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7화
타낙한은 착실하게 금국을 공략하는 한편, 내부에 심어놓은 간자를 통해 금국 귀족 중 일부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즉, 배신이다. 심약하고 어리석으며 욕심 많은 일부가 그에 동조했다.
그 결과, 전쟁이 발발한 지 6개월이 채 안 되어 금성 인근까지 지한국의 군세가 닿았다. 황제는 뒤늦게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제 주변을 공고히 했으나 때는 늦었다. 그는 고심하다 급하게 임시로 천도했다. 보다 남쪽에 있는 연남성이었다.
하나, 금국 황제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한국에는 타낙한 외에도 금국을 위협하는 거대한 산이 하나 더 있었다.
대장군 태백이었다. 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나이는 서른 초반. 평민 출신으로 동생이 한 명 있음. 그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그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전부 소문뿐이었다.
사형수였는데 그의 실력을 아깝게 여긴 타낙한이 구명하여 그의 사람이 되었다더라. 은거 기인의 제자로 나라의 환란을 외면할 수 없어 검을 들었다더라. 사실 금국 출신인데, 금국에 환멸을 느껴 타낙한에게 검을 바쳤다더라.
그 내용도 워낙 각양각색이라 진실은 태백 본인만이 알았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과거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현재 그는 최연소로 대장군직에 오른 평민이었고, 지한국 모든 무인으로부터 선망의 시선을 받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무력에 있어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강하다는 말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수준. 태백은 특급보다도 반 급수가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무인들은 경외를 담아 그를 원급(元級)이라 불렀다.
다만 약점이라고 할까. 그는 요 근래까지도 까막눈이었다. 평민이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다. 해서 전략이나 전술에는 약했으나, 그 부족한 점은 동생인 태화가 메웠다.
태백과 태화의 나이 차는 열두 살이었다. 막냇동생이라 그렇다 했다. 본래 그에겐 태화 외에도 많은 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 대기근 때 전부 유명을 달리하고, 남은 것은 태화 하나였다.
악귀. 인간 백정. 저승문의 문지기. 태백을 부르는 수식어는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점점 살벌하고 잔학해졌다. 적군은 그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아군 또한 우러러봄과 동시에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런 태백이 한없이 약해지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동생의 앞이었다.
그는 동생의 말과 왕의 의견이 갈리면 동생의 편을 들었다. 설령 왕이 이리하라 지시해도, 막상 전장에 서면 저리하라던 동생의 말을 따랐다. 신하들이 그는 반역에 준하는 일이라며 기함했으나 결과는 언제나 완벽했다.
왕은 빙긋 웃으며 앞장서 그 일들을 덮었다. 귀족들이 뭐라 하면 쥐꼬리 같은 그들의 전공을 면전에 던져줬다. 자연스레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반면 태백과 태화의 위명은 나날이 높아졌다.
태백과 태화는 둘이 합쳐 하나의 해일이 됐다. 금국의 자본과 군세를 충분히 집어삼키고도 남을 물살이었다.
전쟁 발발 후 1년째. 황제가 떠난 금성이 함락됐다. 그리고 다시 1년이 흘러 마침내 연남성마저 무너졌다. 황제는 남은 군세를 이끌고 다시 동남쪽을 향했다. 그 방향을 짚어보다 멈칫했다.
“……이쪽으로 오는군.”
패퇴한 황제군은 위금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 * *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졌다면.
만약이라는 전제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면서도 요 근래 걸핏하면 그런 생각을 하고 마는 황제였다. 심지어 그중 3년은 제 하나뿐인 정인이 마지막 봄을 바쳐 벌어준 시간이었다. 그걸 새삼 인지하고 나면, 남는 건 비참함이었다.
무륜은 죽고 싶었다. 이화의 죽음을 인지한 후, 진정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이화의 약조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삶의 끈을 놨을 것이다.
막사의 화톳불 앞에 멍하니 앉은 그가 머리를 고정하던 동곳을 뽑았다. 긴 머리가 흐트러져 내렸다. 이윽고 품에서 서신을 한 장 꺼냈다. 이화가 위중혁을 통해 남긴 바로 그 서신이었다.
너무 많이 읽어 너덜거리는 서신과 너무 많이 만져 반들거리는 동곳. 지금 그를 살게 하는 건 이 하찮고 자그마한 두 개의 물건이었다.
무륜이 동곳을 만지작거렸다. 목련의 형체는 닳아 없어졌으나, 그를 어루만지는 마음은 역으로 선명해졌다.
“폐하.”
“들어와라.”
막사 입구의 천이 펄럭이며 위중혁이 들어섰다. 그는 제대로 된 갑옷을 갖춰 입었고, 눈에는 날카로운 예기가 서려 있었다. 하나 전체적인 모습은 다소 초췌했다.
“곧 위금산에 당도할 예정입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사온데.”
