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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8화 (68/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8화

안고 싶다.

그 말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바로 후회했다. 무륜의 시선이 내 뺨과 목덜미를 훑었다. 아마 이 못을 둘러싼 수목들처럼 붉게 변하였을 것이다.

“그럼 내기를 하자.”

뭐든 내기로 해결하려는 건 좋지 못한 버릇입니다. 차마 그리 말하지 못했다. 무륜의 눈에 어린 열망을 본 까닭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벌건 대낮에 하늘을 이불 삼아 그와 살을 섞을 팔자였다.

“내가 이기면 지금. 네가 이기면 밤에.”

어쨌든 한다는 소리였다. 날강도 같은 조삼모사였으나 그를 따져 물을 수도 없다.

“위중혁.”

“예. 폐하.”

“가서 판 띄워라.”

심지어 뭔가 준비해 왔다.

무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군들이 비조처럼 호수 위를 오가며 목판을 띄우기 시작했다. 검은 판이 반, 하얀 판이 반이었다. 마치 바둑 같았다.

“색을 하나 택하렴.”

“그럼 흑색으로 하겠습니다.”

바둑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백색을 택할 순 없었다. 무륜이 ‘그럼 내가 백색이다’ 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나는 흑색만, 무륜은 백색만 밟으며 못 가장자리 어딘가에 갑자기 솟는 깃발을 먼저 잡아채면 승리였다.

‘직접 만드셨구나…….’

못해도 일류 무사는 되어야 할 수 있는 놀이였다. 본인의 역량만 생각해 만든 것이 분명했다.

준비가 끝났다. 나는 배의 갑판 위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시작 신호도 없이 어디선가 붉은 깃발이 올라오면 그게 시작이라 했다. 먼저 발견하는 쪽이 단연 유리했다.

그리고, 무륜이 먼저 튀어 나갔다.

‘아차.’

비조처럼 몸을 날려 뒤따랐다. 가진바 힘이나 무력은 내가 무륜보다 반 급수 더 높았다. 경공도 마찬가지였다. 흑판과 백판이 번갈아 가볍게 가라앉았다 올라왔다. 늦게 출발했으나 도착은 거의 동시였다.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내 손마디가 그의 손보다 앞섰을 때, 갑자기 속이 화끈했다.

‘어?’

나도 모르게 손을 움츠렸다. 그사이 무륜의 손이 깃발을 낚아챘다. 그가 활짝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첫판은 내 승리구나.”

세 판 하여 두 판을 먼저 이긴 쪽의 승이었다.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축드립니다.”

“그래. 고맙다.”

금군에게 깃발을 건넨 무륜이 먼저 배로 돌아갔다.

어쩌면 별것 아닌 순간이었다. 판 사이로 반짝이는 호수. 물 내음과 풀 내음. 이제 곧 선선해질 것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목들. 청명한 하늘. 어디에나 있는 햇살. 그 사이로 아무 판이나 밟으며 가볍게 도약하는 무륜의 뒷모습.

늘어져 있던 손이 안으로 말렸다. 화끈거리던 속은 이제 쥐어짜듯 뒤틀렸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나를 향한 금군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태연한 척 웃으며 적당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다음 판에 지면 그 후의 상황을 감당 못 할 것 같아 심이 떨려서요.”

“…….”

금군이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옆에 있던 다른 금군이 지금이라도 청심환을 가져올까요,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들이 소리 없는 응원을 보냈다.

무륜을 뒤따라 배로 향했다. 판을 밟으며 생각했다. 마지막 각혈은 이틀 전이었다. 분명 아직 이틀이 더 남아 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내기에 질 수도 없다. 환장하겠다.

긴장과 함께 맞이한 두 번째 시합은 내 승리였다. 가슴의 답답함이 커지고 불길함도 덩달아 몸집을 불렸다.

마지막 세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기감을 가능한 넓게 퍼뜨려 금군들의 움직임을 한발 앞서 읽었다.

남서. 깃발이 위로 들리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붉은 기를 손에 든 금군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놀라며 손을 위로 들었다. 무륜이 황급히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대로 달리면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이겼다.

승리를 확신한 순간, 속에서 강한 통증과 함께 무언가가 치달아 올랐다.

“아.”

발밑이 무너졌다. 왈칵 피를 토하며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처박혀 가라앉았다.

무륜의 말이 옳았다. 호수는 저 큰 배를 무리 없이 띄운 만큼 바다처럼 깊은 수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을 본 채 가만히 가라앉았다. 내력을 무겁게 하자 몸은 떠오르지 않고 일정한 깊이에 머물렀다. 빛으로 일렁거리는 수면이 예뻤다.

통증은 이미 가셨다. 피도 그 한 번으로 다 토했다. 그러나 바로 올라갈 수 없었다. 적어도 핏물이 다 빠지고 흐려질 때까진 예 있어야 했다.

그런데 첨벙 소리와 함께 물보라를 일으키며 누군가 아래로 내려왔다. 무륜이었다. 나를 발견한 그가 물을 가르며 쏘아져 내려오더니 내 허리를 낚아채 위로 향했다.

