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0화 (70/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70화

몇 번이고 담금질해 굳혔던 마음이 가장자리부터 부스러졌다. 이화의 눈가에도 결국 눈물이 고였다. 무륜이 뭔가 더 말하려 했으나, 하지 못했다.

이화가 잡고 있던 그의 뺨을 살며시 당겼다. 달에 이끌리는 썰물처럼 무륜은 속절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화의 입술이 무륜의 입술을 덮었다. 맞물린 틈새로 서로의 눈물이 고였다 사라졌다.

천천히 떨어진 이화가 봄꽃처럼 웃었다.

“폐하. 폐하가 제 봄이십니다.”

<9장 이화의 봄 완결>



홀연히 다가온 인연이 떠나갈 때 흔적 없이 갔던 것처럼, 자연스레 일궈졌던 평화로운 일상은 불현듯 끝을 고했다.

10장 봄 잊을 겨울

또 지하 뇌옥이었다.

안을 채운 집기는 전보다 화려하고 풍요했다. 달라진 점은 황궁의가 붙었다는 거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나를 찾아와 진맥을 보고 탕약을 지어 올렸다. 별 효험은 없었다. 각혈은 여전했고, 시큰거리는 통증이 늘었다.

손을 들어 가슴께를 문질렀다. 통증이 생겼다는 건 좋지 않았다. 그리 과하지는 않지만 슬슬 몸이 무너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므로.

하긴 벌써 넉 달이 훌쩍 지났다. 나는 예상보다 훨씬 잘, 그리고 오래 버티고 있었다.

바짝 붙어 선 죽음이 느껴졌다. 목덜미에 하얀 숨결이 닿았다. 자개함에서 처음 마주한 이후, 호시탐탐 내 목을 노리던 그것은 이번엔 정말인 줄 아는 건지 사이하게 웃었다.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이건 그냥…….”

몽휼은 쌩하니 가버렸다. 찬바람이 휘날렸다. 나는 차마 잡지 못하고 애매하게 들었던 손을 내렸다.

한숨을 쉬었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저 끝에는 위중혁도 함께 갇혀 있었다. 무륜이 몽휼과 위중혁을 불러다 내 상태를 말했을 때, 실은 알고 있었음을 고한 것이다.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우직함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가 갇힌 뇌옥은 내가 갇힌 곳과 다를 것이다. 차가운 돌바닥. 벽면을 흐르는 물. 말라붙은 핏자국과 살을 에는 냉기까지. 지하 뇌옥 그대로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절대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날, 그 대화의 끝에서 무륜이 한 말이었다.

나는 그대로 지하 뇌옥에 갇혔다. 무륜은 그 이후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배신감도 이해했다. 하지만 염치없는 마음이 무륜을 보고 싶어 했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곧 지한국으로 떠나 거기서 죽을 터였다. 도망치는 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믿음이 있었다. 허무맹랑한 소리일 수 있지만, 그는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선명한 확신이 되었다.

스르륵.

등 뒤쪽, 침상의 기둥 옆에 그림자가 하나 스며들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침상에 가 천개를 내리고 드러누웠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지하 뇌옥인지라 얇은 천개에도 인영은 비치지 않았다.

암묵단이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머뭇거리다 검지로 뭔가 적는 모양새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황궁의 심부였고 도망가겠다는 소릴 한 탓에 금군과 밀영군이 포진해 있었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말소리라면 들킬 위험이 컸다.

모로 돌아눕자 암묵단의 손가락이 내 등에 닿았다. 그러나 그렇게 닿고도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끝이 희미하게 살을 눌렀다. 마치 떨림을 감추려 힘을 주는 느낌이었다.

순간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의 불길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몸을 확 돌려 그의 손목을 움켜쥐곤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무 말 마라. 지금 하려는 말이 무어든 하지 마.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귓가에 바짝 닿은 입이 비보를 전했다.

“흑월이 죽었습니다.”

* * *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저 멍했다. 그다음엔 되물었다. 네 뭐라 했느냐.

암묵단원은 음울한 어조로 재차 흑월의 죽음을 전했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했다. 발견한 것은 서신을 품은 그의 시체뿐. 그는 제 방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고 했다.

그 순간, 도련님도 없어질 거라 말하던 흑월의 모습과 자살 아닌 자살을 했다던 위무현의 일화가 뇌리를 스쳤다.

고개를 있는 힘껏 가로저었다. 잘못 알았겠지. 뭔가 착오가 있었겠지. 그는 아닐 것이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바짝 목이 타 잔에 물을 따라 마셨으나 갈급함은 여전했다. 묵묵히 지켜보던 암묵단이 말을 이었다. 자신이 분명 두 눈으로 그의 죽음을 확인했노라고. 심장은 멎고 숨도 멎었다 했다. 그 말을 듣는 내 숨도 멎었다.

한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흑월의 시신이 사라졌다. 그의 몸을 눕혔던 자리엔 계절을 잊고 핀 복사꽃 가지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고 한다.

“……복사꽃 가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느냐?”

