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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6화 (86/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6화

희열에 차 있는 타낙한에게 사월린이 현실을 일깨웠다.

-그렇다고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 이 녀석이 언제 깨어날지 정확히 아는 것은 상선뿐이다. 어쩌면 네가 죽은 후에 태어날지도 몰라.

“명심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수정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안에 든 것은 흑의 무복을 입은 사내였다. 피부가 흰 편이고, 얼굴은 매끈했다. 나이는 많이 잡아봐야 서른. 잘생긴 얼굴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평범함의 범주에 들어갔다.

“일단 옮겨야겠군요.”

-옮긴다고? 설마 진지까지 옮기겠다는 말인가?

“옮기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일종의 알 같은 것이라 안 될 것은 없지만.

잠깐 침묵한 사월린은 ‘그렇군. 옮기지 못할 이유가 없지. 나도 신수인지라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했다. 타낙한이 수정에 손바닥을 얹었다.

“영물들의 힘을 빌리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제가 여기 계속 머물 수도 없는 일이고, 언제 깨어나도 그에 맞춰 대응할 수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진짜 알을 쓰다듬듯 타낙한은 수정의 표면을 문질렀다.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 * *

지한국군은 일주일이 넘도록 잠잠했다. 날씨는 화창했다. 성벽 위로 올라가면 멀리 지한국의 진지가 눈에 들어왔다. 주의 깊게 봐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타낙한이 자리에 없군.”

“예?”

“미미하게 느껴지던 사월린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어. 무슨 볼일이든 간에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무륜은 고민했다. 지금 성문을 열고 지한국군을 급습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는 현 상태의 유지를 택했다. 내 힘을 다루는 것이 미숙하다는 점과 아군의 피해가 클 것을 예상한, 현명한 선택이었다. 기실 지금 승리한들 그는 아주 미미한 승리나 다름없다.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은 두 가지. 지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전선을 밀어내 영토를 넓히고 상대를 옥죄거나, 적의 수장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것.

급습하면 승리는 하겠으나 얻는 것은 소소할 따름이었다.

결국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말에는 발이 없었다. 타낙한의 부재는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불완전한 여유나마 누릴 수 있었다.

그 밤에는 소소한 놀이판도 벌어졌다. 위금성주는 아껴둔 식량을 풀었다. 병사들에겐 술과 고기도 배급했다. 모닥불에 삼삼오오 모인 이들 사이로 웃음꽃이 피었다. 희망을 되찾은 이들은 표정부터가 달라졌다.

“아니 가십니까.”

“너야말로 왜 안 가고 예 있느냐.”

“목련 님과 같은 이유겠지요.”

무륜이 태연히 답했다.

“나는 저들이 불편할까 아니 가는 것이고, 너는 그런 내가 신경이 쓰여 예 있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같은 이유더냐.”

“이런. 들켰군요.”

착각이 아니었다. 며칠 못 본 새 능글맞아졌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날, 머뭇거리던 손을 거두고 광실을 나간 것이 내가 아는 마지막이거늘.

“원래 저런 자리엔 높은 자가 끼는 게 아닙니다. 격려하겠답시고 자리를 잡고 앉아 진심 어린 충고를 하는 건, 그야말로 눈치 없는 짓이죠.”

무륜의 호위로 딸려 온 무사가 어깨를 흠칫했다. 그 옆에 선 다른 그림자가 애써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위중혁과 몽휼이었다. 모두 무륜의 최측근으로, 함께 사지를 헤쳐 나온 전우라 했다.

“한 명.”

“예?”

“여기에 한 명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나는 어째선지 상선의 사당을 떠올렸다. 내 옆의 수정에 잠들어 있던 신수. 흑의 무복을 입고 있던 현무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건 뭡니까. 신수로서의 어떤 예지력 같은 겁니까.”

그런데 정작 무륜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가 확 하고 나를 돌아봤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제 옆에 한 사람이 더 생긴다는 겁니까. 언제요? 어디서요?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여자입니까, 아니면 남자입니까.”

“무륜. 진정해라. 그런 것이 아니다.”

영민한 그는 ‘그런 것’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매끈한 옥면이 허물어졌다. 입매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안으로 곱았다.

그걸 보고야 깨달았다. 무륜은 여유 있어진 게 아니었다. 여유 있는 척을 하는 것뿐이었다. 전쟁의 승기를 잡고 모두가 어깨의 짐을 던 지금, 오직 그만이 가눌 길 없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 실언을 하였다. 미안하다.”

“…….”

“미안하다.”

무륜은 대답이 없었다. 몽휼과 위중혁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지레 찔려 눈을 부릅뜨자 둘은 언제 봤냐는 듯 눈을 원위치시켰다.

그러는 사이에도 무륜은 여전히 침묵했다.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떠난 이후 가끔 생각합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푹 꺼진 목소리였다.

