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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8화 (78/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8화

보다 못한 몽휼이 다가와 정말 대벌레가 될 참이냐고 물었을 때, 위중혁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미련한 놈.’

그가 이화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왔다. 팔이 흔들렸다. 쓰러지는 그의 몸을 몽휼이 받았다.

위중혁은 울지 않았다. 얼굴 가득 흐르는 건 땀이라, 그는 몽휼을 향해 되뇌었다. 몽휼은 알겠다, 알겠다 몇 번 반복해 대답했다. 위중혁이 그런 몽휼의 팔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저문 마음이었다.

“위중혁. 뭐 하나.”

“지금 가겠습니다, 폐하.”

위중혁은 생각했다. 이화가 돌아올 것을 여전히 믿지 않으나, 그럼에도 그가 왔을 때 상심하지 않도록 무륜을 지켜야 한다고.

자신의 모순에 조소를 흘린 위중혁이 막사를 걸어 나갔다.

<10장 봄 잊을 겨울 완결>

상선은 말했다. 너는 자유로운 바람이라고. 그러나 내 안의 천명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균형의 수호자라고.

나는 천명의 손을 들어줬다. 복잡하고 심오한 상선의 뜻을 헤아리기에 나는 아직 어렸다. 하나 언젠가 천명을 뿌리치고 상선의 뜻을 좇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그런 막연한 예감은 있었다.

물론,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11장 닮은 곳

“둘…… 아니, 셋으로 갈리었군.”

바위를 득득 긁으며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험준한 산세가 펼쳐져 있으나, 저 먼 곳을 내려다보는 데 아무 지장도 없었다. 천 리 밖도 보는데 고작 집 안마당을 못 볼까.

거대한 군세와 허름한 옷을 입은 백성이 섞여 위금산을 탔다. 그들은 완만한 능선을 따라 산을 넘었다. 목적지는 이 너머의 위금성이었다. 산과 성 사이에 드넓은 위금강이 있지만, 이 계절이라면 꽁꽁 얼어붙어 있겠지.

나머지 하나는 소수에, 일류와 특급으로 구성된 무리였다. 그 안에 황제가 있었다. 그들은 일부러 험한 길을 골라 깎아지른 위금산을 오르고 있었다. 정상을 찍고 반대편으로 내려갈 기세였다.

“미끼인가?”

의문형이었지만 내심 확신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황제 무리를 응시했다. 타낙한에게 집중하느라 금국 황제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복면에 흑의 무복 차림이었다. 누가 황제인지 모르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득. 드득.

바위를 긁던 발톱이 느려졌다. 의도한 건 아니겠으나, 그들이 향하는 방향에 내 용소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나와 맞닥뜨리게 될 터였다.

‘어쩔까.’

선택지는 둘이었다. 잠시 몸을 숨겨 그들을 지나치게 두거나, 이대로 기다려 마주하거나. 바람직한 선택은 전자였다. 균형이 맞춰져 있을 때의 나는 관조자였으므로.

만약 타낙한이 사월린의 힘으로 대학살을 자행한다면 주저 없이 나섰을 것이다. 하나, 그는 철저히 정도를 지켰다. 전쟁의 부산물과 같은 약탈과 방화, 살인과 강간을 철저히 금하고 이를 어긴 병사는 엄벌에 처했다.

그가 사월린의 힘을 쓴다는 걸 알면서도 끼어들길 망설이게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 전쟁은 아직 인간들의 손에 있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나서면 사월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유배당한 몸이 뭘 할 수 있겠나 싶으면서도, 타낙한과 사월린의 동조율을 보면 망설이게 되었다.

사월린은 전대 백호를 죽일 정도로 강한 신수였다. 그 강함은 세월의 흐름에 마모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강해졌으면 모를까.’

신수는 시간을 먹고 성장하는 존재다. 나도 그랬다. 이제 겨우 세 살. 인간들 입장에선 재앙에 가까운 일들을 일으킬 수 있으나, 신수들 입장에선 손짓 한 번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 게 지금의 나였다.

하아. 입김을 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선이라면 답을 줄 수 있었을까.

기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후자를 택하고 싶었다.

신수가 아닌 그 이전의 과거가 외치는 감이었다. 너는 반드시 저들을 만나야 하노라고. 내 안 깊은 곳의 공동에서, 내 영혼에 닿을 만큼 절절히 외치고 있었다. 천명을 잠깐 밀어낼 만큼 거대한 충동이었다.

“황제.”

복면을 써도 어쩐지 알아볼 수 있었다. 무리의 중심에서 달리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 * *

황제, 무륜은 힐긋 뒤를 돌아봤다.

예상대로 타낙한은 무륜의 뒤를 쫓아왔다. 추격자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번에 무륜은 지친 낯의 금군과 밀영군을 돌아봤다. 금군은 만신창이였고, 밀영군은 더 이상 숨지 않았다. 숨는 게 의미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산을 넘지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무륜은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차라리 백호를 마주한다면…….’

