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4화
“또 여기서부터 욕탕까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도록 하라. 궁인은 물론이요, 위사와 금군과 밀영군도 모두 포함이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를 모시는 자로서 폐하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이곳은 궁의 가장 깊은 곳이고 가장 경계가 삼엄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어찌 일어날까.”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혹 지고한 폐하의 옥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태감은 그대로 고꾸라져 죽을 것입니다.”
무륜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가는 길에 자리한 모든 이의 눈을 가려라. 그들은 못해도 일류의 무사들이니, 그 정도만 되어도 네가 말한 ‘만에 하나’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의 양보였다. 태감은 결국 더 말하지 못하고 읍하며 물러났다.
준비가 끝나는 동안 무륜은 깨끗한 장포를 하나 가져오고 구석에 놓인 시비의 옷을 처분하라 일렀다. 천개는 여전히 드리워져 있었으나, 눈치 빠른 본궁의 궁인들은 감히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신속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던 그들이 무륜을 찾은 건 이화가 벗어놓은 시비의 의복을 갈무리했을 때였다. 시비의 옷 안에 무언가 들었다 했다. 그러면서 꺼내 바친 건 동곳과 비녀였다.
동곳은 눈에 익었다. 살 때 이미 저를 주려 산 것임을 알았던 그 물건이었다. 언제 주려나 했는데 이화도 건넬 순간을 재고 있었음이다. 무륜은 계속 모른 척하기로 했다.
문제는 비녀였다. 새것은 아니었다. 상아처럼 하얀 재질이며 세공이 꽤 고급품이었다. 특이한 점은 끝부분이 검게 물들어 있다는 거였다. 부러 물들인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챙겼다. 그리고 위사장의 의복을 욕탕으로 가져오라 이르며 내관에게 그것들을 건넸다. 이제 동곳과 비녀는 이화가 입게 될 옷에 먼저 들어가 있을 것이다.
무륜은 내관이 가져온 장포로 이화의 몸을 꽁꽁 싸맸다. 그러곤 저는 알몸으로 당당히 문을 나섰다.
처소 앞 위사들은 평소와 같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자세는 바로 했다. 다만 평소처럼 정면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에는 흑천이 둘려 있었다.
만족한 무륜은 보랑을 가로질렀다. 중간중간 시립한 금군들의 눈에도 같은 흑천이 둘렸다. 욕탕에 들어서자 수증기가 자욱했다.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가 꽤 운치 있었다.
무륜은 이화의 장포를 벗겨낸 후 천천히 탕으로 들어갔다. 그를 느낀 이화가 끔벅거리며 눈을 떴다.
“폐하……?”
“더 자도 된다.”
내 옆에 있을 테니.
이화의 눈이 스르륵 다시 감겼다. 혼곤하게 잠드는 모양새가 그저 사랑스러웠다. 무륜은 이번에도 흡족하게 웃으며 잠든 이화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 * *
때늦은 폭염이 계속되던 9월의 어느 날. 흑월이 돌아왔다. 그는 무륜의 집무실 앞에서 번을 서던 이화의 앞에 대뜸 나타나더니 그대로 왈칵 끌어안았다. 사방에서 검이 발도했다. 이화가 급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부서질 듯 집무실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몽휼이 튀어나왔다. 그는 이화에게 엉킨 흑월을 보더니 멈칫하곤 한숨을 쉬었다.
그 옆으로 무륜이 나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은 표정이었으나 흑월을 강제로 뜯어내지도 않았다.
이화는 떨리는 흑월의 등을 도닥이다 말고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밀리지 않았다. 당황스러워도 이해는 갔다. 평시라면 계속 안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근무 중이다. 심지어 하늘 같은 황상의 앞.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위사장 이화.”
“예, 폐하.”
“오늘은 이만 퇴궐해도 좋다.”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이화는 흑월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먼저 흑월을 씻기고 먹였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흑월이 초췌한 안색으로 이화를 마주했다. 여율령의 부재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여율령의 죽음을 들은 건 남방의 무진을 동분서주하던 때였다. 연락을 주겠다던 분이 감감무소식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래도 설마 했다. 그 여율령이니까.
이화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면 여율령은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었다. 굳건하고 단단하여 그 하나만으로 능히 거대한 저택을 하나 떠받들 수 있는 그런 기둥.
흑월의 손이 주먹 쥐어졌다. 믿을 수 없었다. 저택 어디에서도 여율령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흑월.”
이화가 그런 흑월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어쭙잖은 위로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같은 것을 공유했다. 그 상실의 감정은 완전히 같진 않았으나 그 누구보다 비슷했다.
-처음으로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무엇을.”
-제 혀가 없는 것을요.
“…….”
-울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흑월에게 있어 혀와 성대는 딱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신체 부위였다. 가끔 불편할 때도 있는데 그건 말 그대로 불편할 뿐, 없어서 죽겠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죽을 것 같았다. 복면에 가려진 그의 목은, 그가 제 목을 할퀴며 낸 손톱자국으로 가득했다.
