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7화
위중혁이 언성을 높였다.
“뭐 좋다고 웃느냐.”
“그럼 울까요.”
“그래. 차라리 울어라.”
그가 짓씹듯 말했다.
“차라리 울어.”
“글쎄요. 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이 죽은 것도 아닌데요.”
내 손목을 쥐었던 위중혁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제 죽음은 슬프지 않습니다. 제 죽음 뒤에 남겨질 사람들이 외려 슬프게 느껴집니다.”
“어찌 그러냐. 네 어찌 그러해.”
“당하께서 하실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 당하를 압니다. 잘 안다곤 못하지만,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서 겪어봤죠. 아마 상황이 반대였다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도 반대가 되었을 겁니다. 아니라고 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마 못 할 것이다. 내가 아는 위중혁도 나와 같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주한다면 아마 담담히 주변 정리를 하고, 남겨질 사람들을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런 위중혁이라, 나는 그에게 남길 말이 있었다.
“당하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안 들어줄 거다.”
“폐하를…… 무륜을 부탁드립니다.”
위중혁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를 왜 내게 부탁하느냐!”
나는 웃었다. 이 우직한 사내가 지엄한 황상을 감히 이름으로 부른 것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몽휼에게도 같은 것을 부탁할 겁니다.”
“되었다. 그냥 두어라. 그따위 소금쟁이는 도움도 안 된다.”
“그럼 들어주실 거죠?”
“……영악하고 미련한 것.”
한데 쓰일 수 없는 말이 붙어 내가 됐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 * *
특별할 것 없는 날이 흘렀다.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 들려왔다. 자련 궁의 시비 중에 갑자기 황상에게 끌려가 성총 받은 자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때 황상이 어찌나 거칠고 박력 있으시던지. 그 시비는 필시 임신했을 것이다. 음담패설에 가까운 말들이 궁인들의 입을 타고 돌아다녔다.
심지어 혼곤하게 늘어진 시비를 장포에 꽁꽁 싸매어 직접 욕탕까지 옮겼다는 말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위사와 금군의 눈을 흑천으로 가리게 했다고.
궁인들은 그 대목을 전할 때마다 높고 가는 비명을 토했다.
“세상에, 세상에!”
“빛이 나는 옥면으로 충분하신 분이 어쩜 그런 면모까지 가지셨을까.”
“아이고, 부러워라. 부러워서 배가 다 아프다.”
“나도. 그 시비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장수였을 것이야.”
전생은 모르겠고 현생에 황제를 구하긴 했다. 속닥이는 어린 시비들이 자지러질까 부러 기척 없이 옆을 지나며 생각했다.
‘저게 대체 무슨 헛소문이람.’
아무리 와전되는 것이 소문의 성질이라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물론 거칠고 박력 있던 것은 맞다. 그대로 끌려가 통정한 것도 맞다. 하지만 위사와 금군의 눈을 모두 가리게 했다니. 무륜의 안전과 직결되는 일이다. 그는 있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다 알겠구나.’
몽휼이야 진즉부터 알았고, 최근엔 위중혁도 어느 정도 아는 눈치였다. 이젠 그 범위가 위사와 금군과 밀영군을 넘어 내관까지 늘어났다. 머지않아 신료들의 귀에도 그날 성총 받은 것은 시비가 아니라 위사장이라는 말이 들어갈 것 같았다.
‘많이 시달리려나.’
나보단 무륜이 걱정이었다. 분명 사람의 키보다 높은 상소가 쌓일 게 분명했다. 그럼 무륜은…….
“……보지도 않고 불태울 것 같은데.”
속내가 입으로 나왔다. 픽 하고 웃었다. 집무실 마당에서 상소를 불태우며 ‘자알 탄다’ 하고 흡족해하는 무륜을 상상한 까닭이었다.
“하하.”
처소로 돌아와 침상에 멍하니 누워 있다 혼자 웃었다. 누가 보면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황궁은 평화로웠고 별다른 일도 없었다. 지루할 만큼 단조로운, 그래서 더욱 아까운 날들이었다.
사소한 사건들은 있었다. 가끔 연무장에 검끝으로 물구나무서서 얼차려 받는 금군들이 보인다든지, 무륜이 치대는 수위가 높아진 탓에 얼빠진 밀영군이 가끔 서까래서 떨어진다든지, 그렇게 떨어진 밀영군이 어울리지 않는 울먹한 눈을 하고 동료들 손에 끌려 나간다든지.
이해는 했다. 어찌나 치근거리는지 나도 가끔 밀어내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설마 무륜을 상대로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북궁에 있을 적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여 봐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도 손이 쑥 들어왔다.
“이런 미친…… 아, 말이 헛나왔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정무를 보셔야 합니다.”
“잠깐 쉰다고 정무가 어디 가느냐.”
정무도 그대로고, 주변 사람도 그대로라 문제다.
만져선 안 될 곳까지 뻗친 손에 하얗게 질려 광실을 보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위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금군이 기둥처럼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이들이라면, 위사들은 항시 황제에게 신경을 두어야 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금군 흉내를 내고 있었다.
“자, 잠깐 무릎에 앉혀만 놓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그랬었나?”
