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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1화 (81/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1화

금국 민담에서 금윤주는 호족의 아이를 낳고 죽었다고 나오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녀가 죽은 것은 주문성을 탈출해 위문현의 아이를 낳은 후였다.

철옹성은 일단 닫혔을 땐 안이나 밖이나 똑같다. 그를 무사도 아닌 가녀린 여인이 빠져나올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태화는 숨겨진 비사에서 확신을 얻었다.

“다만 일부러 좁고 불편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바꿔 말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니까요.”

소수의 일가친척 피붙이는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 다시 말해 군세가 밀고 들어가기엔 비효율적인, 입구에서 하나씩 하나씩 잡혀 죽임당하기 좋은 통로란 뜻이다. 하지만 그 길뿐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찾아야 합니다.”

* * *

“어이, 춥다.”

성벽에 오른 병사가 양팔로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옆에 있던 창을 든 병사가 그를 한심하게 보았다.

“예까지 올라오느라 땀이 다 나는구먼. 무슨 엄살이래.”

“엄살이라니. 내 평생 위금에 살았지만, 올해처럼 추운 겨울은 처음일세!”

사내는 정말로 추워 보였다.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창병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북쪽 출신이었다. 위금에 자리를 잡은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임신한 아내가 향수병에 걸려 울고불고 죽겠다고 해 그날로 위금에 왔다.

비록 저가 유명한 대장군이나 지체 높은 신분은 아니나, 아내에 대한 사랑만큼은 절절한 민담집 속 주인공들에 뒤지지 않음이다.

새 땅에서 터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말단 병사 주제에 상관 바짓가랑이를 잡아 전출된 것이라, 봉록도 반 토막 나고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뭐, 그게 대수인가. 금쪽같은 아내가 멀쩡해졌는데. 그가 ‘아’ 하곤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올겨울 들어 아내가 유독 추워하는 것 같긴 했어.”

“거보게. 자네 아내도 본래 여기 사람 아닌가. 여긴 겨울에도 비가 왔으면 왔지, 이렇게 눈이 많이 오지 않는단 말일세.”

가슴을 펴고 말하던 병사가 헤취! 재채기했다. 미간을 찌푸린 창병이 그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킁. 3년 전엔 갑자기 영물에 도깨비가 우르르 쏟아져서 기겁을 했는데, 2년 전엔 또 전쟁이 났지. 게다가 올해는 이런 미친 날씨까지. 아무래도 이 세상이 어찌 되려는 모양이야.”

“불길한 소리 집어치우게.”

창병이 정색했다.

아내에게서 태어난, 그녀를 쏙 빼닮은 딸이 올해 열 살이었다. 그 아이가 태어난 순간, 창병이 사는 이유가 둘로 늘어났다. 관에 누워서도 팔베개를 해주고픈 마누라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라 자신할 수 있었다.

“세상엔 아무 일 없어. 영물과 도깨비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도 백호님이 돌아왔기 때문이지 않은가. 딱히 해를 끼치는 것도 없고. 물론 도깨비 놈들은 장난질을 좋아하지만, 해를 끼친다고 하긴 뭐하지. 장난이야 애들도 치는 것인데.”

“그래. 뭐, 그렇지.”

영혼 없이 대답한 병사가 돌연 목소리를 낮췄다.

“그, 백호님 하니 말인데…….”

“백호님이 왜.”

“그분이 신수님이라는 소문. 자네도 들었나.”

“지금 위금성에서 그 소문 못 들은 사람도 있다던가.”

“어, 그런가?”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병사가 머쓱하게 뺨을 긁다 다시 헤에취! 거하게 재채기를 했다.

“크응. 어쨌든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고 자시고.”

창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성 앞의 벌판을 향해 있었다. 하얗게 내린 눈이 온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보름 전. 황제가 남은 군세를 이끌고 위금성을 찾았을 때도 지금과 같았다. 하얀 화선지 같은 평원 위로 무수한 발자국이 찍혔다.

전쟁 발발 이후, 금군은 연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최근엔 두 번째 보루까지 빼앗겨 동남의 위금까지 패퇴하였다. 그러나 창병이 본 그들의 눈빛은 형형했다. 지치고 피로하였으나 죽진 않았다.

창병은 그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군세의 맨 앞. 황제와 나란히 걸어오는 거대한 짐승 때문이었다.

그는 산군이라는 표현이 모자랐다. 앞다리가 사람보다 컸다. 세상천지에 저런 백호가 있다는 건 직접 보지 않았으면 결코 믿지 못했을 터였다. 창병은 옆에 있던 노인이 엎드러지며 중얼거린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위대한 분이 오셨다. 이제 우린 산 게야. 상선이여, 감사합니다.’

노망이 나 엄동설한에 속곳 차림으로 마당을 비질하는 노인네였으나, 창병은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가 지금은 다시 눈으로 덮인, 황제와 군세와 백호가 가로질렀던 땅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신수라고 생각할 걸세.”

* * *

위금에 터를 잡았지만 내가 이 땅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였다.

“둘이 건너면 하나가 되어 돌아오고, 하나가 건너면 둘이 되어 돌아온다.”

이 말은 또 누가 했었나. 아무리 미간을 찌푸려도 떠오르는 것은 없다.

“이곳의 설화를 아시는군요.”

