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3화
‘그는…… 마음의 병이구나.’
생각만 하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병의 원인에 대해 짐작이 간 까닭이다. 내 전생이라던 인간이 지한국에서 죽고 난 후의 시간과 그가 웃지 못하고 보냈다던 시간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외부 복도 옆을 가로질렀다.
내 덩치론 저택에서 갈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정원 아니면 그가 내준 광실뿐이었다. 해서 뭔가 주고받은 말이 없음에도, 그와 내 걸음은 자연히 내가 머무는 광실을 향했다.
광실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느려졌다. 위금산을 넘던 때와 같았다. 어쩐지 숨이 막혔다. 기억도 없고, 미련도 없는데, 그를 향한 애틋한 마음만 선명했다. 이 감정에는 이름이 없다. 애당초 감정이라 불러도 좋을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의식적으로 웃지 않으려 했습니다.”
주변 풍경처럼 얼어붙은 적막을 깨며, 무륜이 입을 열었다.
“그가 죽고 웃는다는 것 자체가 어떤 죄악처럼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하든, 어차피 웃을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걸음이 무거웠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저건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과 동시에, 확실히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날이 춥습니다. 들어가시죠.”
“그래.”
나는 멍청이처럼 고개만 꾸벅거렸다.
* * *
그 밤, 꿈에 무륜이 찾아왔다. 기본적으로 음울함이 맴도는 지금과 달리 모든 것이 봄처럼 화사한 무륜이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어느새 알몸이 된 그가 내 위에서 나른하게 웃었다. 나는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소리 높여 교성을 내뱉었다. 남우세스러워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꿈이었다. 그럼에도 깨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영영 여기 있었으면 싶었다.
곧 져버릴 봄꽃을 보듯 무륜이 나를 봤다. 영원한 봄을 우러러보듯 나는 무륜을 봤다. 곧 무륜은 무엇이 그리 안타깝고 슬픈지 울기 시작했다. 당황하여 손을 뻗었다. 손은 목적한 곳에 닿지 못하고 애먼 허공만 할퀴었다.
무릎을 꿇은 무륜이 머리를 고정한 동곳을 확 뽑았다. 결 좋은 머리칼이 크게 출렁이며 탄탄한 몸을 휘감았다. 헛숨을 삼켰다. 심을 뒤흔드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데, 그가 내게 동곳을 내보였다. 그러곤 입술을 뻐끔거렸다.
‘네 뭐라는 것이냐.’
물속에서 말하고 듣는 것 같았다. 무어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안 들린다. 네 무어라 하는지 내 들리질 않는다.’
애간장이 다 녹는 듯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와중, 마치 기적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온다지 않았어. 네 온다 했으니 올 사람임을 나는 안다. 그러니 죽지 않을 것이다. 살 것이다. 악착같이 살아 이 생이 다 하기 전에 널 다시 보리라.”
기적이라 느꼈던 음성이 비수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오로지 그리움과 애달픔뿐인 애원은 내게 닿는 순간, 죄악감과 부채감을 이끌어냈다. 그러자 내내 닿지 않던 손이 다시 닿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를 안아 달래며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였구나. 그것도 아주 큰 잘못을 하였어. 한데 그게 뭘까.’
그 답은 끝내 알지 못했다.
귀를 찢는 종소리에 잠을 깼다. 벌떡 일어나 앞발로 격자창을 열었다. 밖이 온통 환했다. 성벽 너머에서 날아온 불화살 때문이었다. 바람의 힘을 입어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불 리 없는 남동풍. 사월린의 힘이었다.
크르르르.
낮게 목을 울리곤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무륜은 이미 앞장서서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불을 끄라, 궁수를 노리라, 명령을 쏟아내는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했다.
나를 써라. 차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간접적인 도움이라면 자기합리화로 천명도 속일 수 있지만, 직접적인 도움은 아직 무리였다. 완벽하게 천명을 밀어내기에 지금의 내 자아는 너무 불완전했다.
혼은 아주 오래되었으되 자아는 몇 년 살지도 못한 인간이라. 머지않은 미래엔 이것을 완벽히 지우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변화와 역설에 헛웃음이 났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다. 언젠가 전생의 기억을 전부 밀어내고, 고고하고 완벽한 백호가 되겠노라고.
“백호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러다 내 말을 떠올렸는지 아차 하며 바로 정정했다.
“목련 님, 도와주십시오.”
나는 침묵했다. 이전과는 달랐다. 이건 간접적으로 개입해선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안의 천명이 성을 냈다.
안 된다. 그놈은 타락했고 스스로를 더럽혔으나 너는 아니지 않나. 백호로서의 본분을 지켜라. 중립을 지켜라.
“아니…… 되시는 겁니까.”
무륜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그리 말했다. 조금 망연하고 희미하게 낙심한 그 얼굴을 봤을 때, 내 안의 천명이 잠깐 튕겨 나갔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된다. 안 되는 것도 다 되는 거다!
