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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6화 (76/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6화

내 하루는 단조로웠다. 중턱에 있는 용소의 바위틈. 새로 잡은 거처에서 새벽녘 기지개를 쭉 켜고 나면, 곧바로 산을 올랐다. 위금산 정상의 거대한 바위가 내 자리였다.

의젓하게 앉아 세상을 돌아봤다.

상선이 말했다. 고결하지 않아도 되고, 백호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지금 내 안에 뿌리박힌 ‘신수’로서의 사명감은 이제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 갓 태어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신수로서 해야 할 일뿐이었다.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한 영물들과 새로 태어난 영물들을 두루 살폈다. 나는 그들에게 보다 세상을 풍요롭게 할 것을 명했다.

다음은 곳곳의 산천과 물길을 돌아봤다. 불이 난 곳은 없는지, 어디 막힌 곳은 없는지 이 또한 면밀히 살폈다.

마지막은 인간이었다. 그네들은 무수히 번성하여 좁은 대륙에 가득했다. 수가 많은 만큼 잠깐 사이에도 온갖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남 속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살인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르렁.

불쾌한 울음을 토했다. 놀란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미안함을 담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다시 산을 내려왔다.

물론 개중엔 선한 것들도 있었다. 하나 그들도 마냥 선하지만은 않았다. 반대로 악한 것들이 때론 선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복잡했고, 모순적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영물들처럼 선악의 개념 자체가 없는 편이 백배는 선했다.

‘내가 전생에 저런 것들과 같은 존재였다고.’

심지어 그중 하나를 사랑한 것 같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상선께서 망설을 하셨을 리도 없고.’

쩝. 입맛을 다셨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고민은 옆으로 치웠다.

단조롭다고 해서 바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용소에 스르륵 잠겨 들었다. 산의 정기를 느끼며 천천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바다처럼 깊은 그릇에 신성한 기운이 일렁였다.

수련을 마친 후엔 식사를 했다. 산 곳곳에 흐르는 수맥이 뭉친 곳. 그곳에서 정기를 빨아들여 뭉친 것을 풀고 동시에 배도 채웠다. 그리하고 나면 벌써 저녁이었다. 산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용소 위의 뾰족한 바위에 올라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

조팝나무 꽃처럼 하얀 별빛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혼자일까. 이 옆에 누군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누군가가 누군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내게 그런 이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뭐야.”

털북숭이 입이 열리며 허망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뭐냐고.”

앞발을 들어 북실북실한 가슴께를 꾹 눌렀다.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추위를 느낄 수 없는 몸에 한기가 들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얼굴 없는 사내에 대한 꿈이었다.

그는 나무에 매달린 나를 보며 어이없어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가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거기서 대체 뭘 하냐는 물음에도 나는 기꺼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대체.”

아련했던 꿈의 여운은 깨고 나서도 한동안 이어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봄.

만발한 목련 나무 앞에 오도카니 앉았다. 한참이나, 정말 한참이나 그를 올려다보다 문득 옆을 돌아봤다.

수풀과 나무뿐인 것이 이상했다. 꼭 격자창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 창에는 걸터앉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길고 예쁜 머리칼을 풀어 헤친 채 술병을 든 사람이었다.

여름.

오랜만에 인간 세상을 봤다. 특히 금국의 수도를 눈여겨봤다. 인간들이 드물게 온화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밤과 낮이 들썩였다. 그들은 ‘수련제’라는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인간, 특히 아이를 좋아하는 동물형 영물들이 동물인 척 함께 어울리는 것을 흐뭇하게 보다 어느 한 인간에게 시선이 멎었다.

검은 반가면을 쓴 사내였다. 졸부 같은 옷을 입었으나 숨기지 못한 고귀함이 묻어났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 사내의 행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슬렁거리며 축제가 열린 거리를 거닐었다.

아무렇지 않은 걸음걸음에 슬픔이 묻어났다. 그 슬픔이 특히 짙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당과나 한과 같은 군것질거리를 파는 자와 마주칠 때였다. 그는 멈춰 서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를 추억하는 눈치였다. 그러곤 어떤 것도 사지 않고 다시 갈 길을 갔다.

그의 머리에는 옷차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련이 새겨진 동곳이 꽂혀 있었다.

나는 한동안 가면의 사내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시 찾아보려 했지만, 축제는 끝났고 사내는 가면을 벗었다. 나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가을.

용소에서 한바탕 헤엄을 친 후 바위에서 몸을 말렸다. 물결치는 자리를 가만히 봤다.

저리 요동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보다 잔잔하고, 깊고, 넓어서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가운데 정자도 있어야 한다. 자수정으로 된 탁자가 있는 아름다운 정자가.

카가각.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항상 머무는 바위에 내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겨울.

남쪽에도 겨울은 왔다. 눈이 드물어 훨씬 황량한 겨울이었다. 나는 오지 않는 첫눈을 기다렸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기다리는 마음이 술렁거렸다. 첫눈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또 한편으론 그를 꼭 봐야 할 것 같은, 그런 양가적인 기분에 시달렸다.

유독 긴 동짓날 밤엔 그 밤만큼 긴 꿈을 꾸었다.

