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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5화 (65/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5화

여율령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황궁 서고의 사(蛇)열. 세 번째 줄. 여섯 번째에 꽂힌 서책을 펼쳐 봐라.’

그를 원망하게 될지 모른다는 경고를 들었음에도 막상 서가 앞에 서자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책을 뽑았다. 제목은 없었다. 내용도 없다. 파라락 펼친 종이의 대부분이 공백이었다. 그러다 중간쯤, 석 장 정도가 글로 채워져 있었다. 틀림없는 여율령의 자필이었다.

적힌 내용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타낙한에 대한 것. 다른 하나는 해독제에 대한 것이었다.

서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내가 뽑아내고 남은 빈틈을 보았다. 이 서책은 아마 정기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나의 성장에 따라, 그리고 그 무렵 마주한 상황에 따라 서책도 달라졌겠지.

아버지,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흐린 안개처럼 웃으며 내용을 자세히 확인했다.

지한국의 실권은 이미 타낙한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이유나 동기는 불명이나, 정복 전쟁의 의지만은 대단하여 여태 물밑에서 군자금을 확보하고 차츰차츰 군세를 넓혔다고.

여율령은 바른 글씨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응책들을 기술해 두었다. 그러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를 여율령이라고 몰랐을까. 그는 말미에 ‘상책 중의 상책은 전쟁 자체를 막는 것’이라 굵은 글씨로 적어두었다.

이어 해독제에 대한 정보는 주로 그 재료에 대한 것이었다. 다만 조합법은 여율령으로서도 아직 미지이자 미완의 영역이라, 기술된 바가 거의 없었다.

둘을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여율령이 내가 저를 원망할 것이라 했던 이유 역시 자연히 알게 됐다. 그래도, 역시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8장 갈림길 완결>



휘영청 달이 뜬 밤. 타낙한은 숙소에서 느긋하게 서책을 읽고 있었다. 금국의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민담집이었다. 옆에는 가볍게 들 수 있는 약주와 안주상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가끔 술을 홀짝이며 평이한 신색으로 글을 읽어 내렸다.

그런 타낙한의 옆으로 미구르가 다가왔다. 서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타낙한의 귓가에 그가 말을 속삭였다. 일자로 다물렸던 타낙한의 입매가 휘익 말려 올라갔다.

탁.

보던 서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그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격자창이 열리고 밤손님이 들었다. 흑의 무복에 복면을 쓴 사내였다.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지.”

9장 이화의 봄

이화는 코 위로 올려 쓴 복면을 턱까지 잡아 내렸다.

“많은 일이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조용히 기다려 줬지 않나. 상서령의 일은 안되었다. 늦었지만 조의를 표하마.”

이화는 심이 들끓었다. 아직은 추측일 뿐이나 여율령의 죽음. 그 연쇄의 시작점에는 눈앞의 사내가 있었다.

타낙한은 애정과 열망이 담긴 눈으로 이화를 봤다. 거꾸로 흐르는 폭포나, 얼음에 뿌리를 내린 꽃이라도 보는 이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마주한 눈.

그것이 형체도 없는 고대의 힘에 의해 마음을 조종당한 까닭임을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이화는 냉정했다. 동정심을 갖기엔 그가 한 짓들이 제게 너무 파멸적이었다.

다정하게 웃은 타낙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무륜이 지한국에 망명하려 했던 것을 알고 있나?”

“그럴 리 없습니다.”

타낙한이 드디어 하나 걸렸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모르는군. 북궁에 있을 적 내게 연락이 왔었다.”

“아, 그때라면 그럴 수 있겠군요.”

하나 타낙한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오히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타낙한은 어이가 없었다.

“전 또 황제가 되신 후의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망설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미친 건가. 미친 사람이랑 대화하는 취미는 없는데 이를 어쩌나.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내가 미운털이 박힐 짓을 했던가?”

“그건 본인이 더 잘 아시겠죠.”

타낙한은 ‘이것 봐라?’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화의 눈을 들여다봤다. 심지가 굳었다. 그냥 떠본 말이 아니었다. 뭔가 알거나,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달리기 시합에 대해 알게 된 직후, 타낙한은 지한국의 실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전자는 내부 세력으로 위장한 무사들을 보내 세 황자들을 처치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날씨를 조종해 그를 돕는 일이었다.

계절도 지역도 잊은 채 쏟아지던 기이한 국지성 폭우. 그건 타낙한의 짓이었다. 덕분에 타낙한은 그 후 일주일을 앓아누워야 했다. 그렇게 먼 곳에, 그렇게 오랫동안 비를 내린 건 타낙한으로서도 처음 시도하는 일이었다.

타낙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화가 어디까지 아는지가 신경 쓰였다.

“저번에 했던 이야기를 이어 하죠.”

하지만 이화는 그에 대해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조건을 바꾸고 싶습니다. 제가 전하께 가면, 제 숨이 다한 후에도 금국을 넘보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그건 곤란해. 나는 내 살아생전 대륙 일통의 꿈을 이루고 싶거든. 게다가 그 조건이라면 너는 지한국 땅을 밟자마자 자살한다는 선택지가 늘어나.”

