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5화
상선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북방을 헤매는 사월린을 보게 했다.
타락한 기린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저리 봐도 정말 이쪽이 보이는 것은 아니라 했다. 그저 기운을 느껴 우리가 예 왔음을 아는 것뿐이라고.
철저한 고립. 그것이 사월린의 형벌이었다. 무표정하게 죄인을 응시했다. 나는 경멸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내게 상선이 물었다.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아느냐고. 나는 물 흐르듯 답했다.
“세상을 두루 살피고, 어긋난 균형을 맞추며, 어질게 다스리는 것. 그것이 제 사명입니다.”
“그래. 너는 관조자임과 동시에 수호자이기도 하지. 하지만 꼭 천명대로 살 필요는 없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미간을 찌푸렸다. 직속 상사가 수하에게 농땡이를 부리라 권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을 두루 살피되 특히 인간을 눈여겨보거라. 어긋난 균형을 주시하는 건 좋으나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 아니면 나처럼 인간들 사이에 스며들어 한 몇 년 어울려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다.”
“그럼 백호로 태어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없기는. 네가 눈을 떴으니 이제 곧 영물들도 깨어나겠지. 방금 네가 말한 건 그들이 할 것이다. 너는 그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아, 그럼 그렇지. 나는 상선의 뜻을 이해했다. 결국 직접 몸을 움직여 작은 일을 하지 말고, 대신 말 한마디로 성 하나둘쯤 움직이라는 뜻이었다. ……이 말을 누가 했었지? 두통이 일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자 상선이 다 안다는 듯 손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거스르려 하지 말거라. 그는 네 태생적 결함이니.”
결함이라는 말에 눈썹이 삐죽 솟았다. 상선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그 결함에서 결국 꽃이 필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가 안 되니 반발심만 일었다. 숨을 몰아쉬며 관자놀이만 눌러댔다. 상선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사람들은 생각하지. 신수는 고귀하고 정의로우며 신과 그 아래 신선들은 세상 모두를 공평하고 자비롭게 굽어살피노라고.”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개소리.”
순간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놀라서 그를 보자 상선이 입가를 비틀었다.
“세상에 우리만큼 변덕스럽고 편애가 심한 자도 없음이라. 사월린은 한 나무꾼을 유독 귀하게 여겼다. 나 역시 자식 같은 신수들을 편애했지.”
상선이 씁쓸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내 편애에는 당연히 사월린도 포함됐다. 인간과 달리 신수는 죽으면 ‘다음’이라는 게 없어. 소멸하거나 신선이 되거나 둘 중 하나지. 그리고 나는 무수한 인간을 죽이고 천태백호마저 죽여 없앤 사월린이 차마 소멸하도록 둘 수 없었다.”
나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상선이 그런 나를 다정하게 돌아봤다.
“목련아, 넌 백호이지. 우직하고 공명정대하며 세상의 이치를 중시하는 것이 네 천명이다.”
안다. 갓 태어나 모든 것이 흐릿한 지금, 그 천명만이 선명했다. 그것은 내 가야 할 길을 밝혔고, 해야 할 일을 알게 했으며, 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에 대한 사명감을 주었다.
자부심으로 어깨를 펴는 내게 상선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천명을 지울 수 있었다면, 지워서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명을 두지 않은 백호는 신수 중 가장 자유로운 존재란다. 누구보다 강인한 힘으로 뜻을 이루고 바람처럼 살아가는 아름다운 짐승이지. 이를 꼭 기억해 두거라. 네 머릿속에 가득한 것이 전부 사슬이라는 것을.”
나는 말을 잃었다. 발밑이 푹 꺼진 듯했다. 나를 나로 있게 하는 이 자부심은 사실 나를 죄인처럼 구속하는 사슬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묻지 않은 말에 대한 대답처럼 그가 덧붙였다.
“정의롭지 않아도 된다. 공평하지 않아도 되고, 고결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뭐든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하려무나. 지금 네 안에 뿌리박힌 것들은 내가 처음 신수를 만들 때 집어넣었던 그대로란다. 지금의 네겐 필요 없는 것이지.”
“어찌…… 어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십니까.”
충격 다음은 혼란이었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자신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미안하다.”
상선은 한마디 변명 없이 사죄했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미안할 짓을 해야겠구나. 나는 지금부터 오수에 들 거다.”
상선의 오수. 말이 오수지, 그건 한 인간의 생이 시작했다 끝을 볼 만큼 길게 이어지는 잠이었다.
“너무 오래 깨어 있었거든. 이제 그만 쉴 때가 되었지. 그러니 앞으로 네가 불러도 나는 답할 수 없다. 도움을 줄 수도 없어. 갓 태어난 너를 두고 잠들어야 하는 내 안타까운 심경을 부디 헤아려 주려무나. 내 애써 버티었으나 네 탄생을 지켜보는 것이 한계였다.”