손가락이 다섯 개. 나는 인간이었다. 또 오른손엔 가위를, 왼손엔 하얗게 빛나는 천을 쥐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천을 오려 자개함에 넣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을 때, 가위와 천이 사라지고 사방이 검게 가라앉았다. 남은 건 무릎 위에 올린 함뿐이었다.

나는 그 함을 달각 열어 들여다보고, 닫았다가 다시 들여다보길 반복했다. 안에 든 것은 천이 아니었다. 그러나 깨어나고 나선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이 다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나는 결국 폭발했다.

크르르렁!

봄꽃이 만발한 온 산천을 내달렸다. 거대한 발이 온갖 색으로 가득한 벌판을 찍자 놀란 나비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화창한 하늘엔 몽실몽실한 구름이 떠 있었다. 햇살을 받은 냇물이 하얗게 빛났다.

온통 봄이었다. 이토록 오색이 찬연한 세상에 오직 내 가슴만 검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 봄은 오지 않았다.

“상선!”

이미 오수에 든 상선은 대답이 없다.

“상선!”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으르렁거림을 토하며 계속 그를 찾았다. 그가 아니면 답해줄 자가 없음이라. 이 내 마음의 공허가 무엇인지.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그 얼굴 없는 사내 때문인 게 맞는지.

그렇다면, 정히 그렇다면…… 그 인연이라는 사내를 만나면 이 공허함이 사라질는지.

“상서언!”

묻고 싶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간절했다.

그러나 해답을 찾는 일은 잠시 미뤄야 했다. 내가 태어나고 딱 1년이 되던 해. 지한국이 금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백호’의 기억이 사납게 털을 세웠다. 파멸적이고 음울한 것을 잔뜩 태어나게 하는 불온한 뱀. 그것이 백호인 내가 아는 전쟁이었다.

* * *

그로부터 다시 2년이 흘렀다. 나는 그동안 줄곧 지한국과 금국의 동태를 살피며 전황을 주시했다.

요 근래 덩치를 불린 거대한 왕국과 그 왕국의 두 배가 넘는 덩치를 가진 대제국의 전쟁이었다. 인간들의 전쟁인 만큼 수천 년 전의 대재앙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무수한 사람이 피 흘리며 고통받을 터.

‘정도를 넘는다면 개입하리라.’

그것이 자연의 이치와 균형을 무너뜨릴 화마라면 나서서 꺼뜨려 버리리라.

나는 그리 마음먹고 지한국이 전쟁을 선포한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을 지켜봤다. 특히 평지풍파를 일으킨 미꾸라지이자 이 모든 난장의 중심인 타낙한을 집중해 살폈다.

그리고 어떤 사실을 알아냈다.

‘사월린과 연결되어 있어.’

그는 사특하고 사악한 것의 힘을 빌려 쓰는 걸로 모자라 동조도 하고 있었다. 발톱으로 바위를 갉작였다. 그래도 아직 아니다. 아직은 직접 움직일 명분이 모자랐다.

순간 상선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내 천명에 대한 것. 또 그것이 전부 사슬이라는 것.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명을 떠나 어쨌든 타낙한이 하는 짓은 그른 일이었다. 전쟁은 인세의 일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감히 모든 생명을 등진 대역 죄인과 손을 잡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건 천명 때문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실은 알고 있었다. 천명 때문이라는 걸.

그래도 그만둘 수 없었다. 이제 태어난 지 3년. 나는 모든 것이 불완전했고 미숙했다. 심지어 상선마저 바로 오수에 들어 어디 묻거나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나는 오롯이 혼자였고, 그런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건 길을 알려주는 천명뿐이었다.

상선의 말처럼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지 모른다. 이 생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쌓이고, 전생까지 기억해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게 되면, 나는 천명이 아닌 다른 것을 추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꽤 희망적이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세 살 먹은 백호고, 그 ‘다른 것’이 생기기 전까지 좋든 싫든 천명에 의지해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르륵. 발톱으로 바위를 긁으며 전황을 되짚어봤다.

지한국은 전쟁 발발 이후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사월린의 하위 호환이나, 어쨌든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타낙한의 역할이 컸다. 그는 지한국의 건국신화를 십분 활용해 제힘이 상선의 뜻인 척 포장했다. 무지한 자들은 순수하게 열광했다. 그는 온전한 사기의 진작으로 이어졌다.

나는 타낙한이라는 존재에 집중했다.

일찍이 태자가 될 운명으로 태어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인지한 자. 왕이 병들었을 때부터 왕의 업무 전반을 맡아봤던 그는, 전쟁 일 년 전에 즉위하여 왕권을 공고히 했다.

검술을 수준급으로 구사한다. 하지만 일류이되 특급은 되지 못했다. 머리도 그랬다. 범재라기엔 뛰어나지만, 천재라고 하기엔 모자랐다. 보기에 따라서 애매한 인간이었다.

하나 단 한 가지.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선보이는 분야가 있었다. 사람을 쥐고 흔드는 능력이다.

‘그것도 사월린의 능력 중 하나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지만.’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 날씨와 염동력이 그렇듯 그 또한 온전하지 않을진대 저만큼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권모술수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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