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9화
“폐하.”
“나는 닥치라고 했다.”
몽휼의 입을 막는 무륜의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낮의 일만 없었어도 타낙한의 흉계나 이간질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화는 중독되었고 각혈을 했다. 또한 그 사실을 제게 숨겼다. 팽팽 돌아가는 무륜의 머리는 그 이유마저도 어렵잖게 추론해 냈다.
금국을 지탱한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의 전신에서 패도적인 기세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몽휼이 다시 무륜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깨달았다. 상황은 이미 저가 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는 걸.
“폐하?”
무륜의 기세를 느꼈는지 이화가 눈을 떴다. 무륜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천개 너머의 그림자가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야차처럼 돌아선 무륜이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남겨진 몽휼은 눈을 감아버렸다.
천개를 확 걷은 무륜은 눈이 땡그래진 이화의 앞에 비녀를 툭 던졌다. 그를 본 이화의 눈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반응이 곧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모다 거짓이라 생각했던 타낙한의 전언은 전부 사실이었다.
“언제부터냐. 아니, 어디서 중독되었나.”
“……폐하.”
“이 내가 하문하지 않느냐!”
막 일어나 혼몽하던 정신이 찬물을 부은 듯 깨어났다.
다 알았다. 무륜이 다 알아버렸다. 만에 하나 들켰을 순간을 예상했을 때, 분명 지금과 같은 반응이 있었다. 상상할 땐 그저 갈비뼈가 지끈하고 말았었는데, 지금은 장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화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제가 어디서 어떻게 중독되었는지가 무에 중요합니까.”
“네…… 지금 뭐라 했느냐?”
“폐하. 이미 늦었습니다.”
무륜이 흠칫했다. 강건하던 어깨가 풍 맞은 것처럼 떨렸다. 그의 눈에 혼란과 공포가 들어차고,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이화를 보았다. 거기 서린 건 틀림없는 배신감이었다.
“……하지만 폐하는 아직 늦지 않으셨죠. 지금부터라도 저를 멀리하시고 바라건대 부디 잊으십시오.”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이화는 간결하게 사실만을 전했다. 3황자가 만든 남방의 독에 당했고, 해독제는 없으며, 유일한 희망이던 여율령마저 죽어 이제 정말 길이 없노라고.
무륜은 눈앞이 어찔했다. 땅과 하늘이 초마다 바뀌며 머리가 빙빙 돌았다. 혼란의 끝은 분노였다.
“내게 말했어야지! 그랬으면, 그랬다면.”
“황궁의들에게 보인다 한들 딱히 방법은 없었을 겁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여율령의 저택에 있는 의원이 황궁 의원 중 으뜸인 이보다 실력이 뛰어날 것입니다.”
이화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도 고개를 저었습니다. 또 독이라면 의원보다 약학에 해박한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죠. 예를 들면 여율령처럼요.”
무륜의 낯이 일그러졌다. 이화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무륜은 그를 확 뿌리쳤다. 날카로운 눈매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네가 내게 이럴 순 없다.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이래선 안 되는 것이다. 평생 내 곁에 있을 것이라, 그게 네가 바라는 유일한 일이라 하지 않았어.”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니겠습니까.”
“다 집어치워라. 너는 내 사람이다. 내 위사장이야. 이 내 허락 없인 죽을 수도 없는 몸이란 말이다.”
“폐하.”
“해독제? 금국이 다 내 손안에 있는데 그것 하나 구하지 못할까.”
구할 수 없을 겁니다.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화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 침묵에 무륜의 낯이 다시 한번 무너졌다.
이화는 부스러지려 하는 무륜에게 재차 손을 뻗었다. 혼란스럽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으나, 정말 올 줄은 저도 몰랐던 모양이다. 이화가 무륜의 손을 꼭 잡았다.
“폐하는 아무 잘못 없으십니다. 그러니 제 탓을 하십시오. 전부 제가 부족해 벌어진 일입니다. 전부 제가 나빴던 겁니다.”
결국 방법은 없고, 저는 죽을 것입니다. 그 말에 무륜은 결국 무너졌다.
휘청한 그가 침상 위로 쓰러졌다. 놀란 이화가 그를 받았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팔이 이화의 몸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무륜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찬란한 추억도 빛이 바래게 마련이고, 시간 앞에 영원한 건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도 흐려질 것이라는 말이냐.”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당신이 조금이라도 덜 아플 테니까요.
그가 끅끅거리며 울었다. 어깨에 파묻은 뺨에서 눈물이 묻어났다. 그 부분이 타는 듯 뜨거웠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이화는 팔을 늘어뜨렸다. 그를 달랠 수가 없다. 허락 없이 죽을 터라 그를 낙심하게 만든 죄인 주제에 어찌 감히 위로할 수 있을까.
“북궁에는.”
한참 만에 무륜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담벼락 구석마다 작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길고, 가늘고, 끝이 뾰족한 물건으로 새긴 것이지.”
순간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하얀 무명옷을 입은 채 비녀로 갉작갉작 담벼락을 갉아내는 여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절절한 연모의 정을 담은 글귀와 거기 담긴 마음은 긴 세월 풍파에도 잊히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는 제 마음이 결코 흐려질 일 없음을 피력했다.
