다.
소장군들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다들 위금성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긴 시간에 걸쳐 보수되고 증축된 철옹성에, 백호의 굳건한 수호가 더해져 공략할 방법이 보이지 않던 차였다.
모두의 눈이 태화에게 모였다. 무장들의 예기 어린 시선에도 그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초기에 예상했던 것보다 통로가 더 좁고 지반도 약하더군요. 기껏해야 한 번에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고, 중간중간 무너진 곳도 보였습니다.”
“즉,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침투할 수 있는 인원이 적겠군.”
“많이 잡아 다섯입니다.”
침음이 흘렀다. 무장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타낙한과 태화도 적극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좀체 이렇다 싶은 타개책은 나오지 않았다. 대화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던 때, 문득 타낙한이 말했다.
“그럼 아예 한 명만 보내는 건 어떠한가.”
“예?”
“한 명이요?”
“그래. 딱 한 명. 그럼 보다 은밀한 행동이 가능하고, 들켰을 때도 탈출이 용이하지.”
“그거야 그렇겠습니다만…….”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은밀한 행동에는 소수 정예가 정석이었다. 하지만 딱 한 명이라니. 고작 한 명의 무력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소장군이 멈칫했다.
“혹 한 명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다른 소장군이 물었다. 하나, 질문하는 그의 시선은 이미 태백에게 가 있었다. 그 기대대로 타낙한은 태백을 호명했다. 품에 안겨 있던 태화가 처음으로 움찔했다. 타낙한은 그를 모른 척했다.
“예, 전하.”
“홀로 갈 수 있겠나.”
“명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타낙한이 원하던 대답이었다. 그는 흡족하게 웃으며 우직한 충신의 표본이라 태백을 칭양했다. 그것으로 결론이 났다.
소장군들이 막사를 나간 후, 타낙한과 태씨 형제들만 남았다.
“전하, 잠시-”
“잠깐. 내 말을 먼저 듣거라.”
타낙한은 어떤 말을 꺼낼지 뻔한 태화의 말을 잘랐다.
“우선 백호에 대해 네 의견을 듣고 싶구나.”
소장군들은 모르는 두 번째 회의가 시작됐다. 논의는 타낙한과 태화의 독대나 다름없었다. 태백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요점은 단순했다. 백호를 어떻게든 하지 않는 한, 전쟁에서 승기를 잡긴 어려웠다.
“이쪽으로 포섭하는 건 불가능할까.”
“모릅니다. 백호에 대해 저흰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그가 금국 황제의 곁에 선 이유만이라도 안다면 다르겠습니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접선하느냐. 다른 방도를 모색하느냐, 인가.”
고민하던 타낙한의 마음이 전자로 쏠릴 즈음 사월린이 끼어들었다.
-회유는 모르겠지만 죽이는 것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귀가 솔깃한 소리였다.
‘뭔가 수가 있는 겁니까.’
그래, 하고 답한 사월린이 근거를 말했다. 과연 그럴듯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원급 무사인 태백은 백호를 죽일 수 있었다.
-문제는 저 녀석이 백호에게 칼을 겨눌 각오가 있냐는 거지. 신살(神殺)까진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중죄이며 업보다. 못해도 삼대까진 저주를 받을 것이야.
타낙한은 속으로만 답했다.
‘그거 잘됐군요.’
-잘되었다고?
‘녀석에게 각오는 필요치 않습니다. 필요한 건 이유입니다. 백호를 베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그리고 이유는 만들기 나름이죠.’
-…….
‘마침 적당한 게 제 품에 있군요.’
타낙한의 품에 있는 것. 태백이 죽고 못 사는 것. 사월린의 음울한 웃음소리가 타낙한의 뇌리를 울렸다.
-토사구팽이냐.
‘지한국이 제국으로 발돋움한 후 필요한 것은 태화뿐이니까요. 태백의 효용은 딱 이 전쟁까지입니다. 오히려 태화를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선, 그가 적당한 때에 사라져 주는 편이 좋지요.’
-지독한 것.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나야 금국을 정벌해야 할 이유가 있어 협력한다지만, 너는 대체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더냐?
그 말에 타낙한이 처음으로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