“사실 나는 하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상선이 그러라 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법률로 정해진 것은 아니나, 내 천명이 그렇다.”
입술을 꾹 깨문 무륜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 내 생각이 짧았다. 구명의 은혜도 잊고 염치없게 계속 기대려 했다. 이런 말을 하려 함이다. 그를 막아 세우며 얼른 말을 이었다.
“방법이 하나 있다. 내 힘을 네가 사용하는 것이다.”
“예?”
“사월린과 타낙한이 쓰는 방법과 비슷하나, 정확히는 그보다 상위 격의 계약이지. 사월린은 지한국의 시조와 이 계약을 했다. 핏줄을 통해 내려와 많이 희석된 결과가 지금의 타낙한일 것인즉, 일단 하기만 한다면 이능으로는 타낙한에게 지지 않는다.”
무륜의 입이 벌어졌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기뻐서 활짝 웃을 줄 알았는데. 나는 조금 긴장하여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상성 같은 문제나 힘을 다룬 기간의 차가 있겠지만, 나는 사월린과 달리 최대 반절까진 넘겨줄 수 있다. 물론 반절이래도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힘이라 온전하게 사용하진 못할 테지. 하나, 그 정도만 되어도 이 대륙에서 널 대적할 자가 없을 게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했다. 문제는 반대급부였다.
“다만 한 가지, 금기가 있다.”
무륜이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나를 봤다.
“그렇게 되면 반대로 나는 힘을 전혀 쓰지 못한다. 말 그대로 전혀. 실수로라도 쓰게 되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네게 갈 것이다. 인간의 몸에 있던 힘이 강제로 내게 옮겨 올 것이니. 쉽게 말해, 네 안이 진탕되겠지. 아마 죽을지도 모른다.”
“하겠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당신께서 힘을 쓰면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맞다.”
“그럼 하겠습니다.”
어조는 가벼운데 날 향한 믿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한데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그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아무리 신수라지만 어찌 이리 나를 믿나. 하나 질문을 던진 것은 무륜 쪽이고, 그 질문은 송곳처럼 내 안 깊은 곳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그러게. 왜일까. 천치처럼 자신에게 되물었으나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전생의 제가 인연이라던 인간을 사랑했던 겁니까?’
‘아니.’
과거의 상선이 내 대답을 대신했다.
‘아마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 * *
밤을 틈탄 야습은 이제까지 지한국의 공격에선 없던 방식이었다. 비겁하기도 하고, 지탄받을 일이긴 했으나, 지금은 전시다. 오히려 이제껏 정직하게 낮에만 공격했던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굳이. 낮에만.’
어쩌면 지한국은 거대한 투망을 펼쳐둔 것인지도 모른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한 거지. 정말 필요한 순간의 일격을 위해.’
추측이었지만 꽤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어제 야습을 받았을 땐 간담이 서늘했다. 즉흥적인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지한국의 공세는 사나웠고 불화살이 쉴 새 없이 하늘을 날았다. 만약 백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제부로 금국의 이름이 역사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무륜은 심을 진정시키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차피 이젠 다 지난 일이다. 야습은 실패했다.
새벽의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물론 이제까지 있었던 대부분의 전투가 일방적이긴 했다. 지한국의 우세로. 하나, 어젯밤의 전투만큼은 달랐다.
지한국을 위한 바람이 불었다. 투석기로 쏘아 올린 것도 아닌데, 불붙은 짚단이 홀로 날아올라 금국 진영에 떨어지기도 했다.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날씨를 조종하고 염력을 사용하는 이능에 이미 무수한 패배와 절망을 맛본 병사들이었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며 그들의 손에서 창이 떨어지기 전, 무륜은 백호로부터 거대한 힘을 넘겨받았다.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불 속에 던져진 달걀처럼 터질 것 같기도 했다.
백호는 안절부절못하며 ‘처음만 이렇다. 곧 괜찮아진다’ 했다. 어째 저보다 더 아프고 불안한 모습에 무륜은 고통을 내색할 수 없었다.
감내한 보람은 있었다. 힘의 전이가 끝난 후, 무륜은 본능적으로 힘을 어찌 사용하면 좋을지 알게 됐다. 거미가 집 짓는 법을 알고, 철새가 자신의 가야 할 길을 아는 것과 같았다.
천천히 몸을 숙인 무륜이 맨땅을 한쪽 손바닥으로 짚었다. 차디차야 할 땅에서 냉기 대신 박동이 전해졌다. 땅은 새 주인을 의아해하면서도 익숙한 힘을 반기었다.
무륜은 망설임 없이 힘을 사용했다. 그가 하려는 건 아주 단순했다. 지한국 진영의 땅을 한 번 엎는 것. 이제 막 힘을 받아 섬세한 조절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컸으나 상대편은 그를 알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