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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4화 (84/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4화

우드드드득.

이변은 성문 앞에서부터 일어났다. 마치 거대한 돌고래 떼가 땅 밑을 무리 지어 가듯 불쑥불쑥 솟구친 땅이 눈과 함께 뒤섞이며 파동처럼 지한국군의 발밑을 무너뜨렸다. 궁수들이 쓰러졌다. 불화살이 떨어지고, 쓰러진 병사들의 비명이 밤하늘을 갈랐다.

사실 무륜의 공격 자체에 살상력은 적었다. 그저 땅이 흔들리고 옅게 무너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한국군의 체감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 난 이후부터 내내 딛고 살던 땅. 무슨 일이 있어도 굳건하리라 은연중에 믿던 그 땅이 흔들리는 공포.

새벽이 지나 해가 떴을 때, 패퇴하여 물러나던 지한국의 모습은 실로 처참했다.

무륜은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담담히 응시했다. 몸에서 휘몰아치는 힘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처음으로 말에 올랐을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이제 갓 받은 참이라 온전히 다루지 못하는 게 이 규모다. 능숙해지면 과연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중독돼선 안 된다. 너무 의존해서도 안 돼. 이는 빌린 것일 뿐. 내 힘은 될 수 없다.’

잠깐 방심하면 욕망이 움틀 것 같아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무륜은 지한국이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이화에게 힘을 돌려주었다. 이화는 거절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네가 필요할 때마다 이 힘을 네게 넘겨주마. 대신 그 날 하루가 가기 전에 나를 찾아와 힘을 돌려주렴.”

이화가 무륜에게 준 것은 제힘의 반절이었다. 나머지 반절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사용할 순 없다.

본래 하나였어야만 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나눈 힘이다. 그 상태로 어느 한쪽만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러나 양쪽에서 사용하게 되면 그 불완전함으로 엄청난 반대급부가 발생할 터였다.

‘그로 인해 다치는 건 아마 약하디약한 인간의 육신을 지닌 무륜 쪽이겠지. 그러니 절대 남은 힘은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그저 덩치만 큰 짐승과 다르지 않게 되더라도.’

이화는 제 각오가 신기하면서도, 그것과 별개로 이 사실을 무륜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관두자. 어차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결론은 쉽게 났다. 그걸 말하면 힘을 넘겨줬을 때의 자신의 상태까지 말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약조할 수 있겠느냐?”

이화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말하지 않은 것과 거짓말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 생각하며. 그를 모르는 무륜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예.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 이후, 지한국의 공세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날씨와 염력도 거대한 땅의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심지어 계절도 좋지 않았다. 여름이었다면 금국 진영만 가물게 하여 식수를 빼앗았을 테지만 지금은 겨울이다. 십 년 만의 폭설로 사방에 눈이 가득했다.

결국 타낙한이 할 수 있는 공격은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를 일으키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바람을 불러오는 것이 다였다.

타낙한은 별수 없이 정공법으로 돌아왔다. 날카롭게 벼린 돌창이 허공에서 금국군을 노렸다. 그러나 이전 같은 사기 진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함성은 오히려 위금성에서 터져 나왔다.

거대한 백호를 위시한 황제가 발을 굴렀다. 눈을 뚫고 솟구친 땅이 뾰족한 창이 되어 지한국군을 공격했다. 그들이 서 있던 영역은 마치 거대한 가시밭처럼 변했다.

흙으로 이루어진 창에 몸이 꿰뚫린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한 폭의 지옥도였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하늘을 적으로 돌리는 건 무서운 일이나 그게 어디 땅만 할까. 땅을 적으로 돌리면 발 디딜 곳이 없는 것을.”

이화가 혀를 찼다.

지한국군은 기겁을 하여 후퇴했다. 여섯 번째 공성전도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부턴 또 다를 것이다. 이화의 힘에 익숙해진 무륜은 슬슬 역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으면 좋으리까.”

무륜은 이화에게 극진했다. 첫 만남부터 내내 태도는 정중했으되, 지금은 거기에 약간의 애정과 경외가 더해졌다. 이화는 심이 들떴다. 종류를 따지기도 뭣한, 굳이 분류하자면 전우애에 속하는 애정에도 발가락이 곰지락거리고 엉덩이가 굼실거렸다.

그는 어느 순간 제 마음에 불씨 같은 것이 생긴 것을 느꼈다. 좁쌀 같던 그 마음은 무륜이 옆에 있을 적마다 봄비 맞은 죽순처럼 자라더니,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커져 버렸다.

이화는 제 마음을 들여다봤다. 거긴 이미 길이 나 있었다. 무륜을 향해 뻗어진 태로(太路)였다.

“고마우면 나랑 대작이나 한번 하자. 다들 잘 대해주긴 하는데 대화 나눌 사람이 없어 외롭구나.”

이화는 뻔뻔하게 무륜을 봤다.

“오늘 밤에 술상을 봐 오라 하겠습니다.”

이화는 실룩거리며 솟는 입매를 단속하느라 갖은 애를 썼다.

* * *

해가 일찍 지는 겨울이다. 하지만 그 날 해는 어찌 그리 더디게 지던지. 이화는 서산 너머로 갈 생각을 않는 해를 보며 꼬리를 슬렁거렸다.

