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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3화 (73/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3화

이화는 무륜에게 남긴 서신을 고쳐 썼다. 각혈한 직후 제게 입을 맞춘 무륜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저가 없는 무륜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이화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하고픈 말을 억누르고 대신 해야 할 말을 남겨두었다.

“하.”

타낙한은 속이 꼬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날 선 물음에 이화는 서글픈 눈으로 타낙한을 봤다. 타낙한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이길 수 없다. 타낙한은 덤비기도 전에 패배를 시인했다.

“맹세하마. 네 원대로 죽은 줄도 모르게 조용히 묻어줄 테니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라.”

“감사합니다.”

이화는 바로 무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돌렸다. 타낙한이 탄식을 흘렸다.

“어쩌다 너 같은 게 그런 얼굴로 태어났을꼬.”

“그건 상선께 물어보시지요.”

“내가 말을 말지.”

이화가 희미하게 웃었다. 타낙한은 곧 꺼질 촛불 같은 그 미소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제 안의 어딘가가 망가진 것 같았다. 이화를 앞에 두면 증오스러운 두통이 사라지는 한편,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이성은 사라지고 충동만 남았다.

그는 사랑에 미친 사내가 되어 가느다란 이성으로 간신히 자신을 통제했다. 그게 또 나쁘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쿨럭!”

이화가 각혈했다. 그는 제 손바닥을 적신 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루…… 가 채 못 되는군.’

각혈의 단위는 이제 시간이 됐다. 제 뒤에 선 죽음의 숨결이 선명했다.

타낙한이 물이 담긴 은 대야를 가져와 그 손을 씻겼다. 직접 씻을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그렇게 했고, 이화는 그를 내버려 뒀다.

“첫눈을…… 보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화의 시선이 창으로 가 있었다. 처소의 창은 귀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금국에서는 황궁에서도 전부 격자창을 썼다. 이것 하나는 좋구나. 이화는 천천히 내리기 시작한 올해의 첫눈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지한국의 왕도는 금국의 수도보다 북쪽에 있으니까 겨울도 더 빨리 찾아오지.”

“그렇군요.”

손을 다 씻긴 타낙한이 은 대야를 치우고 부드러운 영건을 들었다. 이화의 손을 꼼꼼히 닦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의원이 그러더군. 앞으로 길어봐야 나흘이라고.”

“그렇군요.”

“넌 그렇군요, 밖에 할 말이 없나?”

“예.”

“하, 나, 진짜.”

타낙한이 재차 구시렁거렸다. 이화가 작게 웃었다.

순간 타낙한은 이 정도는 무시당해도 괜찮다 생각해 버렸다.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이화가 그런 타낙한을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황위 쟁탈전에 개입했던 제삼의 세력은 당신이었지요.”

금국에 그 정도로 깊이 침투할 수 있는 자본력과 무력을 가진 자. 설령 꼬리가 밟혀도 그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자. 그 두 가지만 생각해도 답은 나왔다. 아마 무륜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물증이 없을 뿐.

“맞다.”

타낙한은 순순히 인정했다.

“저를 이리 만든 건 남방의 독이지만, 그를 나포하여 사용한 건 당신이 보낸 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내게 보낸 당신이 이러는 게 그저 우습군요.”

“내가 노린 건 황자들이었다.”

“세 살배기 애도 아니고, 변명 한번 비루하군요.”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당신의 반응을 보고 싶었습니다. 괴로워하는 걸 보면 속이 좀 후련할까 했는데, 아무 느낌 없군요.”

타낙한이 멈칫 굳었다. 눈을 가늘게 뜬 이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타낙한이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차라리 경멸하고 욕하고 매도했다면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혹시 지금 후회하고 계십니까.”

“아니.”

일말의 재고 없이 타낙한이 답했다. 이화가 예상했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진정 저를 연모한다면 곧 하게 될 겁니다.”

이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네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너는 내가 죽은 후에 생지옥을 겪게 될 거라고.

“그를 보지 못해 안타깝군요.”

“나는 내 성정이 잔인함을 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너도 나 못지않구나.”

이화는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벽을 보는 그의 낯이 초췌했다. 시시각각 시들어가는 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타낙한이 재차 낯을 일그러뜨렸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굉장히 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이화가 중얼거렸다. 무륜에겐 할 수 없던 말이었다. 이것만은 좋았다. 가감 없는 제 본심을 내보일 수 있었으니까.

“무륜 님이 보고 싶습니다.”

죽고 싶지 않다. 무륜이 보고 싶다. 죽음 앞에 선 그의 욕망은 두 가지로 함축됐고, 함축된 만큼 강렬해졌다.

타낙한이 이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화의 앞섶에는 각혈하며 튄 피가 여태 남아 있었다.

“만약 내가 널 살린다면, 진심으로 나를 모시겠다 맹세해라.”