“꼭 그렇게 가야만 했는지. 같이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은 아니었는지.”

“…….”

“그럴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가 변심하여 나를 그리 떠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나는 무슨 희망이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든 말이 아팠다. 음절마다 가득한 상처가 보였다. 그 앞에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쓸데없는 말로 목련 님의 심기를 어지럽혔군요.”

무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마 위의 어처구니를 밟고 선 그가 나를 돌아봤다.

“모다 부질없는 넋두리였습니다. 부디 잊어주십시오.”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소매와 두툼한 장포가 크게 펄럭였다. 나는 차마 따라가지 못하고 처마 끝에 웅크렸다. 아까보다 더한 침묵이 남은 셋을 휘감았다.

“백호님,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위중혁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 물을까. 무륜의 일이 있었던지라 바짝 긴장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떻게 지붕에 올라 계실 수 있는 겁니까. 왜 안 무너집니까?”

“…….”

나는 그제야 그가 내게 암컷이냐 물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몽휼이 위중혁의 옆구리를 된통 쥐어박았다. 위중혁의 눈매가 사나워졌으나 몽휼은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위중혁의 손이 검대에 얹어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기와는 땅을 구워 만든 것. 내가 밟는 기와는 부서지지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다. 내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는 상관없지.”

“그렇군요.”

납득한 위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몽휼이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깊은 고뇌가 느껴졌다.

하나 나는 막상 대답하고 나서야 위중혁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나름의 분위기 전환이었다. 눈치는 없지만 요령까지 없진 않았다. 나보다 반 박자 늦게 그를 알아차린 몽휼이 위중혁을 흘겼다. 위중혁은 여전히 담담한 신색이었다.

“어떻게 고개를 숙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백호님, 부디 저희 폐하를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하고말고. 하니 그리 말할 것 없다.”

나는 지은 죄가 없다. 하지만 무륜의 앞에서 완벽한 무죄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진실을 알면서도 그의 반응과 이후의 결과가 두려워 침묵하고 있는 내가 과연 티 없이 깨끗하다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나도 이만 가보겠다.”

나름 잔잔하던 심경이 복잡하게 얽혔다. 흔들림도, 고민도 없이 그저 앞만 보면 되었던 위금산에서의 생활이 환상처럼 여겨졌다.

* * *

상선의 사당에서 귀환한 타낙한은 무수히 쌓인 보고서와 마주했다. 반절은 남아 있던 장수들의 것이지만, 나머지 반절은 본국에서 온 것이었다.

전쟁 중임에도 굳이 예까지 처리할 문부를 보내오는 본국의 귀족들을 생각하며, 타낙한은 살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절반의 문부를 미구르에게 건넸다.

“땔감으로 써라.”

본국의 문부는 화톳불로 직행했다. 남은 절반의 보고서를 빠르게 확인하고 서명을 하던 그는 마지막 보고서에서 멈칫했다. 군사, 태화가 올린 보고서였다.

타낙한의 손이 탁자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가 미구르를 향해 회의를 소집할 것을 명하며 참석할 인물들을 일일이 지명했다. 군사. 대장군. 그 아래 다섯의 소장군. 군부의 최고위 일곱만을 모은 군사 회의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태백과 태화 형제였다. 그들은 마치 타낙한이 회의를 소집할 걸 알았다는 듯, 가장 신속하게 준비하여 중앙 막사로 왔다. 타낙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형제라지만 정말 다른 부류에 속하는 두 사람이었다. 키도 작은 편인 데다 입이 짧아 뭘 먹어도 많이 먹지 못하며, 성격도 예민한 축에 속하는 태화. 그는 전형적인 문사였다. 반면 형인 태백은 체격부터 거구에 근육질 몸을 가진 무인 중의 무인이었다.

타낙한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지으며 둘을 맞았다.

“일찍 왔군. 군사. 대장군.”

“예, 전하.”

태화가 대답했다. 태백은 고개만 우직하게 숙이고 제 자리로 갔다. 태백의 자리는 우측 첫 번째였고, 태화의 자리는 좌측 첫 번째였다.

“군사.”

자리에 앉으려는 태화를 타낙한이 불러 세웠다. 멈칫한 그가 타낙한을 봤다. 이미 한두 번도 아닌 것을. 그의 눈동자는 오늘도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타낙한이 몸을 열어 자리를 만들었다. 태화는 한숨 어린 낯으로 그 무릎에 앉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길기도 했다. 타낙한이 손을 뻗어 태화의 허리를 휘감았다. 관자놀이를 쑤시던 두통이 미약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가시는 걸 느꼈다.

이화만큼 완벽하진 않으나 현시점에선 가장 상급의 대용품이었다. 그 사실을 타낙한도, 태화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어떻게든 그들을 보지 않으려 탁자의 옹이만 노려보는 태백뿐이었다.

타낙한은 두 형제와의 첫 인연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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