“괜찮으냐?!”

무륜이 기함을 하며 물었다. 누가 보면 내가 칼에라도 맞은 줄 알 것이다.

“폐하, 저 수영할 줄 압니다. 진 것에 낙담하여 그냥 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하냐.”

길게 안도한 무륜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네 혹, 물에 빠지기 직전에 각혈을 하지 않았느냐.”

봤구나. 철렁했으나 시치미를 뚝 뗐다.

“그 무슨 황망한 말씀이십니까. 저는 발을 헛디딘 것뿐입니다.”

“그래. 하면 내 잘못 보았나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 젖어서 춥겠다. 이만 올라가 옷을 갈아입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륜이 이기면 지금 안긴다. 낙심하려는 찰나, 텅 빈 무륜의 손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깃발을 든 금군이 있는 곳을 보았다. 그는 눈앞의 난장판에도 굳건히 깃발을 들고 있었다. 무륜도 그를 봤다. 나와 무륜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그 밤. 나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무륜의 침소에 들었다.

* * *

무륜은 잠든 이화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긴 속눈썹도 건드려 보고 예쁘게 부풀어 오른 붉은 유실도 꾹 눌러봤다. 그래도 깰 기미가 없다. 장히도 괴롭혀 댄 탓일까. 이제 어지간한 자극에는 눈을 뜨지 않게 됐다.

‘정말로 잘못 본 것인가.’

무륜은 낮의 일을 회상했다. 붉은 깃발을 향해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몇 발 앞을 내달리는 이화의 등을 보고 있던 찰나였다. 그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무륜은 그런 이화를 훅 지나쳐 갔다

‘붉은 깃발에 온 정신이 팔려 그리 본 걸지도 모르지.’

고꾸라지는 이화의 앞섶이 온통 붉었다. 붉은 것처럼 보였다.

“폐하.”

몽휼이었다. 무륜이 이화와 함께 있는 줄 알면서도 찾는다는 건 꽤나 급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무륜은 홑겹 장포만을 걸치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이미 내려져 있던 천개를 다시 꼼꼼히 닫고는 직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냐.”

“타낙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북궁에 있을 적의 방식으로 제게 접선하였습니다.”

비공식적인 연락이라는 뜻이었다. 무륜이 손을 내저었다. 위사들이 읍하여 물러나고 금군이 일제히 거리를 벌렸다. 무륜의 눈이 위를 향했다. 천장에 있던 그림자도 사라졌다.

“그가 이런 걸 보내왔습니다.”

몽휼이 품에서 꺼낸 건 작은 목각함이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륜의 시선이 물고기 모양 자물쇠에 닿았다. 잉어를 닮은 물고기. 여씨 가문의 상징이었다. 상서령 여율령이 타고 다니던 가마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무륜은 이미 부서져 열린 자물쇠를 치우고 목각함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천에 쌓인 비녀와 접힌 문부 한 장, 그리고 겹겹이 깔린 무명의 천이었다. 천에는 검붉은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어떻게 봐도 피였다. 무륜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뭘까요.”

몽휼은 혼란스러워했다. 그와 같이 무지한 무륜이었으나 그는 어떤 예감을 느꼈다. 그것도 아주 불길하고 불온했다.

무륜은 가장 먼저 문부를 펼쳤다. 그건 말도 안 되고, 믿고 싶지도 않은 내용을 담은 계약서였다. 무륜은 두 번 생각 않고 그를 찢어버렸다. 아주 갈기갈기 조각냈다.

“이따위 거짓 문부로 나와 이화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다니. 왕빗감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며 이화에게 더러운 수작질을 부릴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러나 얼핏 본 필체는 분명 이화의 것이 맞았다. 분노가 심장을 휘감았다. 무륜은 전신으로 열기가 뻗치는 걸 느꼈다.

몽휼은 문부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으나 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물을 수 없었다. 사람 두엇은 죽일 분위기로 무륜은 비녀를 확인했다. 이화가 가지고 있던 것이 맞았다.

“이건 독이군요.”

몽휼이 비녀의 끝을 살피며 말했다. 무륜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독이라고?”

“예. 재질이 특이한 걸로 보아 은으로 판별되지 않는 독을 걸러내는 용도 같습니다. 이런 백색의 비녀는 처음 봅니다만 끝이 오염된 형태는 틀림없이 독에 오염된 것입니다.”

무륜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신속하게 답을 내리는 자신의 영민한 머리를 후려쳤다. 몽휼이 기겁했고, 멀찍이 떨어졌던 위사들이 곧바로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폐하, 통촉하여-”

“그 입들 닥쳐라.”

무겁다 못해 저 깊은 동굴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목각함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그냥 들어 있어도 될 비녀가 왜 천에 싸여 있었는지 알게 됐다.

타각.

손에서 떨어진 목각함이 바닥을 뒹굴었다. 무륜의 손에는 비녀와 무수한 무명천 중 하나만이 남았다. 무륜은 피가 검붉게 말라붙은 천으로 비녀를 감쌌다. 순백색의 비녀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무륜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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