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4화
휘영청 보름달이 뜬 날. 술에 얼큰히 취한 무륜은 북궁을 향했다. 흑피의 공단화가 소복이 쌓인 눈을 밟았다. 어떤 흔적도 없이 하얗게 쌓인 눈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았다.
그는 목련 나무 앞에 섰다. 나뭇잎 한 장 없이 가지만 앙상했다. 얼핏 죽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면 바로 저 가지에 목련이 피어날 터.
무륜은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품에 손을 넣은 그가 곱게 접힌 서신을 꺼냈다. 환한 달빛에 비추어, 무륜은 이화가 남긴 말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짧은 편이었다. 어조는 담담했고 내용도 별것 없었다. 저 없는 무륜을 걱정하고, 안녕을 기원하며, 부디 이리 가는 저를 용서해 달라 비는 것이 전부였다.
텅 빈 무륜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 못 박혔다.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나이다.]
무륜이 허탈하게 웃었다.
반드시 돌아온다고. 하하, 이러면 죽을 수도 없지 않아. 잔인하구나. 어찌 이리 잔인해. 참말로 지독한 정인이로다.
“하지만 네 온다 했으면 오겠지.”
죽었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오리라.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 기다리겠다.”
천년이고 만년이고 기다리겠다.
[당신이 떠올리면 저는 거기 있을 겁니다.]
그 문장에서 무륜은 이 세상, 이 하늘 아래 이화가 없음을 실감했다. 오직 제 기억 속에만 있노라고.
그가 서신을 그러쥐며 엎드러져 오열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목련이 피지 않는 봄이었다.
* * *
그곳은 어미의 태내처럼 편안한 곳이었다. 봄날 햇살에 감싸인 듯 따뜻했고, 움직일 때마다 고인 물이 조금씩 소리를 냈다. 나는 그 편안함에 취해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가끔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도 있었다. 누군가 곁에서 말을 걸 때였다.
“너밖에 줄 수 없지만, 내가 멋대로 가져갈 수도 없고, 네가 원한다 해서 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여린 너는 그를 마음이라 했지. 꽤 그럴듯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니란다. 나는 정말로 네게 원하는 게 있었거든.”
그렇게 넋두리하던 음성은 나를 감싼 막에 손을 얹었다.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의식이 선명해진 순간에 나는 태어났다. 챙그랑. 나를 감싼 말랑한 것이 어느새 돌처럼 굳어 있던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그걸 깨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 엎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에 흩어진 조각이 청경(淸鏡)처럼 나를 비췄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위아래로 쭉 찢어진 동공이었다. 왜 이런 모양이지? 내 눈은 분명…….
멈칫했다. 왜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이제 막 태어났고, 내 눈이 어떤지 지금 처음 확인했다.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곤 주변을 돌아봤다. 평범한 방에 평범하지 않은 기물이 보였다. 마치 고치처럼 방의 바닥과 천장에 고정된 거대한 수정. 한가운데 날카롭게 팬 자국은 내가 깨어난 자국이었다.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정 고치는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렵지 않게 설 수 있었다. 자박자박 맨발로 걸어 다른 수정 앞에 섰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신수가 잠들어 있었다. 하얗고 창백한 얼굴에 머리칼은 새까맸다.
분명 이 또한 처음 보는데, 몇 년은 보고 겪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고대는 물론이고 이제까지 없었던 새 신수이지.”
여상한 음성에 뒤를 돌아봤다. 그는 매끈한 낯의 사내였다. 옷은 하얀 비단이었고 소맷단과 밑단에 금실이 수놓아 있었다. 노란 허릿대에는 반대로 하얀 백옥이 걸려 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 고귀함을 만들어냈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 사내는 그 자체로 완벽했다.
나는 그가 상선임을 바로 알아봤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수정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현무입니까?”
“그래.”
이번엔 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는…… 백호군요.”
“그래. 이름은-”
“목련.”
상선의 입이 다물렸다.
“말을 끊어 송구합니다. 순간 머릿속에 목련 나무가 떠올랐습니다.”
목련꽃이 아니라 아름드리나무가 떠올랐다. 그것도 어느 격자창의 옆. 홀로 덩그러니 선 나무였다. 그를 떠올리자 가슴이 허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모로 기울이다 상선을 봤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내 눈엔 어쩐지 그가 서글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맞다. 네 이름은 백목련이다.”
“그렇습니까.”
“왜. 아닌 것 같으냐?”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넌 이제 막 태어났고, 이름 같은 건 가진 적이 없을 터인데.”
“글쎄요. 왜일까요.”
앞이 흐려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실감과 슬픔이 사무쳤다. 나는 무표정으로 눈물만 뚝뚝 흘리며 상선을 보았다. 매끈하던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상실을 느끼는 건 내가 아니라 상선인 듯했다.
“상선께선 제가 이러는 이유를 아십니까.”
“알지. 잘 알지.”
