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2화
나는 위금성에 거처를 받았다. 무륜은 제 방을 따로 받고도, 그다음 날까진 내 옆에 머물렀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그가 옆에 있으니 마냥 좋았다. 하지만 그 후로는 도통 만나지 못했다. 가끔 인사차 들른 것이 다였다.
이해는 했다. 지금은 전시고, 바로 코앞에 지한국군이 와 있다. 어깨가 무겁다 못해 바스러질 지경일 것이다.
그는 이미 두 번을 패퇴했고, 그의 손엔 그 패퇴의 과정에서 잃은 것보다 더 많은 목숨이 여태 달려 있다. 수만 명이 넘는 군대가 그의 말 한마디에 초개처럼 질 수도, 열화처럼 타오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 할 말이 있다고.”
“할 말이라기보다 청이 하나 있습니다.”
눈 아래가 거뭇했다. 홀쭉한 뺨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자의 신색이었다. 미간을 팍 찌푸렸다.
“잠깐. 그 전에 식사는 들었나?”
“아직입니다.”
“그럼 먹은 후에 듣겠다.”
“혹 시장하십니까. 열흘 동안 식혜나 수정과 외엔 딱히 드신 것이 없다 전해 들었습니다.”
“신수는 굳이 뭘 먹지 않아도 연명할 수 있다. 내가 말한 식사는 네 식사란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다. 정 시간이 없다면 먹으면서 대화해도 상관없다.”
민가의 아이들조차 먹으면서 말하는 예의 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하나-
“인간들의 예의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아무튼 네가 뭔가 먹기 전엔 난 아무것도 듣지 않을 것이다.”
탁. 꼬리가 힘 있게 바닥을 쳤다. 결국 무륜은 상을 들이라 했다.
무륜이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 어쩌면 밥 먹는 것도 저리 기품이 넘칠까. 짙은 눈썹이며, 오뚝한 콧날 하며, 참으로 잘난 사내였다.
‘이런 사내가 내 인연이었다고.’
혼에 새겨진 듯 강렬한 직감 외엔 어떤 증거도 없다. 기억도 전무하다. 굳이 꼽자면 햇살 아래서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던 그의 모습인데, 증거랍시고 내밀기도 민망했다.
드득.
버릇처럼 발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마룻바닥이 패며 흉한 소리를 냈다. 젓가락을 움직이던 무륜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머쓱하여 깔고 앉은 비단 보료를 슬그머니 밀어내 팬 자국을 가렸다. 무륜은 그를 알고도 모른 척 식사를 재개했다.
상선이 말했다. 내 인연을 만나면 전생의 나와 백호로서의 나를 분리할 수 있을 거라고.
그의 말이 옳았다. 번개가 지난 후 하늘이 갈리는 듯한 그런 선명한 나뉨은 아니었으나, 내 안에선 분명 어떤 변화가 일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한 변화였다.
한 폭 풍경화나 산산조각 낸 도자기의 파편 같은 기억은 기억이라 부를 수 없었다. 온전히 내 것 같은 것은 나를 향하던 그의 미소뿐. 나머지는 마치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느낌이었다.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내 인연이 맞는 것 같은데, 나조차도 확신을 못 하는 상황에서 죽었다던 네 정인이 전생의 나였다고 주장해 봤자…….
“…….”
어쩐지 상상 속 무륜이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차마 내색은 못 하는데 눈이 미친놈…… 아니, 미친 백호를 보는 듯했다.
“백…… 아니, 목련 님.”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상을 물린 그가 정갈하게 앉아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진중하여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쳤다. 그래 봤자 앞발을 보다 정갈하게 모으는 거였지만.
“공평과 정의를 관장하시는 신수께 이런 청을 드리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청할 수밖에 없는 제 상황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안다. 기실 그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찾았을 때부터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다.
“감히 청합니다. 금국의 힘이 되어주십시오.”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하는 척 지난날을 되짚어봤다.
나는 내 천명 때문에 지한국을, 정확히는 타낙한을 주시해 왔다. 타낙한이 사월린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 후엔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바늘 하나라도 순리에 어긋남이 생기거든 개입하리라, 그렇게 으르렁거렸다.
사슬이라 들었으나 그리 여기지 못했던 천명이 드디어 사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사월린은 안다. 내 천명도 알 것이다. 그래서인지 타낙한은 사월린의 힘을 빌려 쓸지언정 결코 선은 넘지 않았다.
“압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염치없는 청인지. 하지만 부디 바로 거절 마시고 생각이라도 해주십시오. 이리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나라의 위에 선 만인지상이 무거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백호였다.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이 또한 내 전생이 기억하는 것이지.’
그래서일까.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무륜을 보자 당장 속이 쓰렸다. 이성에서 오는 분노가 아니기에 납득하여 가라앉힐 수도 없었다.
“고개 들어라. 네 뭘 잘못했다고 그리 바닥을 보나.”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이런 기분을 야기한 원인을 아주 단순하게 없애는 것뿐.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응시해 오는 시선에 숨이 턱 막혔다.
드드득.