이화는 대답이 없었다. 초조해진 타낙한이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시조로부터 힘을 물려받아 쓴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제 몸에서부터 북쪽을 향해 가늘게 뻗은 실이 보였다. 끝은 보이지 않지만, 끝에 뭐가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분명 이능의 원천과 연결되어 있을 터.

상선은 절대 아니었다. 그보다 위계는 낮고, 차가우며, 분노와 원한에 가득 찬 존재. 그리고 그 존재는 이화가 지한국에 온 순간부터 보다 선명해졌다.

타낙한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가끔 실을 타고 찾아와 제 눈을 통해 이화를 지켜보는 걸. 그럴 때면 뱃속이 타는 듯했다. 뇌는 절절 끓었고 온몸에 핏줄이 섰다. 저가 아닌, 유배당한 신수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꼭두각시라고 할 수도 있다. 한편으론 꼭두각시면 어떻냐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

두통이 사라지자 남은 자리에 간사함이 차올랐다. 그가 찾아오고 나면서부터 이전에 비할 바 없이 힘이 강해졌다. 통증 없이 힘만 커졌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화는 여전히 무감각하게 자신을 대했다. 타낙한은 그마저도 좋았다. 그건 본능에 의한 사랑이었고, 중독처럼 스민 맹목이었다.

“그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주마. 내키진 않으나 가끔 무륜을 보러 가는 것 정도는 윤허해 주겠다.”

대답이 없었다. 타낙한은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이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무슨 말이든 할 줄 알았거늘.

타낙한은 낙심하여 그를 보았다. 어느새 이화의 눈이 감겨 있었다. 그제야 그는 제 손에 잡힌 이화의 손에 생기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묵묵히 맥을 짚었다.

이화의 죽음을 확인한 타낙한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

그가 허리를 접으며 웃었다. 손에 쥔 이화의 손은 여전히 놓지 못한 채였다.

“너는 마지막까지 내 마음을 흔들고 가는구나.”

타낙한의 눈이 괴롭게 이지러졌다.

“네가 이겼다. 지한국은 향후 3년간 금국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화의 삶이 저물었다.

* * *

분노하고 날뛴 것은 몽휼과 위중혁에게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뿐, 홀로 남은 무륜은 처음엔 담담했다. 이화가 흑월의 죽음에 그러했듯이.

그러다 낙엽이 모두 지고 한풍이 불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다시 점점 미칠 것 같아졌다. 지한국으로 향했을 이화가, 죽어가면서도 묵묵한 걸음을 옮겼을 그가 생각나, 하루에도 열두 번 속이 끓어오르며 오장육부가 녹아내렸다.

새로운 악몽이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북궁의 목련 나무에서 저를 기다리는 이화가 나왔다. 허둥지둥 달려가면 팔을 활짝 벌려 맞아주었다. 활짝 핀 낯이 여전히 꽃 같았다. 그러나 곁에 본인이 없음에 봄날 같은 꿈도 악몽이 됐다.

하지만 그 악몽이라도 없었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 할 일 없을 것 같았던 자진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폐하.”

그쯤, 위중혁이 이화의 전언이라며 서신을 한 장 건넸다. 무륜은 그를 차마 펼쳐 보지 못했다. 영원한 헤어짐을 슬퍼하는 말이라도 적혀 있을까 봐. 그에 저를 위로하는 말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 두렵다. 여동생과 어머니와 가신들을 잃고 홀로 북궁에 유폐되었을 때도 이렇진 않았다. 지금껏 겪은 그 어떤 일보다 이 서신 한 장이 더 무서웠다.

“지한국에서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나.”

“예. 위사장께서 도착했다는 소식도 없고, 그런 기미도 없습니다. 하나 이쪽으로서도 접근이 쉽지는 않은지라…….”

지한국 왕실에서 소유한 암살단의 실력이 예상 밖으로 뛰어났다. 어쭙잖은 새나 쥐는 근처도 가지 못하고 그들의 단도에 유명을 달리했다. 간신히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건 밀영군 정도였다. 하나 좋은 소식은 없었다.

왕도 어디에도 위사장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왕궁도 마찬가지였다. 타낙한이 머무는 태자궁까진 살펴보지 못했으나 근처를 맴돌며 지켜본 결과, 없을 가능성이 높음을 확인했다.

“계속 주시해.”

“명을 받듭니다.”

무륜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직접 찢어발겼던 계약서의 내용이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올해가 가기 전 지한국으로 가면, 이후의 생사에 관계없이 향후 3년간 전쟁은 없다.

이제 곧 1월 1일. 삼원(三元)의 정월 초하루였다. 무륜은 이 순간에도 착실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바라고 있었다. 올해가 끝나는 순간 지한국이 선전포고를 하거나 거병을 하면 이화는 타낙한에게 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몽휼과 위중혁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런 무륜을 지켜봤다. 그리고 1월 1일이 되었다. 2일이 되고, 3일이 되고, 1월의 반절이 지났다. 지한국은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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