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6화 (66/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6화

3년. 자신이 무륜에게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대응할 준비를 마치리라 생각한 시간이기도 했다. 타낙한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올곧은 이화를 마주한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잔인하구나.”

“소중한 게 있는 것들은 모두 잔인합니다.”

“네게 그 소중한 것은 황제겠지?”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타낙한의 눈이 잔혹하게 빛났다.

“3년 뒤 나는 반드시 네 황제를 죽일 것이다.”

“어쨌든 거래는 하겠다는 뜻이군요.”

이화는 흔들리지 않았다. 타낙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이화의 거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도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끊임없이, 쉼 없이, 그를 괴롭혔다.

타낙한은 강한 힘을 물려받았다. 시간이 지나며 흐려지기만 하던 왕가의 피는 그의 대에서 갑자기 타올랐다. 동시에 저주와 같은 각인 또한 강해졌다.

대가 없는 힘은 없다고. 타낙한은 줄곧 뇌리를 갉아먹는 강박과 두통에 시달려 왔다. 그를 잠시나마 해소해 줄 사람이 제게 손을 내미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심지어 포상을 미리 맛보여주듯 이화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줄곧 그를 괴롭혀 온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머리가 이토록 맑고 편안할 수 있다니. 타낙한은 탄식했다. 평생 입에 대롱을 꽂고 있던 사람이 처음 제 입으로 숨을 쉬면 이런 기분일까. 타낙한은 ‘두통이 없는 상태’에 만족하다 못해 전율을 느꼈다.

“계약서를 쓰지.”

이화는 동의했다.

계약서는 총 세 장이었다. 하나는 타낙한에게, 다른 하나는 이화에게, 마지막 하나는 공증을 위한 것으로 보관은 타낙한의 수하가 하기로 했다.

이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쨌든 서로의 날인이 들어간 것이 두 장 있으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타낙한의 반응을 봐선 계약을 파기할 가능성도 적었고.

“상선의 이름에 대고 맹세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한 둘은 마주 보고 맹세를 했다.

이화는 이번 해가 끝나기 전까지 지한국의 타낙한 곁으로 갈 것이며, 이를 지키지 못할 시 타낙한은 곧바로 금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타낙한은 이화가 조건을 이행하면 그의 생사 여부에 관계없이 향후 3년간 금국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증표로 네가 가진 비녀 중 하나를 다오.”

계약서를 챙기던 이화가 멈칫했다.

매수한 시비가 타낙한에게 말해준 것이었다. 이화의 품에는 두 개의 비녀가 있다고. 그중 하나는 아마 동곳으로, 야시장에서 산 것이리라. 기척을 느끼지 못할 아주 먼 거리에서 둘을 뒤따른 수하의 입을 통해 들었기에 타낙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생김만 전해 들었으나, 그 생김만으로 타낙한은 비녀에 얽힌 사연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타낙한이 능글맞게 웃었다. 이화는 모르겠지만, 타낙한은 지금 이화의 운명을 저울에 올려둔 참이었다. 결과는 그가 건네는 게 동곳이냐, 비녀냐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계약에 기밀 유지에 대한 조항은 없었지, 아마?”

“……지독하시군요.”

“욕망을 품은 것들은 모두 지독한 법이지.”

이화는 타낙한의 진지한 눈에서 그가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반드시 둘 중 하나를 받을 셈이었다.

“참고로 난 동곳이 가지고 싶다. 목련이 새겨져 있다지? 네 이름자가 들어간 물건을 산 연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음이라. 그 주인이 누군지도 이미 안다.”

“아시면서 달라 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몰랐으면 달라고도 안 해. 나는 내 연모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잘 살라며 손 흔들어줄 성정은 못 된다. 오히려 조용히 뒤에서 수작질해 상대는 죽이고 임은 보듬어 안겠지.”

소름 끼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타낙한을 이화는 가만히 응시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현실에선 뭘 하기도 전에 다 들통이 났으니. 다른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을 들은 이화는 고민도 않고 비녀를 건넸다. 그걸로 볼일은 끝났다는 듯 이화는 그대로 창을 넘어 비조처럼 떠나갔다.

비녀를 쥔 타낙한이 모호하게 웃었다. 쇳소리와 함께 저울이 기울었다.

* * *

9월의 둘째 주. 사절단들이 각국으로 돌아갔다.

황궁의 모두가 내적 환호성을 내질렀다. 제일의 소양은 비상한 눈치. 그다음으로 무언가를 정리하고 치우는 데 특화된 궁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잘 훈련된 무사들을 압도하는 패기가 뒷정리를 하는 그들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후는 일상이었다. 무륜은 여전히 바빴다. 특히 타낙한이 남긴 말이 있는 이상 아무리 애써도 시간이 모자랐다.

나는 몰랐지만 타낙한이 아직 사절로 머물 때, 금국은 몇 번이나 전쟁에 관해 독대를 청했다고 했다. 타낙한은 전부 거절했다. 만나러 가도 딴소리만 할 뿐, 전쟁에 대한 건 아예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전해 듣기로 그는 딱 한 마디만 했다고 한다.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즉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자신이 돌아간다면, 그리고 운이 따른다면, 전쟁은 3년 뒤로 미뤄질 것이라고.

