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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1화 (61/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1화

“괜찮으냐?”

“예. 멀쩡합니다. 그…….”

그, 폐하의 턱은 멀쩡하십니까, 라고 차마 묻지 못하겠다. 그런 내 속마음을 찰떡같이 읽은 무륜이 묻기 전에 답했다.

“괜찮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늦게나마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기 위해 읍했다.

“이 나라의 홍복을 뵙습-”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락 끌어안겼다. 당황했다. 무륜의 어깨 너머로 눈에 지진이 일어난 위사들이 보였다. 하지만 선황부터 무륜까지, 2대에 걸쳐 황제를 섬긴 내관은 평이한 신색이었다. 금군들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라 더 당황스러웠다.

“폐, 폐하.”

“곁에 있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어찌나 마음이 쓰이던지. 좀 괜찮아진 것이냐.”

멘 목으로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이렇게 여위었는데! 뭔가 먹긴 한 건가.”

나를 이리저리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무륜은 결국 태감 영감을 찾았다.

“예. 폐하.”

“점심상 일찍 들이라…… 아니, 지금 당장 들이라 하고 생물방 가서 준비한 것도 전부 내오도록.”

태감 영감이 싱긋 웃으며 읍했다.

“수저는 두 개 준비할까요.”

“그래. 두 개 준비해라.”

눈치만 빠른 게 아니라 처세도 훌륭했다. 과연 황궁의 터줏대감이다. 그가 아래 내관을 시켜 무륜의 지시를 전했다. 나는 그사이 무륜에게 이끌려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니지. 아니야.”

그런데 막 문을 넘던 무륜이 그리 중얼거리곤 곧바로 몸을 틀었다. 그러곤 보랑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향했다.

“폐하?”

“그래.”

“지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정무를 보던 중이 아니셨습니까.”

“음. 아니다. 식사를 하려던 참이다.”

그는 눈 하나 깜박 않고 거짓을 고했다.

무륜의 걸음이 닿은 건 본궁의 바로 옆에 자리한 자련 궁이었다. 본래는 황후가 머무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주인 없이 텅 비어 필요 최저한의 관리만 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황제의 방문에 기함한 궁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륜은 씩씩하게 자련 궁을 가로질렀다. 그가 최종적으로 향한 건 자련 궁 내에서도 정원에 있는 큰 못 위의 정자였다.

작은 탄성을 뱉었다. 그를 들은 무륜이 흡족하게 웃었다. 작은 배 정도는 띄울 수 있을 크기의 못은 깨끗한 물로 가득했다. 투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으로 떠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뱃놀이를 무척 좋아하는 한 황후와 그녀를 무척 좋아하는 황제가 있었다. 그녀가 하루가 멀다 하고 멀리까지 뱃놀이를 나가자 낙심한 황제가 이를 만들어 선물했지. 황후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조심하거라. 저리 보여도 뱃놀이에 무리가 없을 만큼 수심이 깊다.”

어쩐지 상상이 됐다. 신이 나 놀러 나가는 황후와 홀로 남겨져서 시무룩한 황제.

황제는 분명 소심한 자였을 것이다. 해서 말리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 묘책이라며 이 못을 만들었겠지. 황후는 기뻐했을 것이고, 자련 궁에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귀엽군요.”

“귀여워? 누가?”

혼잣말을 들은 무륜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예?”

“황후가 귀엽다는 거냐, 황제가 귀엽다는 거냐.”

황제였다. 하지만 여기서 사실대로 대답해선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죄송합니다. 망극한 소릴 했습니다.”

“전혀 망극하지 않다. 괜찮으니 대답해 보거라. 누가 귀엽다는 거지?”

그러나 무륜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야기가 귀엽습니다.”

나는 여율령의 아들답게 위기를 모면했다.

“그래?”

무륜은 의구심이 남은 듯했지만 더 묻진 않았다. 그는 반원형으로 놓인 돌다리를 건너 정자로 향했다.

정자는 대리석 바닥에 여섯 개의 기둥과 지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특이한 건 중앙에 놓인 탁자였다. 불순물이 많이 섞이긴 했지만 거대한 자수정을 통째로 깎고 다듬어 만든 물건이었다.

손을 놓은 무륜이 내게 구경해 보라 했다. 그는 아마 정자에서 보이는 주변의 풍광을 말한 것이겠지만, 나는 자수정 탁자에 눈길이 갔다. 손으로 쓸어봤다. 오늘도 한 번 닦았는지 먼지가 거의 묻어나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드느냐? 너 주랴?”

틀림없는 농이었다. 픽 웃으며 무륜을 봤다가 표정을 굳혔다. 그를 본 순간 농이 아님을 알았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청운관의 내 처소에 이 탁자가 오게 될 것이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색하고 답하자 무륜이 웃었다.

“농이었다.”

절대 아니었다는 데 여율령의 저택을 걸 수 있었다.

그쯤, 생물방에 갔던 내관이 돌아왔다. 알리고 간 것도 아닌데 그는 자연스럽게 자련 궁의 정자로 찾아왔다. 솔직히 신기했다. 이게 바로 황궁 물 좀 먹었다는 내관의 기지인가 싶기도 했다. 음식을 나르는 시비들 앞에 선 내관은 위풍당당했다.

“수고했다. 놓으면 전부 물러가 있어라.”