‘저놈의 해는 내일까지 저기 떠 있을 셈인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백호를 보며 오늘의 경호 담당인 몽휼은 꽤나 복잡한 심경이 됐다. 닮은 구석이라곤 황제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정도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 거대한 백호의 등판을 볼 때마다 자꾸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분의 빈자리가 그만큼 큰 게지. 폐하께도, 내게도, 그 사람에게도.’

몽휼은 ‘그 사람’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왔다. 눈치는 더럽게 없지만 대나무처럼 올곧은 사내. 그 사내가 변심했다고 누가 고하면, 그렇게 고한 놈을 망설임 없이 잡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

하지만 천하의 둔치라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조차 뒤늦게 알아차렸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물론 그는 좋아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가망도 없고 희망도 없는, 꽉 닫힌 외사랑.

‘하나 위중혁이라면 그마저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겠지.’

오히려 담담히 제 마음을 파묻고 그 위에 서서 두 사람의 등을 지켰을 인간이 위중혁이다. 몽휼은 숨이 막혔다. 하여튼 빌어먹을 투구벌레였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광실 밖의 보랑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외견만큼이나 정갈한 걸음. 무륜이었다.

그는 손수 주안상을 들고 왔다. 뒤로는 술병을 든 시비가 줄줄이 따랐다. 그의 시선을 받은 몽휼이 서까래의 밀영군에게 눈짓했다. 광실에 있던 모두가 빠르게 물러났다. 그를 본 이화가 마침 잘됐다며, 저들은 제 곁에 붙여둘 필요 없다 했다.

“안 그래도 사람 손이 부족할 텐데. 난 신경 쓸 필요 없다. 예서 감히 누가 내게 해를 끼칠 수 있겠느냐.”

“하오나.”

“됐다. 내가 귀찮아서 그렇다. 까마귀 같은 것들이 머리 위에서 푸다닥거리니 정신만 사납다.”

거리가 멀어져 그 뒤는 듣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복면 아래 가려진 밀영군들의 낯이 죄 풀어졌다. 백호님은 금군을 두고 노란 딱정벌레라 하셨다. 그래서 저들은 바퀴벌레라도 될 줄 알았는데.

‘까마귀는 딱정벌레를 잡아먹지.’

싸우지도 않고 이긴 기분이었다. 물러나는 밀영군의 몸놀림이 가벼웠다.

그런 밀영군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본 몽휼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까마귀도 뭐 썩…… 아니, 됐다. 그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 * *

무륜은 주안상을 놓고 이화의 술잔부터 그 앞에 두었다. 옆구리에 끼고 왔던 은 대야가 이화의 술잔이었다.

이화는 퍽 만족스럽게 웃으며 무륜이 술을 따르는 걸 지켜봤다. 대야인지라 시비들이 두고 간 술병을 몇 개째 까 넣어도 아직 반밖에 차지 않았다.

“이만하면 되었다. 내 원래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러십니까.”

무륜은 고개를 끄덕이고 직접 제 잔을 채웠다. 아니, 채우려 했다. 그 전에 슬렁거리며 나타난 꼬리가 그의 손에서 술병을 가져갔다. 이화가 무륜의 잔을 채웠다.

이화의 고개가 먼저 아래로 떨어지고 무륜은 반 박자 늦게 잔을 비웠다. 마시면서도 그의 눈은 이화에게 가 있었다. 드넓은 광실이 좁게 느껴질 만큼 커다란 몸이었다. 백호는 앞발을 다소곳이 모으고 잔뜩 옹송그렸다. 어떻게든 무륜과 마주 앉기 위해서였다.

그게 귀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짐승은 제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본인은 잘 감췄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 위중혁마저도 쉬이 알아차릴 호의였다.

무륜은 꽤나 고민스러웠다. 이 신수가 제게 품은 감정은 날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그를 계속 모르는 척해야 할까. 아니면 한발 앞서 선을 그어야 할까. 신수를 위해서도 후자를 택하고 싶지만, 그다음의 일이 염려되었다.

전쟁 이후 처음 잡은 승기였다. 오롯이 눈앞의 신수가 이루어낸 결과였다. 마음 상한 그가 이곳을 떠나 위금산으로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그 이후의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지금 금국의 명운은 눈앞의 백호에게 달려 있었다.

“전에 흘러가는 말로 언급한 적이 있었지요.”

하여 무륜은 최대한 에둘러 선을 긋기로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화의 귀가 팔락였다.

“제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 막 움을 틔운 목련 같은 사람이었죠. 그때 저는 낙망하고 낙심하여 비루먹은 말보다 못한 신세였습니다. 동경을 보면 술 취한 봉두난발의 사내가 있었습니다.”

무륜이 이번엔 직접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넘칠 듯 아니 넘칠 듯 아슬아슬한 수위였다. 그는 독한 술을 단번에 비웠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헌앙한 풍모의 만인지상이 보이더이다.”

선을 긋기 위한 무륜의 고백은 이화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백호는 제 심장이 벌렁거리는 이유가 독한 술 때문인지, 아니면 무륜의 나직한 고백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백호가 고개를 들었다. 짐승보다 사람에 가까운 검은 눈동자가 무륜을 향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무륜은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짐을 느꼈다. 깊고 깊은 눈. 저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찬 눈. 저를 만인지상으로 만들던 눈과 꼭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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