물론 처음부터 사절로 온 타낙한을 어떻게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 자에게 손대는 건 역사에 길이 남을 수치였다.

무엇보다 분노한 지한국과 공적이라는 명분을 얻은 남방 5국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할지 모를 악수 중의 악수였다.

제국의 현 상태는 몸집만 비대한 노인이었다. 덩치는 크고 축적한 힘도 있으나 노화로 곳곳이 삭아 있는 그런 노구. 반면 지한국은 덩치는 작아도 제대로 된 검을 쥔 채 제국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율령이 생전에 점친 승률은 4할 미만이었다. 그건 시간이 길어질수록 올라갔다. 준비할 시간만 충분하다면 제국은 결코 지한국에 지지 않을 터. 그러한 판단에, 나는 이런 선택을 했다. 어차피 스러질 목숨. 무륜을 위해 쓴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쓰게 웃었다. 자신의 쓸모를 헤아려 움직이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는데,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결국 이리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무륜이 시립한 내 소맷자락을 슬쩍 쥐었다. 다른 손으론 여전히 문부를 들고 있었다.

“폐하의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쓸 생각을 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리라. 이젠 망설이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나도 네 생각을 했다.”

무륜이 문부를 탁 내려놓았다.

“궁인들이 조잘거리길 궁에 첫 단풍이 들었다는데. 너와 뱃놀이를 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이화야, 나랑 뱃놀이 가지 않으련?”

“일이 바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가까운 곳으로 가야지.”

자연스럽게 자련 궁이 떠올랐다. 먼 곳까지 저를 두고 나가는 황후에 안절부절못하던 소심한 황제가 지어 바친 궁.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주무시는 건 어떠십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나와 노는 것이 싫으냐?”

나는 기함하여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매분 매초 폐하와 함께 놀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다. 자는 시간이 부족하면 조금 피로할 뿐이지만, 너와 노는 시간이 부족하면 마음이 시무룩하단다.”

귀여워서 욕이 나오려고 했다.

이름 모를 옛 황후가 제 남편을 볼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분명 지엄하고 지고한 분인데. 말 한마디로 성 하나둘쯤 어찌할 수 있는 분인데. 추상같은 옥음으로 좌중을 호령하는 분이신데.

“이화야?”

봄날 햇볕 아래 노니는 강아지보다 귀여웠다.

“날은 언제로 잡으라 할까요.”

무륜이 씩 웃었다.

“잡지 마라. 예부에는 비밀로 하련다.”

이분이 진짜 막 나가시는구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지만, 줄곧 두 사람과 한자리에 있었던 몽휼이었다. 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 * *

각혈의 주기가 이틀 빨라졌다. 나는 이제 나흘에 한 번씩 피를 토했다. 입가에 댔던 천을 잘 싸매어 구석진 곳에 두었다. 돌아와서 처분할 셈이었다. 오늘 피를 토했으니 앞으로 사흘은 걱정 없었다.

“고통은 없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흠칫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문가에 선 위중혁이 보였다.

“예, 없습니다. 나중에 내장이 삭으면 느껴질 수 있다고 하던데, 저는 아직입니다. 그보다 어찌 이리 기척을 죽이고 오셨습니까.”

순간 위중혁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내 분명 연통을 넣으라 했는데 감감무소식이더군.”

“일이 바빠 그랬습니다.”

“나라의 녹을 받는 이들 중 요 근래 안 바쁜 이가 있다더냐?”

“이제부턴 조금 한가해질 터이니 곧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위중혁이 ‘그래, 그건 일단 넘어가지’라며 말을 이었다.

“기척은 어떻게 된 거지?”

“예?”

“나는 딱히 기척을 감추고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건가.”

그 말뜻을 이해하고 낯을 굳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위중혁이 그를 입 밖으로 내었다.

“독 때문이군.”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벌써 석 달이 넘게 지났으니까요.”

“무슨 뜻이지? 석 달에 의미가 있나?”

“이 독에 당하고 가장 오래 버텼던 자가 석 달을 버틴 자였습니다. 일류 무사였죠. 아마 내력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고 상서령도 저도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위중혁이 경악으로 눈을 홉떴다. 나는 쓰게 웃었다.

“제 몸으로 겪어보니 사실인 것 같군요. 저는 특급이니까요.”

“이…… 이…… 미련한 것!”

저번에 들은 것과 같은 말이 보다 격양된 어조로 날아왔다. 노호를 지른 위중혁이 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쥐었다. 그는 온몸으로 답답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다는 듯, 막상 다가온 후엔 침묵했다.

“미련해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믿어 이리하는 거니까요.”

담담하게 말했다. 위중혁은 숫제 얼이 빠졌다. 누가 보면 중독된 것은 위중혁인 줄 알겠구나. 그리 생각하니 우스워 푸슬푸슬 웃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