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0화
무륜의 움직임이 멎었다. 마치 그 혼자 시간이 멈춘 듯했다. 모든 것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새카만 동공이 더욱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폭풍이 휘몰아쳤다. 지독하게 갈급한 눈이고, 갈망하는 눈이었으며, 내가 이미 알던 눈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 눈을 본 순간, 앞이 환해졌다. 항상 빛을 등진 채 나를 향해 다정한 웃음을 짓던 사내가 있었다. 얼굴만 보이지 않던 그 사내의 낯이 드디어 보였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세 번째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이번엔 다시 돌아보지 않고 나를 떠나갔다. 미련 없는 등이 멀어졌다.
철렁하며 내려앉는 마음이 깨달음을 주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린 직감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걸 생각 못 했을까.
‘네 인연을 봤구나.’
태연히 떠오른 상선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너였구나.”
무륜을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이라고 했던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네가 내 임이었구나.”
목련, 아니, 이화가 중얼거렸다. 넋두리에 가까운 말은 멀어진 무륜에게 닿지 못했다. 목이 멨다. 여전히 기억은 백지장과 같은데, 그럼에도 울 것 같은 기분이 됐다.
그대로 몸을 돌려 산을 내달렸다. 갈 때는 한나절이 넘게 걸렸는데 돌아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꽝꽝 얼어붙은 깊은 용소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거센 앞발이 두꺼운 얼음을 단번에 부쉈다. 당과의 표면처럼 부스러진 얼음 사이로 하얀 몸이 가라앉았다.
심연을 닮은 깊은 곳을 향하며 눈을 부릅떴다. 사당에서 보았던 사월린의 냉랭한 낯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사랑해선 안 될 것을 사랑해서 파멸한 기린. 나는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온전한 경멸만을 담고 그를 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알게 되면 그를 알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내 안에 균열이 생긴 것을 느꼈다. 상선이 말한 분리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기뻐했다. 분리하면 전생의 일은 전부 무의식 너머로 밀어 넣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멍청한 생각이었다. 지금 내 안에서 벌어지는 것 중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촤악.
물을 흩뿌리며 솟구쳤다. 밀려난 얼음 조각이 앙상한 수풀을 덮쳤다. 무거워진 기분을 따라 주변 공기가 가라앉았다. 내 기운에 이끌려 모였던 위금산의 무수한 영물이 죄 숨을 죽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반쯤 넋이 나가 뭍으로 올라왔다.
“……이래서 묻으라 하셨습니까.”
허망한 혼잣말에 대답은 없었다.
“이래서 잊으라 하셨습니까!”
콰앙!
바닥을 향해 내려친 앞발이 땅을 무너뜨렸다. 용소의 한구석이 무너지며 흙과 바위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는 넓어진 용소의 수면 위에 망연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늘어진 꼬리 또한 물 아래로 잠겨들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원망할 것이라 하셨지요.”
잊어야 내가 산다던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 것이었는지, 어리석은 금수는 그를 뒤늦게 깨달았다.
“이걸 어찌 잊습니까. 어찌 묻습니까. 이토록 심을 휘저어대는 폭풍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상선이라도 아니 되었을 겁니다.”
힘없이 중얼거리며 바위 위로 올랐다. 내내 지한국을 향했던 눈을 정반대로 돌려, 그가 떠나간 위금성을 보았다. 시야가 당기듯 가까워졌다. 무륜은 여전히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강의 한가운데서 묵묵히 나아가는 그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잊으라던 그 말의 다음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저는 사월린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신수이지.’
‘그와 같은 신수가 아니면 되는 겁니까.’
‘그래.’
‘그리되면 잊지 않아도 되고, 묻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사슬.”
내 머릿속을 옭아맨 모든 의무와 본능을 상선은 사슬이라 칭했다.
“자유.”
정의롭지 않아도 되고, 공평하지 않아도 되며, 고결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했다. 그는 내게 필요치 않은 것들이니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뜻대로 행하라는 말도 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내다보신 겁니까.”
의문은 이내 확신이 됐다.
“지금 이 순간을 내다보신 게군요.”
나는 크게 포효했다. 짐승들이 까무룩 기절하고 놀란 영물들이 몸을 납작하게 웅크렸다.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젖은 털은 얼어붙지 않았다. 물기는 세 번의 도약을 채 하기 전에 전부 날아갔다. 겅중겅중 산을 내려가 다시 위금강가에 섰다. 희미하게 강 위를 휘도는 눈보라를 보다, 그 눈보라 속으로 달려들어 갔다.
* * *
위금강은 본래 주문강이었다. 위금산도 주문산이었고, 위금성도 주문성이었다. 멀쩡하던 ‘주문’이 ‘위금’으로 바뀐 게 언제부터였는지 역사에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계기가 되는 사건은 분명하다.
