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2화
양손으로 받친 동곳을 내밀며 이제 눈 뜨시라 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달아 올랐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나는 하얗게 질렸다. 마지막 각혈은 여율령이 죽은 다음 날 밤. 내가 저택에 돌아간 직후였다. 일주일 간격이긴 하나 이번은 하루가 빨랐다. 어째서, 라고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생각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멀뚱히 앉아 있던 위중혁에게 달려들었다. 왼팔로 그의 가슴팍을 밀쳐 정자 기둥에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헛숨을 삼키는 입을 틀어막았다. 두 눈은 부릅떠 그를 노려봤다. 눈치 없는 그조차도 무언가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다음 순간, 목 안으로 억눌렀던 피가 입안으로 치밀었다. 평소와 달리 입술을 앙다물며 핏물을 삼켰다. 하지만 각혈은 기침과 같아서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
놀람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위중혁이 내 팔목을 움켜쥐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으로 침묵을 종용했다. 다행히 바람은 역풍이었다. 그만 침묵한다면 들키지 않는다.
위중혁이 일그러진 눈매를 하고 나를 마주 노려봤다. 지금은 침묵하겠으나 반드시 연유를 들으리라는 의지가 전해졌다.
“이화?”
움직임을 알아차린 무륜이 의아함을 담아 나를 불렀다. 착실하게도 눈은 여전히 감고 있었다.
“폐하, 저와 놀이 하나 하시겠습니까.”
무륜이 눈을 감은 채로 되물었다.
“놀이?”
“예. 단순한 숨바꼭질입니다. 지금부터 백을 세고 절 찾으십시오. 한 식경 안에 찾으면 폐하의 소원을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소원이라는 말에 그의 표정이 일변했다.
“못 찾으시면 그땐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언제부터 세면 되겠느냐.”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에 작게 웃었다.
“지금이요. 범위는 이 자련 궁입니다.”
무륜이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나는 위중혁의 손을 잡아끌고 달렸다. 그는 순순히 끌려왔다.
몸을 숨긴 곳은 자련 궁 깊숙한 곳의 한 방이었다. 귀한 분의 거처는 아니고 궁인들의 임시 창고 겸, 휴식을 취하는 방 같았다.
나는 우선 옷부터 벗었다. 피가 묻은 상의를 꼼꼼하게 접어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기고, 뭔가 몸에 걸칠 것이 없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그냥 모른 척해 달라는 말은 당하께 통하지 않겠죠.”
“알면 순순히 말하도록.”
나무로 만든 서랍장을 열었다. 안에는 차곡차곡 갠 시비들의 의복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아주 그럴듯한 계획이 뇌리를 스쳤다. 놀이를 제안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문제는 내가 입을 만한 크기의 옷이 있느냐인데…….
“3황자의 독에 당했습니다.”
“뭐?”
“남방의 독인데 해독제가 없는 극독입니다.”
서랍장은 위쪽 칸이 작은 옷이었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큰 옷이었다. 맨 아래 칸에서 의복을 꺼냈다. 어찌어찌 맞을 것 같았다.
“상서령께서 비밀리에 해독할 방법을 찾고 계셨습니다. 요 근래 흑월이 보이지 않은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지금 남방에 가 있거든요.”
바지를 마저 벗고 속곳 차림이 됐다. 시비들의 복식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입는 법을 가늠해 보는데 옆으로 다가온 위중혁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정자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악력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아느냐?”
“그럼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제가 모르리까.”
“너는 폐하를 기만하였다.”
“그럼 제가 어찌했어야 옳습니까.”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폐하를 구하다 화살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독화살이더군요. 해독할 방법이 없어 올해를 못 넘기고 죽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못난 속하는 잊어주십시오. 그리 고하여 그분 가슴을 찢어놓기라도 했어야 했다는 말입니까.”
“마찬가지다.”
위중혁이 무겁게 말했다.
“네가 죽으면 매한가지란 말이다, 이 미련한 것아.”
낮은 목소리에 참담함이 가득했다. 짙은 눈썹 아래, 잔물결이 이는 호수의 표면처럼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당하께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네 지금 농이 나오더냐?”
“농이 아니라는 생각은 아니 하시나 봅니다. 됐으니 우선 손을 놓아주십시오. 피를 닦고 옷부터 입어야 합니다. 황상께선 이미 백을 다 세고 저를 찾아다니는 중일 터이니.”
그 전에 수습해야 한다. 그런 의미를 담아 보자 위중혁이 무언가를 억누르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이윽고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속곳만 입은 채 방 안의 탁자 위에 있던 물병을 들어봤다. 다행히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어디 적셔야 하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위중혁이 네모나게 접힌 천을 불쑥 내밀었다. 하급 무사들이 지혈용으로 많이 쓰는 무명천이었다.
“금군대장이시면서 이런 걸 가지고 다니십니까.”
“용도에 맞는 것을 용도에 맞는 목적으로 소지해야지. 지혈에는 약초와 무명천이 최고다.”