“자살은 않겠다고 맹세하면요.”

“그래도 마찬가지지.”

이번엔 타낙한이 이화의 위에 섰다.

“너, 어차피 오래 못 살잖아?”

“…….”

타낙한이 그 사실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화를 처음 만난 순간에도 당연히 몰랐다. 알게 된 것도 우연에 가까웠다.

그는 이화의 주변을 캐면서 사람도 붙였다. 하나, 주변에 워낙 쟁쟁한 이가 넘쳐나는지라 멀찍이서 보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여율령의 납치 장면도 그렇게 목도했다.

다 사라지고 난 자리에 수하가 가보니 섭선과 목함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물고기 모양 자물쇠가 달린 목각함은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섭선은 이리저리 살펴보다 그대로 두었다. 어딜 봐도 평범한 섭선이었다. 알아낼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미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것이 가져가 봤자 뒤탈 나기 십상인 물건이었다.

타낙한의 손에 들어간 목각함은 피 묻은 천을 뱉어냈다. 왜 이런 걸 가지고 있었지? 고개를 갸웃하는 타낙한의 옆에서 미구르가 말했다.

‘색을 보니 독에 의한 토혈이고, 피가 묻은 모양새도 입에서 뱉은 피를 닦은 것이군요.’

‘그걸 어찌 아느냐.’

‘각혈을 닦아낸 천을 자주 보면 절로 알게 되옵니다.’

미구르는 지한국 명문가의 적자였다. 그 가문은 대대로 지한국 왕가의 지밀 호위를 맡아왔는데, 뒤에선 왕의 암살자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타낙한은 그의 무기가 독 발린 암기임을 상기했다. 워낙 제 옆에 붙어산 세월이 길어 잊고 있었다.

그는 이어서 의견을 냈다.

‘그 시합의 중간에 무사들은 3황자의 무리로부터 독이 묻은 화살을 한 통 입수했습니다. 부러 저급한 이들만 골라 사지로 밀어 넣었는데, 낄낄거리며 화살을 챙기더군요.’

‘흠…….’

‘그 화살이 어디 쓰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위사장 여이화가 시합 때 화살을 여러 발 맞아 사경을 헤맸다는 사실은 조사로 알아냈습니다.’

당시 관리 감독 겸 통솔을 목적으로 복면을 쓰고 따라간 미구르였다. 그러나 여전히 확신은 하지 못했다.

‘저는 그때 2황자를 상대하는 중이라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 상서령이 있다는 것만 보고로 전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암묵단 놈들 때문에 전부 몰살당한지라.’

‘아니, 충분해. 방금 걸로 확실해졌다.’

몰살.

암묵단은 철저히 필요에 의한 살인을 하는 놈들이었다. 그들의 검에는 일말의 사심도 살기도 없었다. 그게 암묵단의 진짜 무서운 점이었다.

한데 그런 시체 같은 놈들이 사로잡아 정보를 캐야 할 적을 몰살했다? 그게 곧 대답이었다. 암묵단이 그토록 분노한 이유를 타낙한은 알 것 같았다.

“얼마나 남았지?”

그리고 절망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거래할 패는 알려줄 수 없다는 건가?”

타낙한이 쓰게 웃었다. 일그러진 눈매에 뼈아픈 진심이 깃들었다. 그를 본 이화가 움칠했다.

“인과응보. 그딴 말은 여태 없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웃음소리는 공허했다. 지독히 고통에 찬 표정이었다. 이화는 당황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설마 그 자리에 나의 이상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역시 당신이셨군요.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지한국의 실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충분히 할 법한 일을 했지.”

“남의 나라 후계 쟁탈전에 깽판 치는 일이 말입니까?”

“깽판이라니. 견제라고 해주게.”

픽 웃은 타낙한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믿어주지 않겠지만 나는 지금 내장이 끊길 것처럼 그때 일을 후회하고 있어.”

사월린의 각인은…… 아니, 사월린의 저주는 대단했다. 4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도 이리 선명하게 사람을 휘두를 줄이야.

이화는 저 각인이 가장 또렷했을 사람을 떠올렸다. 금윤주를 끔찍이 사랑했던 위문현. 너무 사랑해서 나라를 세우고 전쟁까지 일으켰던 위문현.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을 그만두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 결혼해 후세를 남겼다.

어쩐지 소름이 돋아 이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덧씌워진 감정의 근원이 지독한 비극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아뇨. 믿습니다.”

“믿는다고? 정말?”

“그러니 이렇게 거래를 위해 왔겠죠. 전 당신을 믿지 않지만, 저를 향한 당신의 진심은 믿습니다.”

“그렇군. 그래.”

이화는 최후의 선을 그었다.

“지한국으로, 전하의 곁으로 가겠습니다. 대신 제가 죽은 후에도 3년간은 금국을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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