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3화
방 안에 들어 사람들을 물리자마자 무륜은 대뜸 누가 네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나 추궁했다. 나는 혹 위중혁과 있던 것을 들켰나 흠칫했다.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까 늘어서 있던 시비 중 한 명이더냐? 아니지. 그들 모두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겠군.”
“예?”
“네 의복 말이다.”
“아니, 아닙니다. 저 혼자 갈아입었습니다.”
“참말이냐?”
“예. 제가 어찌 폐하께 거짓을 고하리까.”
“그렇구나.”
굳어 있던 무륜의 낯이 봄날처럼 풀렸다. 반면 나는 황당했다. 설마 내가 속곳 차림으로 시비들 앞에 섰을…… 잠깐.
“폐하,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륜은 ‘음. 그보다’ 하고 말을 돌렸다.
“그렇게 이기고 싶더냐?”
상당히 오묘한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유구무언이라. 이런 모양새로 아니라 해봤자 비겁한 변명밖에 안 된다. 무륜은 나를 구석구석 뜯어봤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하니 궁금하구나. 소원이 뭔지 들어나 보자.”
“이긴 것은 폐하가 아니십니까. 폐하의 소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무륜이 능글맞게 웃었다. 안 그러던 사람이 저러니 심히 불안했다. 나는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지금 상황도 피하고, 계속 거슬리는 것도 해결할 기막힌 방법을 떠올렸다.
“폐하, 그 전에 잠시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어딜.”
“청운관의 처소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그 차림으로 청운관을 가겠다고?”
“……그럼 퇴궐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 차림으로?”
빠르게 둘을 비교해 봤다. 궁내를 비조처럼 내달리는 시비와 궐 밖의 지붕을 넘나드는 시비. 둘 다 싫었다. 해도 선택지는 그 둘뿐이다. 거참 난해하구나. 끙끙거리다 비장하게 말했다.
“역시 청운관에 가겠습니다.”
오늘 내 한계를 시험해 보리라. 비조가 아니라 뭐가 지났나 싶게 날아갈 것이다. 무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는 소릴 냈다.
“하면 내 소원을 먼저 말하마. 그것만 이뤄주고 가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자가 승자의 권리를 행사한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입은 옷을 전부 벗거라.”
……반대하고 싶어졌다.
“또한 내일 해가 뜰 때까지 몸에 무언가 걸치는 걸 금한다.”
“……폐하, 제가 폐하께 뭔가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까.”
궁을 내달리는 시비보다 더한 것이 있을 줄이야. 나는 침음을 흘렸다. 알몸으로 궁내를 활보하는 위사장. 그 순간 시비가 백배는 나아 보였다.
무륜이 나른하게 웃었다. 웃는 낯에서 홀로 진지한 눈이 나를 빤히 보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결국 무언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허릿대부터 풀었다. 손끝이 저렸다. 중간에 몇 번이나 헛손질했다. 타는 듯 응시하는 시선 때문에 더 긴장됐다. 한 꺼풀씩 벗은 옷이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무륜의 입가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자련 궁의 방에서처럼 속곳 차림이 되었을 무렵엔 심각하다 못해 사나운 시선이 맨살에 와 닿았다. 태연한 척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조금만 방심하면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설 것 같았다.
“나는 분명 전부라고 하였는데.”
남은 건 속곳 한 장뿐이었다. 그렇다고 지엄한 황명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다. 예서 버티는 게 더 우스운 일이다. 그도 나도 같은 사내 아닌가. 신체적으로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속곳을 홀랑 벗고 앞을 향해 반듯하게 섰다.
무륜의 시선이 더욱 집요해졌다. 끈적거리고, 단내가 날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순간부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감내하고 견뎠다. 수치스러워도 그게 마냥 싫지는 않았다. 새로운 충격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 무륜이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위중혁과는 달랐다. 훅 들어왔던 그와 달리, 무륜은 자신이 다가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느리고 느렸다.
시간을 들여 다가온 그가 손을 뻗었다. 어깨? 턱? 뺨? 닿을 만한 곳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으나 정답은 없었다. 목 뒷덜미로 간 손이 느슨하게 묶은 머리 끈을 풀어냈다. 잿빛 머리칼이 출렁 흘러내렸다.
나는 내가 어찌해 들켰는지 알게 됐다. 세상에 이렇게 멍청할 수가. 침음을 흘리며 자책했다. 머리칼에 대한 건 아예 잊고 잊었다. 동시에 의문도 생겼다. 금군들은 왜 보고도 못 본 척 바로 잡지 않았을까?
“벗으라고 했던 것 말이다.”
무륜이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실은 농이었다.”
그 말에 겨우 한시름 놨다.
“그런데 네 적신을 보니 알겠구나. 나는 진심이었다.”
높으신 분이 한 입으로 두말을 했다.
“그래. 이게 보고 싶었다. 욕탕의 물그림자에 흐려진 것도 아니고, 수증기에 가린 것도 아닌, 네가 나를 위해 보여주는 네 몸이 보고 싶었다.”
