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2화
“당신은 산 겁니까, 죽은 겁니까.”
“여율령은 죽었다.”
“그럼 어떻게 봐도 여율령으로 보이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름은 없다. 다만 하계와 선계, 그리고 신계의 이들은 나를 상선(上仙)이라 부르지.”
“하.”
이런 일을 겪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그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넓은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벚나무 뿌리가 위로 솟더니 나무 협탁과 두 개의 의자를 만들어냈다. 자신을 상선이라 말하는 여율령이 착석했다.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제겐 여전히 여율령이십니다.”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것이겠지.”
“아버지.”
여율령이 멈칫했다. 하늘처럼 깊은 눈이 바다처럼 짙어졌다. 방심하면 그대로 휩쓸려 나라는 존재가 없어질 것 같았다.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신과 신수는 마냥 높은 데서 하계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하셨죠.”
“맞다.”
“그럼 직접 하계에 내려온 이유가 뭡니까.”
“아직은 말해줄 수 없다.”
“나중에 말해주긴 하실 겁니까.”
“때가 오면.”
여율령이 눈을 내리깔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때 너는 분명 나를 원망할 것이다.”
“황궁 서고에 숨긴 서책을 보라 하셨을 때도 같은 말을 하셨죠. 그걸 보고도 전 원망 따위 하지 않았습니다.”
서책의 내용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여율령은 내가 타낙한에게 가길 바라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모든 걸 이해했다. 여율령이 내가 저를 원망할 것이라 염려했던 이유와 굳이 번거롭게 뜻을 돌려 전한 까닭까지도. 세상 어느 아비가 아들더러 ‘나 죽고 나면 너도 아마 죽을 테니, 어차피 스러질 목숨 전쟁을 막는 데 쓰자’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금국은 절대 무너져선 안 돼. 적어도 타낙한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안 된다.”
그래서 네가 거래하길 바랐다고. 여율령이 탁자 위로 겹친 손을 만지작거렸다. 섭선이 없는 손이 허전해 보였다.
“그리고 이번은 달라. 정말로 다르다. 너는 나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게 두려우시군요.”
여율령이 입을 다물었다. 정곡이었나 보다.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입으로는 여전히 여율령이다 했으나 그래도 상선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데, 그 걸림이 깨끗이 가셨다. 실쭉한 미소를 띤 채 섭선을 살랑이며 못된 이들 속 긁기를 즐기던 그 여율령이 맞았다.
“장담하건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함부로 장담하는 버릇은 여태 고치질 못하였구나.”
여율령이 쓰게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언덕의 풀들이 바람도 없이 쏴아아, 쏴아아- 파도를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시간이 다 됐구나.”
그 시간이 무언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하늘에 점이 생겼다. 점은 점점 커져 구멍이 되어갔다. 그렇게 넓어진 공간의 가장자리가 벚꽃이 되어 흩날렸다.
“흑월에 대한 건 알고 계십니까.”
“그래.”
나는 ‘하얀 복사꽃 가지를 놓아둔 것이 당신이냐’고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여율령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잘 거두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주 혼쭐이 나야지. 어디 할 게 없어 자진을 하누. 네 제정신이냐고 아주 단단히 으를 참이다. 그러고 나면…….”
여율령이 답지 않게 말을 늘였다. 정확히는 나오던 말이 목에 걸린다는 기색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목을 쥔 듯했다. 그가 결국 혀를 찼다.
“……아무튼, 흑월은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네 몸이나 신경 써라. 여율령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울 것 같은 기분인데 웃음이 나왔다. 벚꽃은 이제 온 언덕에 가득했다. 점점 좁아드는 공간이 불살라지는 종이 같았다. 벚꽃은 어느새 우리가 앉은 탁자까지 왔다.
하반신과 왼팔이 사라진 여율령이 말했다.
“네가 나를 부르는 그 말, 상선 희 견차처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한 말이었단다.”
낮은 언덕과 벚나무가 다시 벚꽃이 되어 흩날렸다.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엔 눈을 홉뜬 타낙한이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을 휘 둘러봤다. 화려한 내실이었다. 타낙한은 원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문부를 보고 있었던 듯했다.
채챙. 날붙이가 내 목을 둘러쌌다. 나는 태연히 맞은편의 타낙한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계약을 이행했습니다.”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온 타낙한의 눈동자가 곧 야살스레 휘었다.
“이제 전하의 차례입니다.”
“……하!”
타낙한이 실소하며 손을 내저었다. 목에 드리웠던 날붙이가 일사불란하게 사라졌다.
내실은 타낙한의 집무실인 듯 책장엔 서책과 문부가 가득했다. 각 기둥에는 한군이 서 있었다. 금국의 금군과 같은 이들이었다. 위사나 밀영군은 없었는데, 대신 타낙한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뛰어난 암살자들이 그 역할을 대체했다. 지금 느껴지는 찌를 듯한 시선들의 주인이었다.