보료로 가린 보람도 없이 발톱이 재차 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를 만나기 전의 나였다면 ‘불가하다. 나는 세상의 중심에 서서 균형을 잡는 존재다. 인간들의 사사로운 이권 다툼에 끼어들 수는 없다’고 했을 것이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무륜을 만난 후다. 나는 무륜을 돕고 싶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욕망이 천명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너는 타낙한의 이능이 사월린의 것임을 알고 있느냐?”
큰 그림을 위한 밑 작업이었다. 위금산을 ‘성산’이라 칭하며 개소리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애초에 타낙한이 사월린의 힘을 쓰는 것은 신수 입장에서 꺼림직할 뿐. 나서서 제재할 일은 아니다.
“예?”
“몰랐구나.”
그러나 나는 그를 철저히 포장했다. ‘사월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꽤 그럴듯한 핑계이자 명분이 됐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이지. 애당초 지한국의 시조가 거래한 것은 상선이 아니라 사월린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무륜이 물었다.
“증거는 있으십니까.”
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이용해 먹기 위해 묻는 거였다.
“우스운 소릴 하는구나.”
자제하지 못한 꼬리가 기분 좋게 슬렁거렸다.
“내가 곧 증거 아니겠느냐.”
* * *
무륜은 은밀히 소문을 퍼뜨렸다. 민심을 움직이는 데는 대대적인 공표보다 이쪽이 더 효과적이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게 퍼졌다. 또 중간에 와전되고 부풀려져, 종래엔 사월린이 타낙한과 손잡고 이 세상을 다시 멸망시키려 한다는 데 이르렀다.
지한국군이 술렁였다. 입단속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간혹 성벽 위로 올라와 느릿한 걸음으로 어슬렁거리는 거대한 백호의 존재가 그들의 눈에 아로새겨졌다.
내가 간섭에 그리 소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무륜은 틈만 나면 나와 함께 도성을 거닐었다. 다분히 의도 섞인 행보였다. 사람들은 거대한 백호에게 경외를, 그 백호의 옆을 나란히 걷는 무륜에겐 선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역시 저분이 황제가 되신 것은 하늘의 뜻이었어.”
“생각해 보면 하늘비석을 통해 황제가 되셨잖은가. 그는 곧 상선께서 폐하를 굽어살피셨다는 뜻이고, 진정 선택을 받은 건 사실 우리 폐하라는 뜻이지!”
“타낙한, 그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세상의 역적인 사월린과 내통한 걸로 모자라 감히 상선의 이름을 사칭하다니.”
“사월린과 거래한 인간일세. 뭘 바라나.”
듣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리워 있던 음울한 그림자가 흔적도 없었다.
“수도가 넘어간 이후부터 희망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데, 지금이라면 기대해도 괜찮을 듯허이.”
사람들이 재차 동의했다.
무륜의 어깨가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보이지 않는 짐이 조금 덜어진 듯했다. 잘됐구나. 슬렁거린 꼬리가 바닥의 눈을 쓸었다.
우리는 오래 걷지 않고 성주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던 성주가 달려왔다.
“폐하! 오셨습니까!”
“…….”
눈사람인 줄 알았던 건 사실 성주였다. 얼마나 껴입혔는지 털실이 굴러오는 것 같았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무륜은 일이 있다며 나를 이끌고 자리를 뜨려 했다. 성주는 시무룩해 고개를 숙였다. 앞발…… 은 안 될 것 같아 꼬리로 그 머리를 툭툭 두드려 줬다. 고개를 번쩍 치켜든 성주가 환하게 웃었다. 귀여웠다.
“어린애를 좋아하십니까.”
무륜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음. 좋아하는 것 같다.”
‘열 살’이라는 특이점을 배제해도 그렇다. 모든 어린 것에 대한 관용이라고 할까. 이 또한 신수로서 지닌 천명의 일부였다.
“또 묻고 싶은 것은 없느냐.”
이토록 굳건한 천명을 가진 나이거늘. 지금은 그저 무륜의 관심이 기꺼웠다. 체면 없이 슬렁거리려는 꼬리를 꽉 붙들며 그를 봤다. 옆에서 걷던 그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눈을 맞추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내 정수리 부근에 닿았다.
그제야 귀가 나비처럼 팔락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힘을 팍 줘서 멈췄다. 그러자 꼬리가 다시 슬렁거렸다. 꼬리에 힘을 주면 귀가, 귀에 힘을 주면 꼬리가. 들뜬 마음은 결국 감추지 못했다.
“흠. 허흠.”
무륜이 헛기침을 했다. 애써 숨긴 웃음이 묻어났다. 그것도 잠시, 그가 멈칫했다. 뭘 생각했는지 온화하던 입매가 삽시간에 굳었다.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변화에 내 귀와 꼬리도 덩달아 잠잠해졌다. 나는 무륜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면 속이 보이기라도 할 듯이. 그를 오해한 무륜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웃으니 보기 좋구나.”
“혹, 이상하진 않습니까.”
“무엇이?”
“제 웃음 말입니다.”
의문을 표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네 웃음이 이상할 것을 걱정한 것이냐.”
무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되어 그렇습니다. 아마 오 년쯤 되었을 겁니다.”
이번엔 ‘무엇이’라고 묻지 않았다. 뒤에 나올 말이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제가 웃지 못한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