먼 옛날. 위씨 성을 가진 무사와 금씨 성을 가진 귀한 신분의 여인이 서로를 봤다. 무사는 이루지 못할 인연임을 알았다. 여인은 이 앞이 비탄의 가시밭길일 걸 알았다. 그래도 둘은 나란히 손을 맞잡고 파멸을 향해 걸었다. 결과는 예상과 한 치 벗어남이 없었다.
여인은 외가였던 주문가에 감금당했다. 저택은커녕 제 방 밖으로도 나올 수 없었다고 했다. 주문가는 황가에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황제의 눈이 잘 미치지 않는 외곽 영토의 장점을 살려 성벽을 보강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혹, 변심한 황제가 주문가를 멸문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와도 버틸 수 있도록. 못해도 가솔이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도록.
그래서 위금성은 타낙한의 예상보다 몇 배는 더 견고했다. 그에 타낙한은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이번에야말로 잡았다 생각하고 손을 펴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만 해도 벌써 세 번째였다.
가라앉은 심기에 타낙한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막사 안의 물건들이 흔들리며 진동했다. 타낙한 자체는 일류에 불과한 무사이나, 그 몸에 깃든 것은 위대한 신수의 일부였다. 비록 타락하고 몰락했을지라도 신수는 신수였다.
“전하.”
태백이 타낙한을 불렀다. 타낙한의 눈동자가 스르륵 옆으로 움직였다. 태백은 머뭇거리며 고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 군사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차 한 타낙한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그의 무릎에는 앳된 얼굴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품에 안긴 모양새가 익숙했다. 하긴 이런 지도 벌써 3년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타낙한은 알고 있었다. 그 3년간 이 어린 사내가 단 한 번도 편히 안긴 적이 없음을. 그를 알면서도 고집을 부린 건 자신이었다.
눈을 내리깐 청년은 무표정했다. 어떤 불편도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물건 같았다. 동시에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심지어 나이도 이제 엇비슷하지.’
그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지금 제가 품에 안고 있는 청년의 나이와 같았다. 살아 있었다면 올해 스물다섯이나, 타낙한이 기억하는 사내는 영원히 스무 살이었다.
“미안하다, 화야. 내 순간 분이 치솟아 네가 있던 걸 잊었구나.”
“저는 괜찮습니다.”
화라 불린 작은 체구의 청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도 웃어 보였다. 타낙한은 내심 혀를 찼다. 저것이 만들어진 미소임을 아는 까닭이다.
태백의 동생이자 타낙한의 군사인 태화는 영악하고 영리한 사내였다. 지한국이 연전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던 데는 태백의 무력과 타낙한의 이능이 큰 역할을 했으나, 그 효율을 최대로 끌어 올린 건 제 품에 안긴 이 사내였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다고. 태백과 자신이 호랑이면 이 사내가 바로 날개였다.
“전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타낙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개 외에 그가 태화를 비유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비수. 대장군 태백이 금군을 가르는 거대한 검이라면, 군사 태화는 금군의 목을 노리는 비수였다.
상서령 여율령. 그자가 죽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가 있었다면 전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터.
뛰어난 머리와 강인한 몸을 가진 금국은 전쟁 발발 직전, 뛰어난 머리를 잃었다. 몸이 아무리 강인해도 그를 이끌 머리가 없어서야 무용지물. 반면, 지한국엔 아직 여율령에겐 미치지 못하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 있었다.
“전하께서도 위금지사를 아시겠지요.”
당연히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당시 주문가의 가주는 황제의 변심을 두려워해 성벽을 보강했습니다. 그런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를 추측해 보면 답은 의외로 쉽게 나옵니다.”
명예나 돈보다 가문의 사람들을 가장 앞에 뒀던 자. 모두를 살리려고 하나뿐인 금지옥엽 딸이 아닌, 황제의 편에 섰던 자. 그토록 제 사람을 아끼는 자가 했을 법한 생각.
“저런 철옹성은 장점과 단점이 일치하지요. 한 번 문을 걸어 잠그면 외부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안전하나, 안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어쨌든 저희가 이깁니다. 식량이 떨어질 테니까요.”
타낙한은 원치 않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한국의 소모도 만만치 않은 탓이다. 그 또한 제 사람은 아끼는 군주였다. 어떤 면에서는 주문가 가주와도 닮았다고 하겠다.
“다소 비겁하더라도 시간과 물자를 아끼고자 한다면, 생각보다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저런 성에는 꼭 하나씩 있거든요.”
쥐구멍이.
그렇게 말한 태화가 빙긋 웃었다.
“분명 어딘가에 숨겨진 지하 탈출로가 있을 겁니다. 이런 변경 땅에 있어도 황제와 혼약을 맺은 가문. 가솔의 숫자는 낮잡아도 족히 오십 명은 되었을 터. 분명 여러 개를 만들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