실로 위중혁다웠다. 나는 감사히 쓰겠다며 천을 건네받았다. 물에 적셔 입과 목 주변을 닦았다.
“거기. 덜 닦인 곳이 있다.”
위중혁이 턱 근처를 가리켰다. 대충 문질렀는데 게가 아니라 했다. 방 내부를 다시 훑었다. 동경은 없었다.
“여기다.”
훅 다가온 위중혁이 내 손에서 천을 가져갔다. 다른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올린 그가 얼굴을 바짝 붙였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피를 감춰야겠다는 생각에 옷부터 벗어 던졌는데, 같은 사내라도 이렇게 옷 입은 사람 앞에서 홀로 벌거벗고 있으려니 뒤늦은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반면 위중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누가 둔치 아니랄까 봐 내가 민망해하는 것도 몰랐다. 그는 태연히 내 턱 부근을 문질러 닦았다. 섬세한 손길이었다. 눈동자만 힐긋 움직여 그를 봤다. 애검을 닦는 듯 진중한 모습이 너무 그다웠다.
“다 됐다.”
묵묵히 떨어진 그가 무명천을 갈무리해 품에 넣었다.
“이건 내가 처분하지.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니 일단은 맞춰주겠다.”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으실 겁니까.”
“지금은, 그래.”
위중혁은 뱀 허물처럼 떨어진 내 옷을 전부 주워 들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날을 잡아서 저택으로 연통을 넣어라.”
“그리하겠습니다.”
그가 방을 나갔다.
나는 시비의 복식을 갖춘 후, 한데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어 내렸다. 출렁거리며 떨어진 머리칼이 허리께에 머물렀다. 그를 아래쪽으로 느슨하게 다시 묶었다.
보통 시비들은 일하기 편하도록 머리를 쫑쫑 땋거나 별 희한한 모양으로 틀어 올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손재주는 없었다. 어차피 잠깐의 눈속임만 하면 된다.
그리 생각하며 물병을 들고 문을 열었다. 눈은 내리깐 채 물병을 품에 받쳐 들고 종종걸음을 쳤다. 계기는 각혈이었지만 일이 이리되자 욕심이 났다.
‘소원.’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없었는데, 막상 내뱉고 나니 바라는 것이 생겼다.
‘이제 백을 다 세었으려나.’
그럼 앞으로 한 식경만 버티면 되었다.
마침 보랑을 가로지르는 시비의 무리가 보였다. 그 말단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걸을수록 자련 궁의 소란이 느껴졌다. 무륜은 안 되겠던지 금군까지 동원한 모양이었다.
하긴 반드시 무륜 혼자의 힘으로 찾아야 한다곤 하지 않았다. 게다가 금군은 황제의 수족이니 나중에 반론도 할 수 있다. 무장한 금군이 옆을 달려가자 시비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벽에 붙어 섰다.
궁인답게 무표정했으나 눈에서 드러나는 두려움까지 숨기진 못했다. 그들은 한동안 멈춰 선 채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필시 누군가를 찾는 행색인 거한의 금군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니, 저들 가슴도 널을 뛰었을 터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벽에 등을 붙였다. 내력과 기도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억눌렀다. 설마 이리 멈출 줄은 몰라서 옆의 시비들과는 다른 의미로 심이 철렁했으나, 금군은 바로 앞을 지나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누가 상상이나 할까. 흑의 무복을 즐겨 입는 위사장이 시비들 사이에 서 있을 것이라고.
다섯 번째 금군을 보내고 나는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아예 손에 든 물병을 만지작거리며 딴생각에 잠겼다. 여율령에 대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죽기 전 내게 해줬던 이야기에 대한 거였다.
위금지사.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목재 같은 걸 허공에 들어 올렸으며, 국지적인 날씨를 조작할 수 있었던 위문현. 그리고 그와 같은 ‘이상’을 물려받은 지한국 태자 타낙한.
‘이는 금국 황실의 직계만이 열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시점에선 황제 폐하 한 분뿐입니다. 아들에, 위사장쯤 되지 않고선 함부로 전할 수 없는 문부이죠.’
어디에도 웃을 구석이 없는 말이었거늘. 그 말을 들은 타낙한은 파안대소했다.
나는 위금지사와 타낙한이 서로 맞물린 이야기임을 다시 상기했다.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상당히 건방진 생각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물병을 문지르던 손끝이 굳었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이상뿐이 아닐지도 몰랐다. 만약 위문현의 이능까지 같이 물려받았다면…….
스윽.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누군가의 발이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흑피의 공단화였다. 주변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가 이겼구나.”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은 무륜이 갑자기 옆에 있던 시비들을 노려봤다. 하늘 같은 황상의 옥면에 노기가 서렸다. 시선을 받은 이들이 파리하게 질렸다.
“폐하?”
영문을 모르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럽게 부르자 다시 봄바람을 두른 그가 나를 잡아끌었다. 본궁에서 자련 궁으로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다만 마지막은 집무실이 아니라 무륜의 처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