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5화
무륜이 일그러진 낯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벌써 취하였나.
“많이…….”
짐승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많이 사랑하였느냐?”
“예.”
인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제 평생이 다 가고, 다음 생이 와도 잊히지 않을 사랑입니다.”
그가 말한 다음 생을 이화는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잊었다. 아주 까맣고도 하얗게.
콰직. 다소곳이 모으고 있던 앞발에서 튀어나온 발톱이 광실의 마룻바닥에 박혔다. 무륜의 시선이 튀어나온 나뭇조각을 향했다.
“미안하다.”
“기물은 부서지게 마련이죠. 사람을 불러 고치면 그만입니다. 그보다 심기를 어지럽힐 이야기를 꺼내 외려 제가 송구합니다.”
“아니. 아니다.”
이화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더 듣고 싶다.”
짐승의 눈에 간절함이 서렸다.
“네가 사랑했다던 인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다오.”
“……듣기 저어되지 않으십니까?”
“전혀.”
그럴 리가 없는데. 무륜은 의아했지만 듣다 보면 저어되겠지 싶어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오히려 열중했다. 마음은 여전히 타는 듯하고 목 안쪽의 그을음도 여전하지만, 이화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고 싶진 않았다.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지난 5년. 이화에 대해 누군가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긴커녕, 실수로라도 언급하지 않도록 노력했음을. 무륜도 이럴진대 부하들은 오죽했을까. 그들은 아예 ‘이화’라는 이름 두 자를 혀에서 지웠을 터였다.
이름에 대한 기피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지금도 여전했다. 이화에 대해 이것저것 늘어놓으면서도 이름은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고한 황제는 사라질 테니까. 대신 연인 하나 지키지 못한 초라한 사내만이 남을 것이다.
일방적인 넋두리에 가까운 대화가 무르익었다. 잔이 오가고 무륜은 점점 취했다. 그 열 배를 마신 이화는 멀쩡한 신색으로 흐느적거리기 시작한 무륜을 지켜봤다.
그의 눈이 느리게 끔벅였다. 나직하게 이어지던 말이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이화는 이제부터 제가 말할 차례임을 알았다.
“난 말이다. 원래 인간을 싫어했다. 그는 신수 중에서도 백호의 천성이지. 나는 온 세상을 아울러 생각하고 균형을 맞추려 하지. 다른 것들은 그냥 내버려 둬도 저들끼리 다 알아서 한다.”
느리게 여닫히던 눈꺼풀이 마침내 다시 뜨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양지에는 쑥이, 응달에는 버섯이, 무덤에는 고사리가 자라는데, 오직 인간만이 그런 균형에서 벗어나려 애를 쓴다.”
옆으로 기우는 몸을 꼬리로 받친 이화가 닫힌 격자창을 봤다. 창이 열리며 주인을 두지 않은 영물 두 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개와 고양이였다.
그들은 이화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납작 숙이곤 서로 협력하여 무륜의 몸을 침상까지 옮겼다. 여태 한 번도 쓴 적 없는 침상은 깨끗했다.
“그중에서도 너는 혼돈과 같은 뒤틀림을 원하는구나.”
무륜은 저가 돌아올 것을 믿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라면 염라대왕을 협박해서라도 다시 올 것이라, 그리 말했다. 그런 무륜의 앞에 저가 있었다. 이화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침상 옆에 몸을 웅크렸다.
바람 같은 자유. 그 울림이 당과보다 달았다.
* * *
새벽녘. 무륜은 추위에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임과 동시에,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는 한숨을 삼키며 옆을 돌아봤다. 얌전히 엎드려 잠든 거체가 눈에 들어왔다. 무륜은 가만히 백호를 응시했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어스름한 시간의 애매함 탓일까. 그는 제 마음이 물러진 걸 느꼈다. 동시에 인정했다. 이 백호를 보면 자꾸 그가 떠올랐다.
백목련이라던 이름 때문인가. 순수하게 저가 좋다, 온몸으로 내비치고 있기 때문인가. 닮은 곳이 없다 생각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닮은 곳이 보였다.
그의 눈은 언제나 깊은 검은색이었다. 귀가 나비처럼 팔랑거렸고 꼬리는 기분 좋음을 가득 담아 슬렁거렸다. 기억 속에 있는 말과 비슷한 말들은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기도 했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꽤나 의미심장했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백호는 식혜를 좋아했다. 사실 식혜만이 아니다. 당과, 약과, 떡에 조청까지. 달콤한 주전부리라면 사족을 못 썼다. 신수는 굳이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식사는 하지 않으면서, 위금성주가 구절판에 한과를 두고 먹을 때면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곤 했다.
시선을 느낀 위금성주가 ‘드릴까요?’ 하면 마지못해 먹는 척 혀를 내밀었다. 그러나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까지 숨기진 못하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무륜이 멈칫했다. 흩어 놓았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모으고 보니 확실히 닮은 점이 많았다.
“…….”