“그는 허상이 아닙니까.”
“허상?”
무륜이 이화의 양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바로 한 그가 추궁하듯 외쳤다.
“그리 선명한 마음이 어찌 허상이 될 수 있나. 그토록 짙게 남은 진심이 어찌 허상일 수 있어!”
“담벼락이 무너지면 사라질 의미 없는 글귀입니다. 그 글귀의 주인들도 진즉에 백골이 진토되어 세상에 없지요. 폐하께선 그 여인의 이름을 아십니까? 그녀가 사랑한 황제의 이름은 아십니까? 정말 서로 사랑했다면 그 여인이 어찌 북의 냉궁에 버려져 그런 글귀를 남겼겠습니까?”
무륜은 대답하지 못했다.
“보십시오. 허무하고 허망한 허상입니다.”
아니다. 무륜이 옳았다. 지금 제 입에서 나오는 건 다 개소리였다. 그를 밀어내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춘 말들이 부끄러울 만큼 비루했다.
이화는 짐짓 논리적인 척 지껄이는 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에 논리가 어디 있나. 가는 길도 모르고 어찌 변화할지도 모르는 것이 마음이거늘.
그래서 이화는 희망을 품었다. 비록 지금은 아프고 괴롭더라도 시간이 흘러 저를 잊고 행복해질 무륜의 모습을 뇌리에 그렸다. 얼어붙은 침묵의 끝에서, 이화가 무륜에게 고했다.
“폐하, 절 지한국으로 보내주십시오.”
“네가 진정 미쳤구나.”
“어차피 곧 죽을 목숨. 부디 폐하를 위해 쓰게 해주십시오.”
여율령의 죽음에는 담담하지 못했던 이가 제 죽음에는 과할 만치 담담했다. 아니, 담담하다 못해 이용해 먹으려고 들었다. 그것도 무륜을 위해서. 그 사실이 무륜을 미치게 만들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면 더더욱 내 곁에 머물러야지. 다른 이도 아니고 너라면 더더욱 그리해야지!”
무륜이 힘겹게 현실을 마주했다. 이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 여이화의 소원입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불허한다. 네, 죽어도…….”
목이 멘 무륜이 말을 멈췄다. 욕설을 짓씹은 그가 말을 이었다.
“죽어도 놔주지 않을 것이다.”
“……금국은 지한국을 막지 못할 겁니다. 곧 죽어질 목숨으로 그를 막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체 왜!”
무륜은 답답함에 결국 소리쳤다. 대체 왜 이리하느냐고. 무륜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홀 마음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화도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확신이 없다. 지금 그의 눈에 비친 이화는 연인이 아니라 충신이었다.
하나, 그 생각은 이어진 이화의 말에 전부 녹아내렸다.
“얼마 남지 않은, 제 남은 평생을 다하여도 폐하께서 주셨던 그때의 열흘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열흘. 그게 언제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눈물 자국이 남은 그의 뺨으로 새로운 물길이 새겨졌다.
“그럴 리 없다.”
당신을 연모하고 연모하여서. 내 죽음은 견디어도 당신의 죽음은 견딜 수 없어서. 그래서 나는 가야 하노라고. 이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륜은 깨달았다. 무슨 짓을 해도 이화는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란 걸. 그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너의 남은 삶이, 그 찬란하고 짧은 시간이, 고작 내 마음 편하고자 베풀었던 싸구려 동정보다 못할 리 없다.”
“폐하께서 베푼 것은 동정이었으되 제가 받은 것은 온기였습니다.”
“그만두어라! 이딴 입씨름도 다 부질없다. 가지 마라. 가지 마. 내가 살려주마. 어떻게든 살릴 것이다. 금국을 바쳐서라도 살릴 터이니…….”
결국 다 내던진 무륜이 이화를 붙들고 애원했다. 절박한 얼굴에서 쏟아지는 눈물이 한 방울마다 하나의 살이 되어 이화의 심을 찢었다.
“다가올 봄도 같이 보지 못하지 않나.”
무륜은 계약서를 봤다. 그 내용대로라면 이화는 겨울 전에 지한국으로 가야 했다. 이화가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적은 기한이라는 걸 영민한 무륜은 알아차렸다.
“내가 아는 너와의 봄은 네게 나쁜 말을 하고, 밀어내고, 무시하고, 상처를 준 봄밖에 없다.”
“제가 기억하는 폐하와의 봄은 폐하를 다시 만나고, 말을 나누고, 지켜보고, 기뻐했던 봄밖에 없습니다.”
이화가 눈물로 푹 젖은 무륜의 뺨을 살며시 쥐었다.
“북궁에는 다시 신이화가 피겠지요. 그를 따서 말리면 이번 봄은 기침 없이 보낼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네 봄은 어찌할 것이냐.”
내 봄은 너도 없고 기침도 없겠으나 어쨌든 찾아올 것이다. 하면 너는. 다시 오지 못할 네 봄은 어찌할 것이냐.
이화는 그렇게 묻는 무륜을 똑바로 마주했다. 눈물로 인해 일그러진 검은 눈이 가슴을 두들겼다. 잡힌 손의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를 덮은 제 손도 전염된 듯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