욕탕. 그때를 상기하자 나 역시도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없어야 할 자리에까지 있던 몽둥이. 그 장대한 용의 자태가.
“…….”
무륜의 다리 사이를 향해 떨어질 뻔한 시선을 간신히 위에 붙들어두었다. 하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가 내 손을 잡아다 제 앞섶에 얹었다. 벌떡 기상한 용의 기세가 전해졌다. 눈동자가 태풍 맞은 강아지풀처럼 흔들렸다.
“안아달라던 말. 아직 유효하느냐.”
“이미 시일이 지나 무효입니다.”
“내가 싫으냐.”
“답을 이미 아시면서 그리 하문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너무하다니. 무어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무륜이 웃었다.
“뿔이 난 모습도 좋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그가 허릿대를 풀었다. 겹겹이 입은 옷도 훌훌 벗어 던지시더니 순식간에 나와 같은 적신이 되었다. 탄탄한 허벅지. 근육으로 들어찬 배와 허리. 꽉 잡힌 가슴팍. 넓은 어깨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이어진 단단한 팔뚝까지. 모든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러면 공평하느냐?”
“전혀요. 오히려 비겁하십니다.”
이번에도 픽 하고 웃은 무륜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맨가슴이 맞닿았다. 옷을 입고 안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 상태로 입술이 맞닿았다.
그는 평소처럼 접문만 하지 않았다. 손이 뱀처럼 내 살결을 쓸었다. 바쁘게 움직인 손가락이 옆구리를 문지르자 간지러움에 기겁했다. 눈을 확 뜨며 반사적으로 그를 밀쳤다. 떠밀려 두어 걸음 물러난 무륜이 그 상태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만 하얗게 질렸다.
“소, 소, 송구합…….”
“감히 허락도 없이 짐의 옥체에 손을 대다니.”
그가 나와의 대화에서 ‘짐’이라는 호칭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륜이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한숨도 크게 쉬었다. 그때마다 내 어깨가 움칠움칠했다.
“침상에 올라가 엎드려 눕거라.”
엄한 목소리였다. 머뭇거리면서도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눈도 감거라.”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시야가 닫히자 온 신경이 귀로 쏠렸다. 협탁을 뒤지는 소리가 났다. 침상의 기둥 위로 올라가 있던 천개가 사르륵 내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뭔가의 준비를 마친 그가 마침내 침상 위로 올라왔다.
“폐하?”
“그래. 나다.”
등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그가 ‘무륜이다’ 했다.
그래. 나다. 무륜이다. 세 마디 말이 시간을 두고 맞춰졌다. 몸에서 절로 힘이 풀렸다. 묘할 만큼 안심이 되어 그가 뭘 하든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리고…… 후회했다.
* * *
오후 나절부터 시작된 정사는 휘영청 달이 뜰 때까지 이어지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에야 끝이 났다. 기절한 이화 옆에 누운 무륜이 그를 들여다봤다.
온통 하얀 나신에 입술만이 붉었다. 그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그가 흐트러진 이화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색이 옅은 머리. 새까만 검은색 머리뿐인 금국에선 드문 색이었다. 전체적으로 옅은데 또 뒤적여 보면 조금 짙은 부분도 섞여 신기했다.
머리가 이런 연유는 이화도 모른다 했다. 저도 신기합니다. 작은 마을에 살 때는 몰랐지만 도성을 두루 둘러봐도 저와 같은 자는 없음이라. 그가 ‘아’ 하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비에게서 저를 샀던 자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희귀한 것을 손에 넣었다고. 그는 분명 제 머리를 두고 한 말일 겁니다. 눈동자도 색이 옅은 편이지만 머리만큼 눈에 띄진 않으니 말입니다.’
지극히 담담한 어조였다. 그것이 외려 무륜의 속을 뒤집어 놨다. 그때를 떠올린 그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몽휼이 봤으면 저분이 또 누굴 조지려고 저러시나 했을 미소였다.
“그래. 특별한 것은 맞지.”
어두운 곳에서 보면 밤하늘의 달을 가린 얇은 구름 같았다. 혹은 새까만 돌에 앉은 잠자리의 날개 같기도 했다. 그런데 또 환한 햇살 아래서 보면 제비꽃과 해가 비친 호수의 표면, 그리고 은 수실이 보였다.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반짝거리는 표면이 온통 찬연하게 빛났다.
눈동자도 마찬가지다.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색이라고 무륜은 생각했다.
“그런 색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너 하나뿐일 것이다.”
무륜이 이화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하나뿐인 너는 내 것이지.”
깊이 잠든 이화는 듣지 못할 말이었으나, 무륜은 퍽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때, 밖에서 무륜을 찾는 자가 있었다. 태감 영감이었다. 무륜은 이화가 자니 조용히 하고, 대신 욕탕을 신경 써서 준비하라 일렀다.
평소에도 항시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탕이었다. 그럼 평소와 달리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미 전후 사정 전부 파악한 내관은 되묻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