무엇보다, 함께 있으려 하는 마음의 형태가 가장 닮았다. 짐승은 제게 말을 걸고 싶어 했고, 제 목소리 듣길 즐겼다. 그러나 그 이상은 또 바라지 않았다. 다만 곁에 있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이, 그에게서 이화를 보게 했다.
침상에 걸터앉은 무륜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백호의 몸에 닿을 듯하던 손은 허공에서 멎었다. 그는 오래도록 고민하다 결국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발소리 없는 걸음이 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힌 후. 인기척이 보랑을 따라 멀어졌을 때, 짐승은 눈을 떴다.
이화는 무륜이 일어날 기미를 보일 때부터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의 귀가 축 늘어졌다. 쓰다듬어 줄 것도 같았다. 아니, 분명 쓰다듬어 줄 분위기였다. 그런데 어째서 마지막에 손을 거두었나. 이화는 애가 타며 속이 답답해졌다.
‘혹 내가 짐승이라 그러하나.’
신수라곤 해도 외견은 거대한 호랑이다. 또 인간들은 겉모습에 현혹되기 쉬웠으며, 무륜 또한 인간이었다.
‘인간이 되고 싶다.’
수정에서 막 깨어났을 적처럼 민둥한 피부와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싶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인간을 경멸하던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늘. 한 번 날개를 펼친 자유는 그 끝을 몰랐다.
짐승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와 같은 인간은 될 수 없다. 그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비슷하게 취할 수 있다. 사월린을 보라. 녀석은 무려 수천 년이나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이화는 동이 트고 해가 비칠 때까지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한 고민 자체가 그가 원하는 변용의 초석이 되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11장 닮은 곳 완결>
일곱 번째 공성전마저 무위로 돌아간 후, 타낙한은 조용히 진영을 벗어나 북으로 향했다. 이동은 백호의 등장 이후 계륵이 되었던 영물들의 도움을 받았다.
백호가 개입한 이상, 더 이상 전장에선 영물을 쓸 수 없었다. 사월린이 날씨를 조종하고, 염력을 사용하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듯, 영물들의 통솔권 또한 백호 고유의 힘이었다. 그가 명령하면 영물은 거부할 수 없었다.
목적지는 천태백산 정상이었다. 산맥의 줄기를 따라가면 되는 것이라 이동에 어려움은 없었다. 당도한 곳엔 하얀 대저택이 있었다. 길 안내를 맡은 병사는 이곳을 ‘사당’이라 불렀다. 그것도 상선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힐긋. 타낙한의 시선이 저택 앞의 청옥 비석을 향했다. 몇 개의 계단과 울타리에 둘린 비석은 박살이 나 있었다. 그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대해 알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 타낙한은 사월린과 새로이 계약을 맺었다. 정확히는 선조로부터 이어진 계약을 보다 강하게 하기 위해 날을 받고 제를 올렸다. 위문현이 400여 년 전 했던 것과 완벽하게 같은 것이었다.
그 결과 사월린과의 연결이 보다 선명해졌고, 힘이 2할 정도 더 강해졌다. 물론 대가도 있었다. 이곳은 그 대가를 추가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미구르를 보냈던 곳이었다.
하지만 비석을 부수고 사당을 둘러보다 발견하게 된 것은, 철저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12장 재회
광실에는 두 개의 수정이 있었다. 하나는 어떻게 봐도 안에서 뭔가가 튀어나온 듯, 깨진 수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안에 사람을 담은, 멀쩡한 수정이었다.
타낙한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이거 놀랍군.
새 계약 이후에는 이런 것도 가능했다. 머릿속을 울리는 신비로운 목소리를 향해 타낙한이 되물었다.
“설마 진짜입니까?”
-그래. 신수다. 그것도 이전까진 없던 녀석이지. 새로 태어난 백호와 함께 2세대가 될 녀석인 것 같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자세히는 무슨. 네가 궁금한 건 어차피 이 녀석을 네 뜻대로 다룰 수 있겠느냐는 거겠지. 결론부터 말해, 가능하다.
상선이시여. 타낙한의 몸이 희열로 떨렸다. 그는 제 뒤에 불가해한 존재가 선 것을 느꼈다. 역시 하늘은 자신의 편이었다.
-갓 태어난 신수는 신수로서의 천명만 간직한 상태다. 쉽게 말해 하얀 화선지와 같지. 거기에 무엇을 그릴지 알려주는 것이 상선의 역할인데, 지금 그는 오수에 든 상태다.
타낙한은 사월린의 말을 찰떡같이 이해했다. 상선은 지금 없다. 그리고 신수는 날개 달고 태어나는 것들처럼 ‘각인’이 가능하다. 마치 자신을 위해 안배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녀석이 태어나기만 한다면.’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들통난 혈족의 진실로 인해 술렁거리는 민심과 본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전서 또한 잠잠해질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갑자기 튀어나와 판을 엎은 백호의 대항마로도 쓸 수 있다.
명분과 실리. 이 신수는 그 모두를 자신에게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