-소리 없는 애도는 초라하더군요.
“그렇지 않아.”
-제가 느끼기엔 초라했습니다.
“상서령은 나처럼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흑월이 어깨를 떨었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해줄 상서령은 이제 없습니다.
소리 없는 흐느낌은 처절한 울부짖음보다 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는 사람의 마음에 사무쳤다.
-도련님도 상서령처럼 없어질 거잖습니까.
이화는 그제야 흑월의 절망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상서령의 죽음에서 이화의 죽음을 함께 보았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남방에서 해독할 약재를 늦지 않게 찾아낸다 한들, 그를 조합할 사람이 없어선 모다 소용없는 짓이다.
-도련님도 절 두고 가실 거잖습니까.
모든 것을 아는 그에겐 망설도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화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 순간엔 정말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멍청하게 독에 당하지만 않았어도 흑월이 남방으로 갈 일 따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여율령은 환궁할 때 그와 함께였을 것이며, 그리 쉽게 납치당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흑월의 손이 위로 올라와 이화의 뺨을 가볍게 쥐었다. 부드러운 힘이 숙어진 고개를 들었다.
저를 위로하려 하는가. 그리 생각하며 순순히 따른 순간, 이화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흑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복면은 이미 목까지 내려간 후였다.
“읍?!”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흑월의 입술은 물기 없이 메말라 있었다. 그것이 마음고생을 대변하는 듯해 이화는 그 와중에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흑월의 어깨를 움켜쥐고 갈팡질팡했다.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응하지도 못하는데, 흑월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화는 눈을 감아버렸다. 사람은 둘이나, 혀는 하나뿐이다. 흑월의 몸이 점점 굳어갔다. 이화의 뺨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무언가를 포기한 그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 순간, 흑월의 멱살을 움켜쥔 이화가 그를 확 당겼다. 살짝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부딪혔다.
이화의 혀가 흑월의 입안을 침범했다. 흑월이 움찔했다. 그는 혀가 제 잇새를 가르고, 입천장을 누르고, 입 안쪽을 휘저을 때마다 흠칫거렸다. 틀림없이 성적인 행위임에도 아랫도리가 아니라 심장이 지끈거렸다. 상처 입은 짐승들이 서로를 보듬는 것에 가까웠다.
입맞춤이라 부르기엔 궁상맞고 아무 의미 없다 하기엔 또 애틋한, 긴 위로 끝에 이화가 떨어져 나갔다.
“흑월, 나는.”
흑월이 손을 들어 이화의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를 저은 그가 이화의 손바닥에 글귀를 적었다.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말을 남겼다.
-정말로 접문할 때 아쉽긴 하군요.
이화는 목이 메었다. 자신의 이런 애매한 태도가 그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느껴질지 알고 있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흑월이 이화를 잘 아는 만큼 그 또한 흑월을 잘 알았다. 살기 위해 멀리 보냈던 흑월의 마음은 이제 겨우 한 걸음씩 돌아오고 있었다.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 너는 내 형제 같은 사람이다. 내 가족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그는 연정과 다르다. 하니, 너는 절대 내 마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 선을 긋고 배척하면 제 마음은 편하겠으나 흑월은 죽을 것이다. 마음이 죽을 것이다. 떠난 것도 아니고 죽은 마음을 품고 사람이 어찌 멀쩡히 살 수 있을까.
특히 흑월은 육신은 튼튼할지언정 내면은 여기저기 짓무른 상흔이 많았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멍이 드는 복숭아처럼. 심지어 여율령마저 죽은 지금, 그를 유일하게 지탱하는 버팀목은 자신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화가 멈칫했다.
그럼 자신이 죽은 이후 흑월은 어찌 될 것인가.
-저는 다시 남방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흑월은 남방이 아니라 삼도천 강변을 건널 것처럼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솜털이 쭈뼛 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이화가 흑월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가지 마. 가지 말고 예 있어. 네 말처럼 어차피 간다 한들.”
-그래도 가겠습니다.
흑월이 냉정하게 그 손을 떨어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이화가 당황하여 헤매는 사이, 그의 신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흑월?”
이화의 심이 덜걱했다.
“흑월!”
그것이, 이화가 본 흑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흑월이 사라지고 닷새 뒤. 남방에서부터 전서응이 저택에 날아들었다. 흑월의 전언이었다.
[남방에 도착했습니다.]
감정이라곤 담기지 않은, 그 짧은 문장이 다였다. 얇고 작게 자른 서신을 손안에 움켜쥐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감촉이 손바닥에 새겨졌다.
이것 말고도 확인해야 할 전언이 있음을 상기했다. 반드시 보아야 하는데. 막상 보면 그의 죽음이 새삼 가슴에 사무칠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러다 더 미룰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을 때, 나는 용기의 유무에 관계없이 황궁의 서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