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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9화 (79/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9화

“감히 예가 어디라고 날붙이를 뽑아 드느냐. 이곳은 상선께서 내 집으로 명하신 땅. 곧 성산이다.”

개소리였다. 위금산은 위금산일 뿐이었다. 백호가 머물면 확실히 영기가 충만하여 수목은 번성하고 영물도 늘어나지만, 그는 위금산이 특별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영산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

백호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도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인 이유가 뭘까 의아해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앞발은 착실하게 병사들을 쳐냈다.

타낙한의 추적자 중 앞서 나온 절반이 바닥에 누워 신음했다. 나머지는 갑작스러운 백호의 개입에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저벅. 개떼의 무리에서 늑대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태백…….”

위중혁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특급을 넘어 원급이라 불리는 유일한 자. 위중혁조차 저 사내는 이길 수 없었다.

태백의 복식은 대장군이라는 직함에 비해 심히 초라했다. 단출한 흑의 무복에 동곳을 꽂고 영웅건을 둘렀다. 보통 아무것도 넣지 않는 무복에는 자수가 놓여 있었다. 가슴팍과 양 팔뚝. 문양은 흰 목련이었다.

“세상의 세 기둥 중 한 분을 배알하니 현생의 영광입니다.”

그는 방금 위용을 뽐낸 백호 앞에서도 당당했다. 위중혁이 적이지만 감탄스럽다는 눈으로 이를 사리물었을 때, 백호가 심드렁히 답했다.

“오냐.”

“…….”

“할 말은 그게 전부냐?”

“아닙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태백이 손끝으로 한 금군을 가리켰다. 황제 측 사람 중 유일하게 검을 뽑은 자였다. 지금은 검을 검집에 넣은 그의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 태백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검을 뽑은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데, 어찌 저희만 벌하십니까.”

백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비겁하게 뒤에서 화살을 날린 놈들과 그 화살을 막아내느라 검을 뽑은 이를 같이 벌하라는 것이냐. 대장군직을 맡은 놈이 그것 참 공명정대하구나. 시야가 그리 좁으니 네 밑에서 억울함을 당한 자가 적잖을 것이다.”

무륜과 위중혁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느 비 오는 산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탓이다. 그러나 그들을 등지고 선 목련은 그를 볼 수 없었다.

쿵.

백호가 발을 굴렀다. 그리 세게 짚은 것도 아니건만, 그가 선 자리부터 땅이 흔들리며 온 산이 진동했다. 신수의 분노에 놀란 새들이 비산했다. 그들이 우는 소리가 고요한 장내로 퍼졌다. 태백은 비로소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백호다.”

많은 것이 내포된 말이었다.

“그런 내 앞에서 감히 정의를 논하느냐?”

“……무지렁이의 실언이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오냐. 용서해 줄 테니 저것들 모다 데리고 당장 내 산에서 나가라.”

두 번은 없다는 매서운 호랑이의 눈이 태백을 향했다. 태백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나머지 절반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이 쓰러진 동료들을 수습해 빠르게 물러났다.

금군과 밀영군의 기세가 비로소 누그러들었다.

“자, 그럼.”

이어진 백호의 말에 다시 어깨를 굳혔지만.

“나를 위한 상을 받았으니, 받은 값을 해야겠지. 어디 자초지종이나 늘어놔 보거라.”

백호는 말 한마디로 황제의 일행을 들었다 놨다. 밝아진 안색들 사이로 황제가 나섰다. 공손하게 읍한 그가 지금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전했다. 목련은 고개를 꾸벅꾸벅 끄덕이며 무륜의 말을 들었다.

“목적지는 위금성이구나.”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데려다주마.”

“예?”

무륜은 물론이고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모든 이가 놀랐다.

“대접을 받았으면 보은을 해야지. 전래 동화도 안 봤느냐?”

목련은 태연했다. 능글맞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무륜은 멀찍이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타낙한의 개들이 당황한 것을 알았다. 그의 입가로 정말 오랜만에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무륜을 필두로 한 무리가 슬렁거리는 걸음의 백호를 뒤따랐다.

* * *

황제는 제 이름을 무륜이라 했다. 그는 묻는 말엔 곧잘 대답했으나, 먼저 나서서 무언가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행동거지가 발랐고 사소한 움직임에서도 기품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눈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타낙한에게 승리한 것은 몇 개의 전투뿐. 연전연패를 겪고 지금도 그 때문에 도망가는 중임에도, 비탄이나 비굴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무지한 폭군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동요할까, 제 안 깊고 깊은 곳에 파묻어둔 까닭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대부분은 타낙한을 주시하며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무륜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을 보진 못했지만 필시 죽었을 것이라, 그리 말하는 낯이 담담했다. 내가 찌른 말로 인해 그의 비극을 되새긴 탓일까. 아니면 비극 그 자체에 거부감이 든 것일까. 발톱을 세워 가슴팍을 득득 긁고 싶은 기분이었다. 또,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 무슨 다행? 뭐가 다행?’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람이다, 라고 내 마음이 나보다 먼저 그를 알아봤다. 그건 기묘한 감각이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기엔 뭔가 달랐다.