그가 세상 모든 시름을 등에 진 사람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분명 헌앙한 백호일진대, 지금 인간의 모습인 걸 전혀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뒤늦게 모순을 깨닫고 우뚝 굳었다. 상선의 한숨이 짙어졌다.
* * *
수정에 얼굴을 비춰봤다. 이목구비가 흐릿하다. 상선이 옆으로 붙어서며 말했다.
“수정에 잉태시키려고 내 형상을 임의로 빚어 넣어 그렇다. 좀 지나면 네 본래 있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야.”
“현무는요? 저 녀석은 선명하게 보입니다만.”
“저 녀석은 좀 달라. 근원이 될 시…… 육신이 내게 있었거든.”
그는 내 영혼이 아주 오래되었다고 했다. 얼마나 오래되었냐면 이 연 대륙보다도 오래되었다고 했다. 또 그 긴 시간을 상선의 수중에 있었다고.
그 연유가 궁금했으나 상선은 대놓고 말을 돌렸다. 나는 캐묻지 않았다. 그가 침묵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쨌든 나는 오래 묵은 영혼이었고, 신수가 될 자격도 충분했다.
문제는 자아였다. 본래 남아 있던 자아는 긴 시간에 깎이고 마모되어 사라졌다. 해서 상선은 텅 빈 내 혼을 하계에 심어, 다시 한번 자아를 얻게 했다.
“그게 저인 겁니까.”
“정확히는 전생의 너지. 그 인간은 2년 전 지한국에서 죽었다.”
죽음을 듣는데도 담담했다. 전생은 전생일 뿐, 지금의 나는 세상의 한 축을 담당하는 신수였다. 내 반응에 상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인연이라는 말을 아느냐?”
“압니다.”
“단순히 뜻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세상에 얽혀 있는지 아느냐는 말이다.”
그를 알면 내가 신수가 아니라 신선이겠지. 그런 뜻을 담아 불퉁하게 바라보자 내내 굳어 있던 상선의 낯이 희미하게나마 풀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지. 어지간해선 끊어지지 않고,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연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으로 어떤 사내의 모습이 스쳤다. 빛을 등져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헌앙한 풍모임을 알 수 있는 자였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무사인가? 하지만 칼은 차지 않았다. 그러다 옷을 봤다. 보통 귀한 신분이 아닌 듯했다.
“네 인연을 봤구나.”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찰나 꿈을 꿨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나는 땅의 백호였다. 누구보다 굳건하게 세상을 아울러 균형을 지키는 것이 내 천명이다. 그런데 이리 자신을 흔드는 것이라니. 심히 불쾌했다.
“인연이란 본디 그런 것이지.”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없다.”
상선이 단언했다.
“나도 마음 같아선 월하노인의 가위를 빌려다 끊어주고 싶다만 그는 불가하다.”
“어째서입니까.”
“네가 원치 않으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딱 그런 심경을 담아 보자 상선이 손짓했다.
그러자 주변에 바람이 일더니 적신 위로 옷이 만들어졌다. 몸을 돌린 상선이 방을 나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뒤따랐다. 문을 나서기 직전, 잠깐 뒤를 돌아 얌전히 잠든 현무를 응시하다 다시 상선을 쫓았다.
“이곳은 천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사당이다. 날 모시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곳이지.”
“압니다.”
“그걸 네가 어찌 알까. 이제 막 태어났으면서.”
“그는 제가 신수이기 때문입니다.”
“반만 맞았다. 네가 신수로서 아는 건 이곳이 천태백산의 정상이라는 것이다. 죽은 선대 백호의 몸을 밟고 선 것이니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예가 나의 사당이라는 건 네 전생의 기억으로 아는 것이다.”
보랑을 가로지르는 상선의 등을 보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은 안마당과 낡은 건물의 모습이 낯익었다. 그 낯익음이 생경했다.
“너는 지금 네가 아는 것이 신수로서 아는 것인지, 전생의 기억으로 인해 아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신수로서의 너 자신이 안정되거나 혹은 전생의 너와 연이 있는 것을 만나면, 그를 분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분리된다면 이 짜증 나는 혼돈을 무의식 저편으로 밀어내는 것도 가능할 터.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잘된 일이군요.”
상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앞서가는 그의 등이 조금 굳은 듯했다.
어느새 밖이었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가득했다. 상선이 만년설을 밟으며 웬 비석이 선 곳을 향해 걸었다. 그가 늦은 대답을 했다.
“그렇지 않다. 너는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것이야.”
“어째서입니까.”
“원망하지 않곤 못 배길 만큼 아프고 힘들 테니까. 하니 무언가 떠오르거든 그대로 묻어버려라.”
“묻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월린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나는 신수였다. 자연히 사월린에 대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어리석고 더러운 것의 전철이라니. 상선의 말은 저주와 다름없음이라 발끈하여 물었다.
“전생의 제가 인연이라던 인간을 사랑했던 겁니까?”
“아니.”
비석 앞에 멈춘 상선이 나를 돌아봤다.
“아마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