“하오나 폐하, 그럼 호위에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부디 옥체를 보중하소서.”

금군대장 위중혁이 진중하게 읍했다.

평소였다면 가만히 있었겠으나, 위중혁의 말은 내게 여율령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로 일주일. 나는 상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수준의 평정심은 유지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여율령에게서 배운 것이다.

무륜과는 다른 의미로 빚을 졌던 사람. 무륜과는 전혀 다른 결로 내게 스며든 사람. 나를 상인에게 팔아넘긴,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무두장이보다 오히려 더 진짜 아버지 같았던 사람.

“위중혁.”

“예.”

“짐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갸륵하구나. 역시 금군대장직을 역임할 만하다.”

“감읍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놈의 눈치는 대체 어찌해야 자라날꼬.”

“…….”

금군과 밀영군이 열 장 밖으로 물러나 섰다. 위중혁은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오늘 그는 금군대장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백색에 황금 수실과 금장식이 잘랑거렸다. 덕분에 황금 대벌레가 거꾸로 섰다.

무륜은 내게 식사를 권하며 저놈이 무신경해 그렇지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라 했다. 나는 저도 안다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위중혁에게 물었다. 식사하였느냐고. 그는 아직이라 답했고, 나는 무륜을 봤다.

작게 한숨을 쉰 무륜이 위중혁을 불렀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그가 엉거주춤하게 착석했다. 우리는 셋이 둘러앉아 식사했다.

“그러고 보니, 몽휼은 어디 있습니까?”

“백록 궁에 가 있다.”

사절들이 묵고 있는, 서남쪽에 외따로 떨어진 별궁이었다.

“겹겹이 둘러싸 감시를 하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지.”

무륜은 주어를 말하지 않았으나 나는 몽휼이 타낙한에게 가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엔 무륜이 내게 흑월은 어디 있냐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여율령의 심부름을 가 있다고만 대답했다. 무륜은 더 묻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궁인들이 상을 치웠다. 대신 칠보 쟁반에 과일과 한과를 담아 내왔다. 따로 명이 없어 위중혁은 멋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안 그래도 없는 눈치를 보느라 끙끙거리는 그를 모른 척하며 정자 밖으로 눈을 돌렸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멍하니 호수에 가까운 못을 응시했다.

어느덧 9월. 독에 중독되고 약 두 달 반이 지났다. 가장 오래 버틴 자는 석 달을 산 일류 무사였음을 상기했다. 내가 그만큼 버틴다면 앞으로 반 달. 그보다 더 버틴다 해도…….

‘올해 첫눈, 볼 수 있을까?’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 나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실감이 덜 든 것도 있고 특급 무사니 틀림없이 더 오래 버틸 거라 자신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다친 탓일까. 이젠 그때만큼 자신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나는 풍경을 보고 있었지만, 무륜은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딱 마주쳤다.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제가 혹 폐하를 거부했으면 정말로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셨습니까?”

무륜은 침묵했다. 그게 곧 대답이었다.

“망설을 하셨군요.”

책하는 내용과 달리 목소리는 온화했다. 기실 정말로 놓아줄 셈이었다고 했으면 외려 실망했을 것이다. 상처받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폐하.”

“그래.”

“잠깐만 눈을 감아주시겠습니까.”

무륜은 되묻지도 않고 순순히 눈을 감았다. 나는 품에 손을 넣었다. 두 개의 비녀가 손에 걸렸다.

하나는 끝이 검게 물든 비녀였다. 이미 중독된 이상 그 쓰임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상하게 버릴 수가 없었다. 어디 놓고 다닐 물건도 아닌지라 어쩌다 보니 부적처럼 계속 품고 다녔다.

다른 하나는 무륜과 함께 야시장을 거닐다 산 것이었다. 끝에 작은 목련이 핀, 비녀에 가까운 동곳. 처음부터 그에게 어울릴 것 같아 손에 들었다.

사실 주인에게 값을 치른 후엔 고민을 많이 했다. 이리 볼품없는 것을 그에게 선물해도 될까, 하고.

여염집에서라면 틀림없는 고급품이겠으나, 선물하는 대상은 이 나라의 지엄한 황상이다. 그의 주변에 귀한 것은 차고 넘쳤다. 연 대륙 제일이라는 금국. 그 금국의 제일이라는 황제. 세상의 모든 귀하고 비싼 것들은 그의 발치에 깔려 있었다.

차라리 장인에게 주문을 넣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으나, 그렇게 만들어도 어차피 그가 가진 무수한 보물 중 하나가 될 따름이다. 그것으론 부족했다.

손에 잡힌 동곳을 만지작거렸다. 끝에 작게 달린 목련 조각이 오돌토돌 손끝을 눌렀다.

실소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망설을 했다. 그에게 어울릴 것 같아 손에 든 게 아니다. 그라면 나뭇가지를 꽂아도 태가 났을 것이다.

그의 머리를 장식한 목련. 그것이 내가 이 동곳을 선택한 이유였다.

나는 부족한 것을 다른 것으로 채웠다. 이불 밑에 들어간 동짓날 밤처럼, 야시장의 밤을 잘라 동곳에 달린 목련의 꽃받침 밑에 넣었다. 무륜은 이 동곳을 볼 적마다 틀림없이 야시장을 함께 거닌 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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