팍!

무륜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제 걸음 앞을 냅다 후려친 내 앞발에 닿았다.

“돌부리가 있길래.”

그게 뭐, 라는 눈이다.

“넘어지면 안 되잖느냐.”

무륜은 잠깐의 공백 후 ‘감사합니다’ 했다.

팍팍!

이번엔 멈칫하지 않았으나 역시 물끄러미 나를 봤다. 아까보단 덜 경직된 시선이었다. 나는 성기게 드리운 나뭇가지를 죄 쳐냈다. 가시나무였다. 앙상한 탓에 뾰족하게 선 가시가 더 잘 보였다.

“가시에 긁히면 옷 찢어진다.”

당연한 소리를 했는데 어째 인간들의 낯이 묘해졌다. 당당하게 내딛던 앞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뒤늦게, 내 반응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리 상을 받았대도 이들은 인간이다. 무륜도 인간이었다. 그런데 의식 저변에 항상 낮게 깔려 있던 경멸은 어디로 갔는가.

“가자. 저기만 넘으면 이제 내리막이다.”

나는 다소 허둥거리며 거대한 몸을 돌렸다.

경멸이 문제가 아니었다. 틀림없다. 이건 호감이다. 그것도 무륜을 향한 이성적 호감이었다. 뭐지? 왜지?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이다’ 싶었던 강렬한 예감 때문인가. 범람한 물음표는 혼란이 됐다.

슬금슬금 앞서 나갔다. 무리의 중앙에 있던 무륜에게서 멀어져 맨 앞에 섰다. 고민하면서도 모났다 싶은 돌은 걷어냈다. 가지는 그냥 지나는 것만으로 정리가 됐다.

힐긋 뒤를 봤다. 그들의 시선이 내 엉덩이에 붙박여 있었다. 그 모습에 잠깐 복잡한 생각이 사라졌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경이롭기도 하겠지. 한평생 살아도 신수를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무륜도 어딘가 묘한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보다 당당하게 앞서 나갔다.

“백호님.”

그때, 무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륜과 더불어 어딘가 낯이 익은 무사였다.

“그래.”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혹시 암컷이십니까.”

당당하게 내딛던 발을 삐끗했다. 상체가 옆으로 기울며 아름드리나무에 어깨를 부딪쳤다. 쿵. 우지직. 나무의 밑동이 부러졌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파바박.

사방에서 튀어나온 손이 무사를 휘감아 뒤로 끌고 갔다. 나머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병풍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사는 인벽 뒤로 사라졌다. 그 앞에 선 무륜이 사죄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 뭐…… 궁금할 수도 있지. 나는 수컷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태연을 가장해 답하곤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무사의 얼굴은 기억해 뒀다. 어쩐지 진중하게 생겼는데, 역시 인간은 겉보기로만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었다.

‘……아니다. 내 행동이 유난스럽긴 했지.’

누가 봐도 호감이 있는 자의 행동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상을 받아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과한 호감. 이 사람이다 싶었던 그 느낌 때문이다.

“백호님?”

나는 어느새 멈춰 서 있었다.

“별일 아니다.”

험험. 헛기침하며 앞발을 내저었다. 수풀이 확 갈리며 시야가 트였다. 뒤에서 감탄에 가까운 탄식이 터졌다.

산의 능선을 넘어가는 정상의 인근이었다. 얇은 구름 아래로 하얀 땅이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백색의 벌판은 사실 땅이 아닌 얼음이었다. 얼어붙은 위금강. 무륜의 목적지는 저 강 너머에 있었다.

내려가는 걸음은 오르던 것보다 느렸다. 저 아래 강가에 당도하면 나는 더 따라갈 수 없다. 상선은 내게 위금산을 터로 명했다.

머릿속으로 서한의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내가 위금산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명령이 아닌 제안이다. 그쯤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명백히 빠져나갈 구석을 찾는 자신이 낯설었다.

“다 왔군요.”

무륜의 말에 재차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자 넓게 펼쳐진 모래톱이 보였다. 어느새 위금강이 코앞이었다. 슬금슬금 밖으로 나온 발톱이 얼어붙은 땅을 파고들었다.

“예까지 길 안내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명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황제가 공손히 예를 표했다. 그 뒤의 무사들도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무륜은 떠나고 나는 내 거처인 용소로 돌아간다. 그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싫다.’

그는 싫었다. 불퉁한 어린애 같은 마음이 널을 뛰었다. 그를 억누르는 사이, 무정한 무륜은 거듭 예를 표하곤 얼음 위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 무륜.”

열 걸음을 채 못 간 그가 나를 돌아봤다. 불러 세운 주제에 막상 마주하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딱히 뭔가 할 말이 있어 부른 것은 아니라 더 그랬다.

침묵이 길어지자 무륜의 낯에 의아함이 서렸다. 아무 말이나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아무 말은 이미 입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내 이름은 백목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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