다시 볼 순 있겠으나 오래 걸릴 것이다. 그를 인지하자마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제가 사랑했다던 인간이 대체 누구였습니까. 지금 어디 있습니까.”
놀랐다. 다그치는 말투는 물론이고 내가 그런 걸 물었다는 것 자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박동했다. 사기 조각처럼 날카로운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눈을 크게 떴다. 실타래 같은 것에 헝클어지듯 묶인 스스로의 영혼이 느껴졌다.
“잊거라.”
상선이 내 손을 그러쥐었다. 아주 꽉 쥐었다. 나를 애틋해하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 잊어야 네가 산다.”
잊으라 하는 그가 미웠다. 바로 방금 전까지 백호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올랐던 것은 까맣게 잊었다. 그저 내 심장을 불사르는 이 정체 모를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급했다.
“잊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기 있는 사월린처럼 되겠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게 될 것이다.”
상선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신수와 인간의 수명이 다른 것을 사월린이라고 몰랐겠느냐? 그 또한 알고 시작했다. 너처럼 괜찮을 것이라 장담하며 한 나무꾼을 사랑했지. 하지만 막상 때가 닥쳐오자 받아들이지 못했다. 봐라, 결국 녀석이 어찌 됐는지.”
그의 소맷자락이 크게 펄럭이며 손가락이 북방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상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저는 사월린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신수이지.”
“그와 같은 신수가 아니면 되는 겁니까.”
갓 태어나 딱딱하던 자아가 조금씩 물러졌다. 내 안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었다. 그게 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사명. 해야 할 일. 나라는 존재. 백호. 신수. 전생. 인연. 각기 다른 것을 품은 단어들이 헝클어지고, 부딪히고, 부서지기도 하며 서로 얽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무너져 내렸다. 눈밭에 파묻히기 직전, 상선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무형의 힘이 나를 들어 올렸다. 나는 허공에 둥둥 뜬 채로 상선의 뒤를 따라 사당에 되돌아왔다.
상선은 나를 침상에 눕혔다. 다정한 손길이 내 가슴을 도닥였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 그를 봤다. 상선은 바로 이걸 원했다는 듯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럼 잊지 않아도 되고, 묻지 않아도 된다.
미처 듣지 못한 뒷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나는 신수 본연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백호. 덩치가 보통의 호랑이보다 네 배는 컸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 집채만 했다. 배 아래에는 침상이었던 것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상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탁자 위에 서신이 한 장 놓여 있었다.
짧은 내용을 읽어 내렸다. 거기엔 갓 태어나자마자 급하게 성장시킨 것에 대한 사죄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말. 마지막으로 내가 터를 잡았으면 하는 곳의 지명과 지도가 적혀 있었다.
“위금산.”
천태백산과 연결된 동남쪽의 작은 산맥이자 그 끝에 있는 산의 이름이었다.
흠, 하고 웅크렸던 몸을 조금 움직였다. 지붕이 들썩이며 서까래가 조금 부서졌다.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창이 난 벽면을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꼬리를 슬렁거리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현무가 있는 곳을 슬쩍 보았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떠나고 싶은데 인간이 되는 법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인즉, ‘일단 지금은 떠나자’.
헝클어진 밧줄 같은 것이 자꾸 발에 걸리는 듯했다. 무언가가 떠나는 걸음을 방해했다. 그 연유를 알 수 없어 미련에 두어 번 돌아봤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곧장 위금산을 향했다.
* * *
건룡제 2년. 해의 마지막 달. 온 산천의 호랑이가 울부짖었다. 사냥꾼들이 기겁하여 보고하니,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말이 천자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 이틀 후부터 산간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고인들을 중심으로 한 가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백호가 돌아왔다.’]
[‘위대한 산신이 돌아왔으니, 온 산천의 영물들이 깨어나고 생명이 범람할 것이다.’]
호랑이의 기행에 고인들의 말까지 더해져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동요한 이들은 매일 치성을 올리며 상선께 저들의 안녕을 빌었다.
그러나 기도의 보람도 없이 영물들은 그네들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말하는 고양이였다. 아이가 꼬리 둘 달린 고양이를 품에 안고 오더니 위로 번쩍 들어 보였다. 고양이는 새로운 백호의 탄생을 전하곤 굳어버린 인간들 틈새로 슬렁슬렁 사라졌다.
이후, 빗자루가 혼자서 빗질을 했다. 나무와 이끼를 짊어진 거대한 바위가 움직였다. 깨진 찻잔에서 갑자기 발이 쑥 나오더니, 동동거리며 어디론가 달려가기도 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을 잠재운 건 황제였다. 그는 황궁 심부에 잠들어 있던 고문서의 내용을 밝히며 이는 상서로운 징조라고, 영물에 대한 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