말을 건 것은 위금성주였다. 시선을 돌리자 동글동글한 이마가 가장 먼저 보였다. 올해 열 살. 전대 성주는 일 년 전 병마로 죽고 후계는 늦둥이로 본 아들, 그 하나뿐이라고 했다.

나이가 어려서일까. 성주는 다들 경외하며 우러러보는 내게도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새로 태어난 백호라는 걸 밝히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틈만 나면 엉겨 붙었다.

나는 그걸 냉정하게 밀어내지 못했다. 열 살. 그 나이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였다. 이유는 모른다. 빌어먹을 태생적 결함 때문에 내가 모르는 게 어디 한둘이던가. 신경질을 누르는 내게 위금성주가 조잘거렸다.

“둘이 건너면 하나가 된다는 건, 위문현과 금윤주가 건넜다가 위문현만 수도로 끌려간 것을 이름이고. 하나가 건너면 둘이 되어 돌아온다는 건, 임신한 금윤주가 주문성으로부터 도망친 것을 이름입니다.”

“…….”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녀는 성 밖에서 아이를 낳았죠. 훗날 더 남쪽으로 내려간 아이가 세를 이끌어 세운 것이 남온조. 지금의 남조와 온조입니다.”

“……너는 명색이 금국의 귀족이라는 자가 그런 말을 함부로 꺼내도 되느냐.”

“헉.”

아이가 뒤늦게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래진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갔다. 너른 광실에는 다섯의 금군이 기둥을 지키고 서 있었다. 괜찮대도 무륜이 부득불 붙여준 호위들이었다.

장대한 풍채에, 갖은 전투로 해졌으나 번쩍거리는 갑옷. 하나같이 무감각한 표정. 저승문의 문지기 같은 금군을 본 아이의 눈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정작 금군들은 별 관심 없었다.

아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다 ‘허’ 하는 소릴 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저 노란 딱정벌레 같은 놈들은 무섭고 나는 아니 무섭더냐.”

“…….”

졸지에 곤충이 된 금군들이었으나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백호님은 푹신하고 귀여워요. 양이 닮았어요.”

“양이?”

“제가 키우는 고양이예요. 북쪽 창고의 지붕에 살아요. 밥은 발견하는 사람더러 챙겨 주라 했어요. 맨날 저잣거리에 나가서 열 밤씩 안 들어오고 해요.”

그건 키우는 게 아니지 않나.

“평범한 호랑이도 아니고, 신수를 고양이에 빗대는 건 너밖에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다.

한숨을 푹 쉬었다. 열 살이면 귀족 자제치고 그리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심지어 성주의 외동아들이면 속이야 어떻든 대외적으론 애늙은이처럼 의젓할 것인데. 어디 모자라 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천성일지도.

성주와 노닥거리는 사이 무륜이 찾아왔다. 그는 배를 보이며 누운 나와 내 배 위에 엎드려 헤엄치는 성주를 어이없다는 눈길로 보다 헛기침을 했다.

“위금성주.”

“예. 폐하.”

성주가 얼른 바닥으로 내려가 공손히 읍했다. 이런 걸 보면 또 제법 성주 티가 났다.

“잠깐 나가주겠나. 백호님과 긴히 할 말이 있네.”

아이는 풀이 죽어 밖으로 나갔다.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위가 기다렸다는 듯 성주를 안아 올렸다. 성주 역시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그걸 보고 이해했다. 응석받이로 컸구나. 하긴 늦둥이에 외둥이면 부모와 주변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백호님.”

“목련이다.”

“예?”

“백호는 내가 너를 ‘인간아’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앞으론 목련이라 불러라.”

“알겠습니다.”

“알겠으면 불러봐라.”

“예?”

“불러보래도.”

순순히 알겠다고 한 것치곤 꽤 긴 망설임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련 님.”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순간, 언제 꽁했냐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오냐’ 하고 답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와 이렇게 마주한 건 장장 보름 만이었다.

강을 내달려 그의 무리에 합류했을 때,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보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쥐구멍을 찾고 싶다. 그때 무슨 변명을 주워섬겼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럴듯한 헛소리였을 것이다.

하나, 수치는 잠깐이었고 무륜과의 재회는 더없이 기뻤다. 강을 가로지르며 흩어졌던 무륜의 군세가 모두 모였다.

무륜은 내게 ‘몽휼’이라는 자를 소개해 줬다. 근엄한 무륜의 손치고 무례했다. 나를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턱을 툭 떨어뜨리더니, 손가락질까지 하는 게 아닌가. 무륜이 지적하고 나서야 그는 입을 다물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때 나는 이미 심이 상해 콧김을 한 번 뿜고 무시했다. 그러자 사내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무륜을 보다, 그의 옆에 있던 무사 하나를 낚아채 갔다. 내게 암컷이냐고 물었던 그 무사였다.

그 후 반대편 뭍에 닿아 눈 덮인 평원을 가로지를 때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

서벅. 서벅. 두껍게 쌓인 눈을 밟으며 높은 성벽 위를 봤다. 기겁한 병사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기다릴 것도 없이 무륜이 성문에 당도할 즈음 거대한 나무 문이 열렸다.

무수한 사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은 죄 넋이 나가 있었다. 황제에게 예를 표한 뒤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기된 감정에 미약한 희망과 기대감이 서렸다.

무륜은 쓰게 웃으며 내 옆으로 붙어 섰다.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황제이며, 인간이라는 걸. 그래도 상관없다고 곧바로 생각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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