무언가 변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 변수가 너무 간절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애당초 신수란 그렇게 쉽게 발견될 존재가 아니었다. 다람쥐 병사의 말대로 정말 그가 이 산에 있다면 저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리 없었다. 타낙한도 그를 아니 저렇게 거침없이 쫓아오는 것이리라.

‘이화야.’

무륜이 그리운 이름을 읊조렸다. 제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잠깐 잊어도 좋을 이름이건만.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이라 그런지 더욱 생각났다.

그때, 앞서가던 위중혁이 달리던 걸 늦추더니 주먹을 들었다. 무리가 일제히 멈춰 산개했다. 나무 뒤에 숨은 무륜이 위중혁을 봤다. 그는 크게 놀란 상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한 위중혁의 눈매가 당혹으로 굳어 있었다.

무륜은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그의 귀에 물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용소. 그 폭포 위쪽의 바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있었다.

집채만 하다는 말이 부족한 대호였다. 사람만 한 앞발. 보통 호랑이의 네 배는 됨 직한 크기에 절로 고개가 숙어지는 위압감. 윤기가 흐르는 하얀 털. 현기가 깃든 눈동자. 그 자리의 모두가 알아봤다. 새로 태어났다는 바로 그 백호였다.

무륜은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한 신수를 뵙습니다.”

백호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무륜의 등 뒤로 식은땀이 고였다. 그가 복면을 잡아 내리며 손짓했다. 눈치 빠른 금군과 밀영군이 일제히 복면을 내렸다. 금군 중 한 명이 입 모양만으로 대장을 외쳤다. 마지막으로 위중혁의 복면이 내려갔다.

“저희가 무지하여 예 계신 줄 모르고 걸음 하였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보아 넘겨주십시오.”

백호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여전히 위압감을 내비치며 그들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난감해하는 무륜의 머릿속으로 어떤 정보가 스쳤다. 고서에서 본 것 중 하나였다. 신수를 만나면 우선 제를 지내라고 했다.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았다.

“가진 식량을 모두 꺼내라.”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다른 수가 없었다. 빠르게 상을 차려 올리고 여길 지나야 했다. 벌써 추적자들이 턱밑까지 와 있었다.

무륜은 천천히 용소로 다가갔다. 백호는 그가 하는 양을 계속 지켜봤다.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고, 감히 어딜 다가오느냐며 호통을 치지도 않았다. 용소 앞의 넓은 바위 위에 말도 안 되는 제사상이 차려졌다. 육포와 벽곡단으로 이루어진 상이었다.

무륜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백호라도 만나서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무지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침을 뱉고 싶었다. 네 어리석음으로 네 사람을 다 죽일 것이냐.

여기서 칼부림을 하면, 그래, 변수야 생길 것이다. 하나 그 결과는 적과 자신의 동귀어진이었다. 모두 저 무시무시한 백호에게 죽을 테니까. 실제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을 올리는 그의 몸이 옅게 떨렸다.

한편 백호는 놀람으로 굳은 채였다. 황제가 복면을 아래로 내렸을 때, 장엄한 백호의 숨이 멎었다. 슬렁거리던 꼬리도 딱 굳었다.

그를 보기 전까지 백호는 나름 긴장하고 있었다. 어쨌든 처음 대면하는 인간들이었다. 타낙한과 적대하는 자들이라곤 하나 그래도 인간. 악하고 치졸한 것들이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정확히는 그런 모습에 경멸을 참지 못하고 앞발이 먼저 나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모다 쓸데없었다. 황제의 맨얼굴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 사람이다.’

제 안의 목소리가 물었다. 뭐가 이 사람인데?

‘몰라. 하지만 이 사람이야.’

목소리는 침묵했다.

눈이 뜨인 기분이었다. 그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걷혔다. 마음에 굳건한 기둥이 섰다. 상선의 조언마저 밟고 섰던 천명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밀려났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피를 뿜었다.

목련은 그제야 자신의 생을 실감했다. 태어난 지 삼 년. 백호로 살던 것은 산 것이 아니었다.

발톱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목련은 장승처럼 굳어서 그가 하는 양을 그저 지켜봤다. 바위 위에 상을 차리는 모양새가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 그의 몸이 그리는 선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여기다!”

쐐액! 챙!

벼락같은 외침과 함께 화살이 날아왔다. 뒤따라 절할 준비를 하던 금군 하나가 급하게 검을 뽑아 살을 막았다.

“적습이다!”

정적이던 용소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무륜이 낭패감 어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검을 뽑지 마라. 검집으로 상대해!”

주춤한 금군과 밀영군이 그의 명에 따랐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보며, 무륜은 부디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이길 상선에게 빌었다.

크르르렁!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 분노한 울음이 용소를 쩌렁쩌렁 울렸다. 의젓하게 앉아 있던 백호가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새하얀 비조처럼 뛰어내린 그가 타낙한의 군사를 덮쳤다.

“으아악!”

“아악!”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게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특급 무사의 눈으로도 하얀 발자취를 좇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치 나무들 사이로 새하얀 먹이 그어진 듯했다. 백호는 유려한 선을 그리며 순식간에 추격자들을 무력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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