암살자는 기척을 숨기고 은밀한 움직임에 능한 만큼 타인의 기감이나 은신을 알아차리는 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의 과정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터였다.
대충 봐도 암묵단에 필적할 실력자들이었다. 어느 쪽이 더 강하냐고 굳이 물으면 암묵단이겠지만 아마 피해는 괴멸적일 것이다.
‘이런 이들에 대한 보고는 없었는데. 이토록 조용히 데리고 있었다는 말이지.’
“미구르.”
소리 없이 나타난 이가 부복했다. 복면 위로 얼핏 보이는 얼굴이 낯익었다. 타낙한과 함께 금국에 왔던 귀족 중 한 명이었다. 역시 귀족인 척하는 호위였군.
“귀한 손님이 오셨다. 모시거라.”
“예.”
타낙한이 내 어깨에 툭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곧 찾아가지.”
평생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 * *
새벽녘. 무륜은 서늘한 추위에 눈을 떴다.
커다란 침상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그는 오른쪽에서 자고 있었다. 왼쪽엔 이제 아무도 없는데 그의 몸은 이화의 자리를 기억했다. 망연한 낯으로 어깨를 움츠린 그가 빈자리를 그러쥐었다. 보료가 그의 손아귀에 휘말려 들어갔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한참 그렇게 있던 무륜이 몸을 일으켜 광실의 구석으로 갔다. 엊그제부터 들인 화톳불은 식어 있었다. 그를 멍청하게 내려다보던 무륜은 화로 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아직 식지 않은 숯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 점 온기도 없었다. 무륜은 이상함을 느꼈다. 애당초 자신의 처소 안에 있는 화톳불이 식을 리 없다. 식기 전에 누군가가 바꿨을 테니까.
그는 밖으로 나섰다. 드넓은 보랑이 텅텅 비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래서 무륜은 이것이 꿈인 것을 알았다.
무륜은 달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화가 어디 있을지.
‘세상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 쓰임을 다하는 물건도 있는 법입니다. 저 화톳불처럼요.’
그가 향한 곳은 북궁이었다.
‘제가 전하의 화톳불이 되겠나이다.’
이화는 분명 거기 있었다. 그를 만나면 물을 것이다. 화톳불을 찾아 헤매는 추운 자가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땐 어찌해야 하냐고. 어이해야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이 추위를 떨쳐낼 수 있느냐고.
“이화야!”
하나뿐인 저의 화톳불은 그를 가르쳐 주지 않고 떠났다.
“이화야!”
그가 처소로 삼았던 외진 방의 창가. 우두커니 선 목련 나무가 보였다.
이화는 만개한 목련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급하게 달려온 저를 보고도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 순간, 무륜은 깨달았다. 이 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반평생을 뒤따라온 악몽은 이화가 떠난 후 이같이 바뀌었다. 무륜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리 자주 찾아올 것이면 아예 떠나질 말지. 그리 매정히 가놓곤 어찌 이래.”
무륜이 손을 내밀었다. 이화는 진정 목련의 화신처럼 웃었다.
해가 급하게 떴다. 스르륵 자리를 옮긴 해가 머리 위로 올랐다. 환한 햇살 아래서 이화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무륜은 허겁지겁 팔을 뻗어 그의 몸을 받았다. 그리고 으스러져라 부둥켜안았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에 감사했다. 진정 생생한 꿈이었다. 그의 감촉, 온기, 냄새. 무엇하나 모자라지 않았다. 허무한 충만감이 무륜을 채웠다.
이 순간 그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제발 조금이라도 늦게 눈뜨길. 누구도 자신을 깨우지 말길.
이화는 말없이 안겨 있었다.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도닥였다. 마치 달래듯이. 위로하듯이. 그것이 진짜 이화 같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저승의 일을 누설하는 것이 금지되어 이리 마주 안아줄 수밖에 없다고. 그리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무륜의 어깨가 들썩였다. 가능하다면 이 꿈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새벽은 지나고 아침이 와 무륜은 여전히 품에 안고 있는 이화의 감촉이 흔들림을 느꼈다. 거대한 손이 쑥 내려와 그의 의식을 통째로 잡아채 위로 던졌다.
감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차디찬 현실이었다.
눈을 뜬 무륜은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지울 생각도 않고 멍하니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시선이 처소의 구석을 향했다.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 * *
지한국에 온 이후, 이화의 몸은 급격히 나빠졌다. 마치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운 나무가 제 소임을 다했다며 시들어가는 것처럼.
이미 독에 대해 알아보고 있던 타낙한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했다. 하지만 딱히 차도는 없었다. 이화는 서서히, 또 착실히 죽어갔다.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제가 죽으면 시신은 아무도 모르게, 또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은밀히 묻어주십시오. 죽었다는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해주시면 더 감사하겠군요.”
“……황제 때문이군.”
이화는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