그가 뒤를 향해 눈짓했다. 입구의 천이 펄럭…… 이더니 누군가를 휘감았다. 우앗. 억.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허우적거렸다. 위중혁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스슥- 눈에 보이지 않을 빠르기로 뽑힌 위중혁의 검이 막사 천의 위쪽을 잘랐다. 천이 흘러내리며 한 병사가 나타났다. 황제와 병사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뻣뻣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황제의 시선이 병사의 어깨에 닿았다. 그 난리를 피웠음에도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다람쥐가 보였다.
백호의 등장 이후, 영물이 늘어나며 같이 늘어난 것이 있었다. 영물을 다루는 영술사였다. 그들의 발현은 매우 드물었다. 영물 100마리당 겨우 한 명이 나오는 정도였다.
영술사가 되는 조건 같은 것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친화력이지만, 그를 알 수 있는 건 영물들뿐이었다.
“보고해라.”
긴장한 병사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제 영물의 말로는 위금산에 백호님이 사신다고 합니다.”
“백호? 천태백호의 뒤를 이은 새 신수를 말하는 게 맞나?”
“맞습니다. 그분이 터를 잡은 곳이 위금산이라고 합니다.”
“곤란하군.”
“예. 정말 곤란하게 됐습니다.”
위중혁이 병사를 내보내며 맞장구를 쳤다.
신수가 모두 죽고, 유배당하고, 잠들었던 고대 이후는 인간들의 역사였다. 그들은 연 대륙에 오롯이 자신들만의 흔적을 남기며 싸우고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신수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아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반절 이상을 우습게 날려 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고대 이후 직접 보지 못했음에도 신수나 상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의 땅 중 9할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으니까.
“빌어먹을.”
신수는 말이 짐승이지, 반신과 다를 바 없었다. 신수가 죽으면 소멸하거나 신선이 되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황제는 영물 등장 이후 황궁의 고서를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그중 영물과 신수에 대한 것을 따로 추려 읽었다.
“정보가 부족해.”
그래도 여전히 부족했다. 영물에 대한 것은 꽤 자세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신수에 대한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성격이나 성정, 그 외 세세한 특징까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위금산을 에둘러 돌아갈 순 없습니다. 분명 그 전에 뒤를 잡혀 몰살당할 겁니다.”
“일단, 군세를 셋으로 나눈다.”
위중혁이 동의했다.
“그리고 내가 미끼가 된다.”
이건 동의할 수 없었다.
“폐하.”
“타낙한이라면 분명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날 잡으러 올 거야. 그사이에 군대와 백성들은 위금성에 무사히 도착하겠지.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방법이다.”
“……폐하, 처벌을 무릅쓰고 무례한 말을 여쭙겠습니다. 포기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무엇에 대한 포기인지 주어는 없었다. 그래도 황제는 알아들었다. 그가 작게 웃으며 머리를 틀어 올려 반질거리는 동곳을 꽂았다.
“이화가 그러더군. 내가 제 봄이라고.”
뭔가 말하려던 위중혁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때는 마음이 허물어질 만큼 슬퍼서 그저 울기만 했는데, 지나고 보니 알았네. 이화야말로 내 봄이었어. 어쩌면 이름마저 ‘이화’일까.”
황제의 눈이 도원향을 그리듯 아련해졌다. 위중혁은 제 감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며 홀로 침음을 삼켰다.
“이제 5년이군.”
긴 기다림이었다.
봄을 잊을 만큼 아득히 긴 겨울이다. 그러나 결국 봄은 오겠지. 길다 해서 끝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 날이 오면 온 하늘에 목련이 만발할 것이다. 무륜은 그리 믿었다. 믿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었다.
“돌아온다 했으니 오겠지. 귀신이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뭐가 되어서든 올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왔을 때 내가 없으면 그가 얼마나 슬퍼하고 낙심하겠나.”
황제는 이화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꾸었다. 위중혁은 제 질문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무륜이 고개를 숙인 그의 어깨를 툭 짚고 지나쳤다.
“가자. 시간이 없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차마 부여잡을 수 없었다. 저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다.
위중혁은 이화의 귀환을 믿지 않았다. 본인이 처리하겠노라며 가져온 피 묻은 무명천과 위사장의 의복을 여태 버리지 못하였으되, 그것과 이것은 별개였다.
무륜을 따라 하기에 그의 이성은 너무 단단했다. 굳건하기가 바위와 같았다. 그래서인지 아주 가끔, 깨부수고 싶어질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위중혁이 손을 들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그가 몰래 품고 다니는, 혈화(血華)가 핀 무명천이 있는 자리였다. 그는 자련 궁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무륜보다도 한발 먼저 이화의 비밀을 알게 된 때, 비탄에 가려진 기이한 희열이 꿈틀거렸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위중혁은 이화가 죽은 후에야 그를 향한 마음을 자각했다. 제 눈치가 둔하다는 건 알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나.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검을 들고 거꾸로 섰다. 그렇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았다. 온몸에서 흐른 땀으로 검끝에 웅덩이가 고여도 땅으로 내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