지엄하신 분이 또 한 입으로 두말을 했다. 이 나라의 누구보다 무거운 자리에 앉으셨으면서 말의 경중은 경경경(輕輕輕)이었다.
“그랬습니다.”
“기억이 잘 안 나는군. 탕약이라도 지어 올리라 해야겠어.”
그러면서 여전히 나를 조몰락거렸다. 이 인간이 진짜.
“폐하.”
“음?”
“송구합니다.”
스륵. 연기처럼 스러지듯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성공률 5할 미만인, 암묵단으로부터 배워뒀던 은신술의 일종이었다.
“허.”
무륜이 웃었다. 마치 뱀 같은, 여율령을 떠올리게 하는 미소였다.
“우리 이화는 재주도 많지.”
‘우리 이화’라는 말에 위사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서까래에서 미끄러진 밀영군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첫눈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싶어졌다.
* * *
주인 없는 자련 궁이 들썩였다. 아침나절부터 무수한 궁인이 오가며 뱃놀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처마 곳곳에 꽃 모양 종이와 등이 내걸리고, 뱃놀이 중간에 쉴 장소와 약식의 연회장이 준비됐다. 춤을 선보일 무희들까지 있다는 말에 나는 기함하여 물었다.
“……약식으로 우리끼리 놀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무륜이 뒷짐을 지고 빙긋이 웃었다.
“예부 놈들이 눈치를 깠어.”
저렴한 단어 선택에서 진심 어린 분노가 묻어났다. 눈매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오늘은 배를 준비했지만 다음엔 관을 준비해야 할지 모를 예부였다.
작은 쪽배와 정자에서의 식사 정도를 예상했던지라 그만 웃고 말았다. 무엇보다 무륜과 단둘이 있을 오붓한 시간이 날아갔다. 조금 낙심한 것도 사실이다. 나도 이런데 무륜은 오죽할까. 힐긋 본 그의 표정은 이미 관짝의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폐하와 단둘이었으면 더 좋았겠으나, 이렇게 떠들썩한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예부의 누가 죽든 상관없다. 그러나 그걸로 무륜의 격이 상하는 건 싫었다. 가만히 옷자락을 쥐자 무륜이 손을 잡아왔다.
“내 설마 너를 무엄하다 책할까. 다음부턴 그냥 손을 잡도록 해라.”
단단히 깍지 낀 손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나는 백치처럼 웃었다.
큰 배가 작은 호수 위에 놓였다. 나와 무륜, 그리고 소수의 위사와 다수의 금군이 배에 올랐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에 분명 밀영군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시중을 들어줄 두엇의 내관과 시비도 있었다.
무륜이 술을 찾았다. 술잔을 채워주자 연거푸 잔을 비웠다. 그러면서 나를 보는 눈이 숫제 타는 듯했다. 그의 내심이 훤히 보였다. 본래는 단둘이 작은 쪽배를 타며 이런 짓 저런 짓 하려 했을 텐데, 그게 틀어져 저리 뿔이 난 것이다.
물론 무륜은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꺼리니 보는 눈이 많을 때는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었다.
웃긴 점은 그 보는 눈의 숫자에 따라 수위가 바뀐다는 점이다. 열일 때는 상반신을 지분거리고 다섯 미만이면 아랫도리로 손이 쑥 들어왔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는데…….
술병을 손에 든 채 눈만 굴려 주변을 훑었다. 당장 보이는 인원만 족히 열이 넘었다.
“너도 한잔하겠느냐?”
“전 괜찮습니다.”
우울해하는 무륜이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이런 무엄한 생각 자꾸 하면 안 되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다.
안주로 준비된 전을 집어 내밀었다. 눈을 크게 뜬 무륜이 어미를 본 새끼 새처럼 얼른 입을 벌렸다. 이런 무엄한 비유도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이리 나오니 좋습니다.”
“그래, 나도 좋다.”
있을 리 없는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귀는 바짝 섰고 꼬리는 형체가 안 보이게 휙휙 움직였다.
“폐하와 함께 있어 더욱 좋은 듯합니다.”
“안 하던 말을 다 하고. 내게 뭔가 바라는 것이라도 있느냐?”
“그런 건 없습니다.”
“나는 있다.”
말하는 모양새가 아주 당당했다.
“지금 너를 안고 싶구나.”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시는 게 진정 만인지상이셨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찬반을 준비한 함을 열어 다른 음식을 꺼내던 시비의 손끝이 떨렸다. 내관은 다 안다는 듯 인자한 얼굴을 했다. ……시비보다 저게 더 싫었다.
나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무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지금은 얌전히 뱃놀이만 하자는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까. 끙끙거리는 나를 어찌 해석했는지 무륜이 걱정 말고 말해보라 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내 여율령의 밑에 있던 5년을 고스란히 담아 천자님도 홀딱 넘어갈 말재주를 선보이리라.
“폐하, 그, 음…… 그것은 밤이 된 후에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해가 중천이고 보는 눈도 많습니다.”
열이 오른 머리로는 이게 최선이었다. 속으로 한탄했다. 지금이 한낮이고 주변에 포진한 사람이 아니 보여 저런 말을 꺼내셨을까. 다 알고서도 지금 나를 안고 싶다 하신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