되물음에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도 붉은 기 하나 없이 온통 새하얀 복사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복사꽃 가지. 움칠하고 멋대로 떨린 손에서 물잔이 미끄러졌다. 아래로 떨어진 사기잔이 산산조각 났다. 철창 밖의 금군이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손이 미끄러졌을 뿐.”

떨림이 가시지 않은 손을 다른 손으로 붙드는 내게 암묵단원이 서신을 한 장 건넸다. 그리고 한쪽 손을 가져가 손바닥에 적길, 흑월의 전언이라 했다. 말이 전언이지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서신을 펼치지 못했다. 여율령과 달리 그저 말로만 전해 들은 탓일까. 실감이 나지 않던 부고가 그제야 심장에 와 박혔다. 흑월이 죽었다.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흑월의 대화법으로 암묵단원이 물었다.

-아무것도.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는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귀를 적는 것도, 적힘 받는 간지러움도 모두 흑월이 알려준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알아서 할 터이니, 너희는 너희의 일을 하거라.

-저희는 모시는 주인을 섬기고 그 명에 따르는 것이 숙명이며 사명입니다. 그 주인은 지금 도련님이시지요.

-그렇다면 전하거라. 지금부터 황제 폐하를 새 주인으로 섬기라고.

-그 명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주인을 바꾸라는 명은 듣지 않습니다. 대신 도련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도련님의 소중한 분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꼭 돌아오시라. 그리 말한 암묵단원은 내가 뭔가 대답하기 전에 모습을 감췄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이젠 알지 않아.”

허탈하게 웃었다. 순간 울컥하고 피가 치달아 올랐다. 각혈에 상해 내용을 못 보게 될까 봐 접은 서신을 품 안 깊숙한 곳에 욱여넣었을 때, 철창문이 열리고 의원이 들어왔다.

“헉.”

그는 울면서 피를 토하는 나를 보곤 기함했다. 금군이 비조처럼 날쌔게 뇌옥을 달려 나갔다. 필시 무륜에게 가는 것이다. 의원은 허둥거리며 나를 진맥했다.

“몸 상태는 이전과 같습니다. 극독에 중독된 것치곤 양호한데…….”

의원이 내 얼굴을 힐긋거렸다. 근데 왜 이렇게 곧 죽을 낯이냐는 뜻이겠지. 나는 웃었다. 그리고 무륜이 왔다.

“이화야!”

그날 이후 처음 보는 내 임이었다.

“폐하.”

무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내 입가며 앞섶에 흥건한 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금군을 재촉해 철창을 연 그가 다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나는 양팔을 벌려 그를 맞았다. 너른 품에 폭 안기자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여기가 내 있을 곳이었다. 이 품이 바로 내 안식처였다.

무륜은 그대로 나를 데리고 나왔다. 돌아온 건 그의 처소였다. 무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그랬다.

그때부터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무륜은 정무를 보고 나는 그 옆에 위사장으로 자리했다. 근무 일수는 반으로 줄었다. 그나마도 의원이 내 몸에 아무 이상이 없음을 거듭 장담하고서야 나온 결과였다.

사실이다. 속이 시근거리고 피는 토하지만 통증은 미미했다.

이 독이 얼마나 사특한 물건인지 새삼 실감했다. 죽어가는데 그를 실감할 수 없다니. 언뜻 보기엔 상냥한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죽기 직전까지도 멀쩡히 있다가 어느 순간 고꾸라져 죽는 거다.

“쿨럭.”

각혈의 주기는 이제 이틀로 자리 잡았다. 품에 지닌 무명천을 꺼내기 전, 어느새 다가온 무륜이 내 입가에 비단 천을 대주었다. 그의 눈은 심각했지만 더는 이지러지지 않았다. 그저 묵묵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천이 발치로 떨어졌다. 말릴 새도 없이 턱과 허리가 잡혔다. 무륜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폐하!”

기함한 위사들이 달려들어 무륜을 뜯어냈다. 나 역시도 있는 힘껏 그를 밀쳤다.

“이 손들을 다 잘라주랴.”

그제야 움찔한 위사들이 통촉하여 달라며 부복했다. 무륜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담담한 얼굴에서 눈만이 타올랐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물었다. 내 피가 독이 되지 않음을 여율령으로부터 들었으나 그래도 가슴이 철렁했다. 무륜이 제 입가에 묻은 내 피를 닦으며 피식 웃었다.

“글세, 뭘까. 네가 봐도 내가 미친 것 같으냐?”

“폐하.”

“그럼 미치지 않고 어찌 버틸까.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네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니. 뒤따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않나.”

“폐하!”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기함할 말에 밀영군마저 후드득 떨어져 내리며 부복했다. 금군들도 엎드러졌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심장이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통증이 갈비뼈를 후려쳤다.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허리를 숙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놀란 무륜이 달려들었다.

“이화야!”

“헉. 하악. 헉.”

“숨. 숨 쉬거라!”

거친 이명과 함께 소리가 멀어졌다. 무릎이 바닥을 쿵 찧고 몸에서 힘이 빠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